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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람이 불어. (요6 : 16 ~ 21)
일생동안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바람들이 불어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심하게 불고 있는 정치바람은 물론이고, 학교 주변에서 불고 있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술집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이성의 바람, 한국에서 한참 유행하고 있는 명퇴라는 이름 밑에 행해지는 감원바람,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십대들의 마약의 바람 등, 정말 헤아릴 수 없는 바람들이 불어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큰 바람이 우리들에게 물어올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적가운데서 7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의 말씀은 그 다섯 번째 기적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오병이어의 기적과 오늘의 기적은 서로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것처럼 이번에는 신약의 모세인 예수님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해서 홍해바다를 건너게 한 것처럼 오늘의 본문에서는 신약의 모세인 예수님을 통해서 바다를 잔잔케 해주셨다는 것을 서로 짝을 이루게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 되심을 증명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신 사건을 통해서 공간을 초월하여 바다까지 지배하시는 주님의 신적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내용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 길이가 4-6마일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호수입니다. 주변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가 지면 공기가 식어지면서 좁은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찬바람이 예상치 않은 스쿠얼이라는 돌풍으로 변하는 바람에 큰 풍랑이 일곤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정말 한폭의 그림처럼 정말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저도 그 곳에 몇 번 가보았지만 기억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왜 주님이 바로 이 시점에서 그의 왕적인 권능을 보여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15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주님만 모시면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그의 권능으로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실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쫓아다닌 목적을 이루게 되었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그 작은 유대의 왕은 거절하여 피하였지만 사실은 그가 바다도 지배하는 분, 즉 만물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어 그들의 안목을 넓혀주고, 큰 그릇들로 만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왜 제자들이 두려워하였는가?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는 큰 바람이 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는 이 두려움의 바람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를 서로 연결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제자들이 두려워한 이유들
(1)[어두움]에 처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어두우면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보일 때에는 인간의 감정은 더욱 긴장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이유도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다가올는지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어두움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집 뒤에 있는 뒷간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던 마을에는 전기불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솔나무에 불을 붙여서 겨우 밤에 뒷간을 갔습니다.
한번은 충주서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주말에 수안보에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밤늦게 도착을 하였는데 거기서 2키로는 가야 저의 집입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칠 흙 같은 밤이었습니다.
혼자서 서낭당을 지나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건너간 그 무서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 저만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어두움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도 어두움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2)[유령인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이유의 하나는 유령은 어둠속에서 흔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인줄로 착각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시점이 유월절 때였기 때문에 보름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구름이 많이 낀 날이었기 때문에 희미하게만 보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면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희미하게 보일 때에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셋째는 파도소리 속에서 들여오는 주님의 음성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떠날 때에는 아직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마가복음 6:45절에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 자녀들이 컴컴한 집에 있을 때에는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광야에서 혹은 파도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는 항해는 마치 선장 없는 배의 항해 같아서 그 자체가 바로 위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다에도 지도가 있습니다. 어디에 가면 조류가 험하게 흐르고 있고, 어디에 가면 암석이 많아서 배가 파선될 수 있고, 어디에 가면 상어 떼가 많고, 등등. 그런데 이런 것은 경험이 많고 바다에 대한 지식이 많은, 오직 선장만이 그런 것을 환하게 압니다.
그래서 선장 없이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은 바로 파선의 위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선장이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4)[폭풍을 만났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이 떠날 때에는 바람이 잔잔하였습니다. 순풍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번 항해는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믿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4마일정도는 캄캄하기 전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연되면서 사방은 캄캄해집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문득 두려움이 다가온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큰 풍랑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워낙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수영도 할 줄 모르고 물을 보면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총신교수로 있을 때 해금강가에서 세미나를 가진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배를 타고 바다구경을 떠났습니다. 배사공이 스무 살 정도의 젊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떠날 때부터 ‘제가 배를 제대로 저어서 섬을 돌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이 생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삼십분쯤 되니까 바람이 불기시작하면서 파도가 치니까 그 작은 배가 흔들리고 심지어 물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떤 교수가 시작했는지 누가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하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얼굴에는 평안이나 기쁨이 아니라 다들 사색입니다.
그런데 그 사공 한 사람만이 태연합니다. 그래서 저는 배의 난간을 손에서 땀이 나도록 꼭 잡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계속 왔습니다.
아마 제자들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물론 어부출신들이니까 좀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당시 해외 무역은 페니키아 사람들이 전담을 하였던 것입니다.
(5)[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연습도 없고, 반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너 죽어 하고 소리치면 울다가도 뚝 그칩니다.
2.왜 큰 바람을 불게 하셨는가?
(1)훈련의 필요성
오병이어의 기적이 대중을 상대로 한 기적이라면 바다 위를 걸으신 오늘의 기적은 제자들의 훈련용이란 점이 특색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3년씩이나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것도 개인적인 훈련을 중심으로 시켰습니다.
텔레비젼을 보면 운동선수들이 영웅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수들을 보면 그냥 금방 된 것이 아닙니다. 오랜 동안의 훈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는 웨스트포인트라는 세계적인 육군사관학교가 있습니다만 한국에도 여러 사관학교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육군 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에서 2년 동안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얼마나 심한지 중간에 퇴교당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장교를 키우려면 이런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용할 그릇으로 만들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당하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이 바로 이런 훈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믿음은 그냥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실 속의 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한 번 바람이 불면 금방 넘어지고 맙니다. 엘에이의 나무들은 바람에 약합니다. 왜냐하면 수돗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본래 키에 비례해서 뿌리가 자라야 합니다.
대개 산에 심겨진 나무들은 물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물을 찾아 뿌리들이 길게 뻗어갑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어도 잘 견딥니다. 그러나 엘에이에서는 스프링클러를 통해서 물을 공급받기 때문에 뿌리가 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 한 번 지나가면 쓰러지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자 좋게 태어나 팔자 좋게 살던 사람들은 6.25같은 큰 일이 일어나니까 다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잡초같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어려운 역경에서 쓰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이나 고난을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크고 깨끗한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은장색들을 보면 여러 번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도 정말 귀한 그릇이 되려면 고난과 역경의 용광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물론 때로는 죄 때문에 죄를 회개할 기회로 주시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처럼 큰 인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수많은 역경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3.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1)주님이 오셔서 “내니”라고 했을 때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내니’란 말은 [에이미],[I AM]즉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에 하신 말씀과 꼭 같은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역경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을 없을 것입니다.
(2)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였을 때에 파도는 잔잔해졌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살아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배안에 선장되신 예수님을 영접만하면 우리의 배는 항구로 갈 수 있습니다. 파도를 잔잔케 할 수 있습니다.
(3)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겨졌을 때에 두려움은 살아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은 인간의 무능력과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하기를 “가보니 그들은 거인들이요 성은 높고, 비교해보니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 합니다” 하고 두려워한 것은 사실은 불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 홍해바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했던 것도 사실은 불신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두려움은 안개처럼 살아집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권능을 믿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는 주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을 통해서 주님은 초자연적 권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야이심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신 후에도 산위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계셨다는 것, 그러나 단순히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실 때에 오셔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심지어 항구까지 인도해주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 광야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며 큰 풍랑 속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의심할 수 있을 수 있어도 주님의 사랑만이는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고 오늘도 날마다의 삶속에서 두려움 없이 성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