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마14:22-33)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급작스런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이다.(24) 이들은 밤새 육신적으로 지친 상태였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잡혀있었으며 절망적 상태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호수 한 복판에 홀연히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반갑기보다 26절을 통해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 소리질렀다고 한다. 베드로도 물위로 걸어갔지만 믿음이 적어 의심함으로 물에 빠졌다.(31)
태풍은 누구에게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그럴 때에 낙심하지 마라. 믿는 자에게는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시기를 바란다.

왜 베드로는 바다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는가?
(1)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의심이 생기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감사와 기쁨이 없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충동적인 믿음은 있었다. 모험적인 도전적인 믿음은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뛰어들려고 하는 경쟁적인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믿음은 부족하였다.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의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
참믿음은 풍랑 속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위기 때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는 말이 있다.
경제적인 위기, 가정적인 위기, 국가적 위기, 이런 위기가 전화위복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 바란다. 풍랑 속에서 믿음을 가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골리앗 앞에서의 다윗의 믿음을 가지자!
    
(2) 바람을 보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말의 의미는 “왜 두 마음을 가졌느냐?”라는 뜻이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예수님과 바람, 예수님과 현실 생활, 예수님과 세상 정욕. 예수님과 고난 등 ‘예수님과’라는 말의 ‘과(and)’가 우리 생활에 있기 때문에 실패한다.”
예수님이면 예수님이지, 왜 ‘예수님과 바람’ ‘예수님과 현실생활’ 등 ‘과’를 붙이는가!.
하나님이면 하나님, 세상이면 세상,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택해야지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인 가운데 ‘동가식서가숙 신앙인’이 있다. 세상과 교회에 양 다리를 걸치고 힘들면 교회를 찾고, 일이 잘 되면 세상에 탐닉하는 사람이다. 왜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고 말았는가?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그만 실족하고 만다.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을 때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다.
성전건축,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주님만 바라본다. 주님만 바라보고 담대히 나아가야한다.

어떻게 베드로가 풍랑을 극복하였는가?
첫째,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았다.
둘째, 베드로는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손을 잡았다.
누가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가? 오직 예수님의 손뿐이다.
능력의 손, 치유의 손, 사랑의 손을 붙들자!

맺는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탓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났다. 뜻하지 않은 풍랑을 만날 때 너무 놀라지 마시기 바란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으면서도 풍랑을 만났을 때 벌벌 떨고 있었다. 우리도 수많은 축복과 이적을 체험하였으면서도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금방 두려워한다.  
이번에 성전 건축을 위한 새 땅을 보여 주실 때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비젼 임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세상을 보지 않고 환경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아야한다. 뒤돌아보지 않아야한다.
오늘 불같은 어려운 역경에 처해있는 분 계시는가? 지금까지 함께 하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란다.


출처/이상민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