작가명 : 쿠르베(Gustave Courbet)
활동년도 : 1819~1877
작가소개 : [사실주의 운동의 선도자]
쿠르베는 당대의 낭만주의 회화에 반발하여 일상적인 사건들을 그림의 주제로 택했다. 인물들을 빽빽이 그려 넣은 어두운 배경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Artist's Studio](1855)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들은 좀더 감각적이고 다채로워졌다.
[초기생애와 작품]
쿠르베는 프랑스 동부에서 부유한 농부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 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하는 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들 부자는 서로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는데, 쿠르베가 지방법률가보다는 화가가 될 작정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만일 도중에 그만두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의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땅과 포도원, 집까지 팔겠다고 덧붙였다. 재정적인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청년 쿠르베는 미술에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얻은 그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Courbet with a Black Dog]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 전에 입선했다. 그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
[사실주의의 태동]
1848년의 혁명은 제2공화국을 이끌면서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새로운 자유주의 정신을 낳았다. 살롱의 전시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튈르리 궁으로 옮겨졌다. 쿠르베는 1849년 그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의 초기 작품은 비평가들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1849년 그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 오르낭에 있는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다시 그의 고향마을에 감화되어 2점의 뛰어난 그림인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Breakers],[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을 그렸다. 1849년에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그림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이 두 그림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더 절제되고 이상화된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미술계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실주의 파의 선도자]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와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친하게 사귀었던 쿠르베는 새로운 사실주의 파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결국 동시대의 다른 운동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가 사실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방인 프랑슈콩테와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이자 그가 태어난 곳인 오르낭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생 동안의 애착이었다. 그는 잠깐 스위스를 방문한 뒤 오르낭으로 돌아가서 1854년 후반에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리기 시작해 6주만에 완성했는데, 그의 미술 생애에 미친 영향들을 온갖 사회 계층의 인물들로 묘사한 우의적인 그림인 [화가의 작업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화가 자신은 자부심을 드러낸 채 모든 인물들을 주재하면서 누드 모델에게는 등을 돌린 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1855년의 만국박람회에서 심사원단이 이 그림을 거절하자 쿠르베는 친구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그 전람회장에서 가까운 곳에 사실주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의 전시회는 첫 번째 사실주의 회화 그룹전이 되었다. 이 시도는 실패했으며,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만이 그의 일기에서 쿠르베의 대담성과 재능을 칭찬했다. 쿠르베는 1867년 다시 한번 그룹전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1856년 쿠르베는 독일을 방문하여 동료 미술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3년 뒤 40세가 된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는 여전히 혹독한 비평을 받았지만 이제 명백히 미술의 대가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회화 양식들이 예술적 착상에 장애만 될 뿐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등을 돌린 새 세대 화가들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쿠르베는 온갖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성 찬미자였던 그는 매우 따뜻한 느낌의 관능적인 그림들에서 여성의 누드를 예찬했다. 훌륭한 초상화들도 그렸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슈콩테를 찬양해 그곳의 숲·샘·바위·벼랑들을 그리면서 거기에 불멸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1865년에는 에트르타와 도빌, 트루빌 등 제2제정시대에 인기가 있었던 휴양지들의 벼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의 흐름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해 일련의 해안 풍경화들에서 폭풍우 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들은 미술계를 놀라게 하고 인상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인상주의는 대상을 엄격한 윤곽선들로 형상화하기보다는 대상에 부딪쳐 반사된 광선 및 색채를 그려 더욱 놀랄 만한 감각적 표현을 성취했다.
[정치활동]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이 일어나 제2제정이 무너지면서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코뮌(파리에 세워진 혁명정부)이 수립되어, 프랑스에 체류중인 독일인들 및 나폴레옹 3세에게 계속 충성하는 베르사유군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파리 코뮌 사람들은 베르사유군이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그 무렵 미술가동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박물관들을 다시 열고 해마다 열리는 살롱전을 주관할 임무를 맡은 쿠르베는 코뮌의 혁명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물관들을 여는 대신 중요한 공공기념관들, 특히 세브르 자기공장과 퐁텐블로의 궁전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는 그 당시 독일군의 계속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리 코뮌의 과격한 행위들에 놀라 5월 2일 사임했다. 파리 코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군을 기념하는 방돔 궁전의 기둥을 없애기로 결의하고 5월 16일 그 결정을 실행했다. 그러나 5월 28일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6월 7일 쿠르베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 기둥의 파괴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군사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그 기념물이 상징하고 있는 군국주의에 대해 종종 혐오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비록 그 파괴 행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선동자로 고발되었다. 속죄양이 필요하던 차에, 기둥 파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지만 영국으로 달아난 사람들과 쿠르베 자신의 항변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임의로 선택되었다. 그는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음과 동시에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의 중재로 500프랑이라는 최소의 벌금형을 받았다. 처음에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중병에 걸려 파리 근처의 진료소로 옮겨졌다. 석방되자마자 그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르낭으로 갔다. 1872년 티에르가 사임하자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은 다시 쿠르베의 재판을 열어 그를 상대로 그 기둥의 재건축에 드는 비용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전재산과 그의 그림 모두가 압류되었으며, 금화 50만 프랑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는 벌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1873년 7월 23일 국경선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가 플뢰리에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처음에는 브베로 갔다가 다시 라투르드펠즈로 가서 거기에서 봉포르(좋은 안식처)라는 그의 처지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허름한 여관을 구입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그는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쿠르베의 명성은 그가 죽은 뒤 계속 높아져갔다. 그의 비방자들은 종종 그의 정치적 신념이 관용과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의 사회주의에 기초하여 그의 미술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 뒤의 여러 근대 미술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후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기법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관을 제공했다. 즉 그림의 목적은 예전의 유파들이 주장해왔듯이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상투적인 수법과 인위적인 이상주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 버렸다.
자료
프랑스 근대 회화에서 리얼리즘 창시자로 불리는 쿠르베는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했다.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계속 발표하는 등 급진적 사상과 행동 때문에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 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친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추방당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작품명 : 오르낭의 장례식
제작년도 : 1849-5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14x66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885년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당대의 어떤 화가들보다도 쿠르베의 실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유독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두 작품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만이 낙선되었다. 이에 분노한 쿠르베는 결국 별도의 임시 전시장을 만들었고, 그곳을 ‘리얼리즘관'이라 이름 붙이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 후 사실주의라는 명칭은 쿠르베의 이름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쿠르베는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렘브란트와 할스의 작품 연구를 통해 카라밧지오풍의 색채 처리와 빛과 그림자의 표현 방법을 익혔고, 그것을 이 작품에 잘 반영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쥐라 산중의 오르낭 마을에서 있었던 장례식 장면을 모티브로 해서, 시골에서 있었던 우연적인 사건을 역사화로 대치시켜 묘사한 것이다.
처음에 작품의 이름을 <오르낭에 있었던 매장의 역사화>라고 했는데, 시골 마을의 평범한 장례식을 "역사화"라고 부른 것은 당시의 예술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역사화가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라든지 인물의 영웅성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단지 종교적 의미를 초월한 삶과 죽음의 의미가 화폭에 담겨 있을 뿐이다. 쿠르베는 장례식이 지닌 의미를 관념적인 묘사가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사실적이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인간적인 현실로 나타내고 있다.
이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친구, 가족, 고향 사람들을 한 사람씩 아틀리에로 불렀고, 검은 색을 주로 한 상복과 흰색, 빨간색 등의 의복을 수직의 십자가와 대응시키게 그려 나갔다. 반아카데미즘을 표명한 이 작품은 추악한 장면을 소재로 택했다는 이유로, 1850∼1851년 살롱에서 격렬한 비난과 함께 사실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명 : 미역감는 여인들
제작년도 : 185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227x19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853년 살롱에 출품된 쿠르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작품이다. 전시회장을 방문한 나폴레옹 3세까지도 이 작품 앞에서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들라크르와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힘찬 양감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작품명 : 만남(안녕하세요,쿠르베선생)
제작년도 : 185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29x149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쿠르베가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파리에서 남프랑스의 몽펠리에라는 곳에 당도한 참인데, 이 지방 은행가 알프레드 브뤼아스가 개를 끌고 나가서 쿠르베를 맞이하고 있는 장면. 은행가인 브뤼아스는 쿠르베에게는 큰 후원자이며 은인이기 때문에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할 사람은 쿠르베 쪽임에도 불구하고 쿠르베가 도리어 거만을 떨며 브뤼아스의 인사를 흘려 듣고 있는 형세이다.
라파엘로 전파의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의 작품이 대개 자연의 외면적인 인상과 피상적인 면을 보이며 사실과는 무관한 감수성을 드러냈던 반면, 쿠르베의 작품은 라파엘로 전파와 같은 과거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만을 묘사했다.
이 작품 역시 쿠르베의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사실주의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화가가 자신을 보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화구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으며, 그의 앞에 몽켈리에 시의 미술 애호가이자 쿠르베의 열렬한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와 그의 하인이 마중 나와 인사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먼지 나는 길과 길옆의 풀 밭, 개 등 그림의 소재로 걸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묘사하며, 극적인 미화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우아한 포즈도, 미끈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지만, 꾸밈없는 구도를 특징적으로 드러내며 전통적이고 상투적 수법의 능숙한 조작과 인습에 대한 반발을 고무시키고 있다.
작품명 : 화가의 아틀리에
제작년도 : 1855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61x598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풍부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여인, 쿠르베가 제작 중인 풍경화, 등을 돌린 소녀, 사냥꾼 옆에 있는 사냥개 등이 힘찬 실재감을 발휘한다. 쿠르베 자신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사회의 갖가지 비참함을 나타내는 인사들의 그룹, 오른쪽에는 친구들인 철학자, 작가, 시인들이 배치되었다. 진정한 생명화가 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화면 중앙을 제외한 양쪽 부분은 검은 색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다.
이 작품은 1855년 제 1회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됐지만, 너무 크다는 이유로 입선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쿠르베는 몽테뉴 가에 자비로 가건물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작 44점을 전시하는 한편, 사실주의 선언을 담은 프로그램을 판매한다.
"나의 7년 동안의 예술적 생애를 요약하는 사실적 우화"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화가의 아틀리에>는 쿠르베 스스로의 주장에 따르면,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화폭에 그의 생애 동안 받은 모든 영향들을 담으려 한 작품이다. 무대처럼 펼쳐지는 화면의 중심에 고향 마을인 오르낭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놓고 있으며, 발 쪽에는 동물들을 배치하고, 그 오른편에는 누드 모델을 놓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인 프루동, 소설가 샹플레리, 시인 보들레르 같은 그의 정신적 지주들과 미술 애호가 브뤼야스 부부를 등장시키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개괄적인 형태로 사회의 갖가지 상태에 있는 온갖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쿠르베는 샹플레리에게 쓴 편지를 통해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사는 사람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며, "나의 대의에 공감하고, 나의 애상을 지지하며, 나의 행동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 자신과 그 주변 세계와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서 중심부의 인물은 밝고 선명한 햇볕으로 조명되고, 배경과 측면에 있는 인물들은 중간 톤의 어둠으로 베일을 씌우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작품명 : 세느강변의 아가씨들
제작년도 : 1856-57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74x20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처녀가 세느 강변에 누워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그의 뛰어난 모사력이 입증되었고, 등장인물들의 자세와 표정, 당대의 유행 복장 등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작품명 : 샘
제작년도 : 186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28x97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쿠르베의 누드는 마네의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식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관습적인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일대 반항이었다. 여인의 육체는 고대로부터 모든 화가와 조각가들의 계속되는 주제였으나, 신화와 성경 속의 상징적인 의미로만 표현되어 왔다. 쿠르베의 <샘>에 나타나는 여인은 보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느낌을 주는 것과는 달리, 투명하고 밝은 육체와 깊이를 간직한 넓은 둔부를 통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쿠르베에게 있어 누드는 한번도 그의 붓끝에서 떠난 적이 없는 장르였으며, 이 작품은 그의 누드에 대한 관심을 대표하고 있다. <세계의 기원>이나 <잠> 등에서 보였던 파격적인 묘사를 염두에 둘 때, 쿠르베의 이 작품은 미술에 있어 사물의 재현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서의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샘>에서의 여인의 포즈는 레인란텔 같은 초기의 누드 사진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작품명 : 검은 개와 라티스테의 초상
제작년도 : 184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6×5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작품명 : 파이프를 문 자화상
제작년도 : 1846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5×37cm
소장위치 :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마을처녀들
제작년도 : 185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4×66cm
소장위치 : 시티 아트갤러리
작품설명 : 쿠르베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유럽은 대부분 농촌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문맹자였고 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쿠르베는 이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사회성 있는 발언을 시도하려고 했다. 도시에서 온 세 여인들이 소를 돌보고 있는 시골 소녀들에게 자선금을 주고 있는 장면이다.
작품명 : 프랑크포르트 부인
제작년도 : 185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04×140cm
소장위치 : 쾰른 리짜르츠 박물관
작품설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