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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믿음(1) (시27:1-6)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날’이라는 국경일이 있습니다. 원래는 미국의 초대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을 기념하여 지켰는데, 1970년 후반부터 하원은 모든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날이 되면 역대대통령을 평가하는 설문조사를 합니다. 금년에도 갤럽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가장 낮은 지지율을 얻은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입니다. 조지 부시 현직 대통령도 2% 지지율로 최악의 그룹에 포함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최고로 평가하는 조지 워싱턴도 7%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역대대통령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대통령은 링컨, 레이건, 케네디, 클린턴, 그리고 루즈벨트 순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링컨은 갤럽이 실시한 7회의 조사에서 5회나 지지율 1위에 올랐고, 민주, 공화 양당 당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에이브러함 링컨은 역사상 국민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대통령입니다. 그야말로 ‘대통령가운데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에 대한 업적과 뛰어난 리더십을 본받기 위해 연구하고,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구일까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다윗을 꼽습니다. 다윗은 왕 중의 왕이고, 믿음의 사람가운데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당대에 살던 사람도 후대사람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를 아는 사람도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도,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다윗을 언급합니다. 하나님도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오늘은 사사에 이어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다윗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고, 믿음의 많은 기록이 있기에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을 피하여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먼저 그의 믿음을 찾고자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이기에 믿음의 사람 중에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첫째, 성전을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27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시인들이 믿음과 신앙을 기도와 시로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150편으로 되어 있는 시편가운데 가장 많은 시편을 기록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27편은 다윗이 지은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 시편에서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요,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살았습니다. 그 전의 아름다움을 앙망했고, 그 전을 날마다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참으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 대표적인 증거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의 활성화가 다윗 시대에 와서 꽃을 피우게 한 것입니다. 다윗 이전에는 사람들이 잘 성전을 찾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초대 왕이던 사울까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장 삶의 우선 순위로 삼게 했습니다. 모든 절기 때마다 백성들을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이면 제사와 축제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 비로소 성가대가 조직이 되었고, 다윗은 모든 악기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곳인지를 알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 두 번째 증거는 그가 왕으로 있는 기간동안 가장 큰 업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성전건축을 가장 소중한 업적으로 계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라가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열어갈 때 하나님께 성전건축에 대한 열망과 꿈을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원하던 성전건축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 시대에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한 이유는 물론 자기의 유익을 구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피를 많이 흘린 이유로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다윗의 다음 세대인 솔로몬의 시대에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과 기도의 응답을 겸허하게 받아드렸고, 그 이후부터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잘 준비했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영예를 얻었지만, 모든 준비는 다윗 시대에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장소와 설계와 재료와 인부까지도 모두 준비하였고, 다윗은 성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성전을 사랑했는지 시편 84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성도여러분,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내 삶의 가장 우선 순위를 무엇보다도 교회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앞서간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성전과 교회를 사랑했고, 그래서 당대와 후대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 1세기 살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당시 교회에 가는 것은 핍박과 고난이 따라오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선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좀더 교회로 가까이 가기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날마다 교회의 주변을 돌면서 한 순간도 교회가 머리와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 신앙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모두 교회를 사랑한 결과요, 축복입니다.
우리의 성전, 우리의 교회를 사랑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날마다 성전을 사모하며 공적인 모임은 물론, 교회를 늘 지나다니며 사는 것이 참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앞서간 선진들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를 즐기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 6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또한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즐겨했던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제사, 예배를 즐겼던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어떻게 성전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며, 교회를 사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지 않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결코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즐겁게 드린 것이 예배를 잘 드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토미 테니’라는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저술가가 지은 책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예배에 대한 성경을 말씀을 연구하다가 이 책을 저술했는데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에 보면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아주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구약에 나타난 성막, 성전을 복원하기 원한다면 다윗의 성막을 재건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 다윗의 장막일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성막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이 있고, 솔로몬의 성전이 있고, 그리고 다윗의 장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장막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은 가장 처음에 세워진 것입니다. 전통과 뿌리에 있어서 이것만큼 의미 있는 장막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선택했더라면 가장 화려한 외형을 자랑하는 솔로몬의 성전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만큼 아름답고 멋진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지목하여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성막으로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의 장막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즐기는 예배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의 두 기둥은 놋으로 만들어졌지만 다윗의 장막의 있는 기둥들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모범과 마음을 따라갈 예배자들, 사람들을 살아있는 돌들로 사용하기 원하셨다”
구약시대부터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의미는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의 중요한 기능, 속성, 특성,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신앙행위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됩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고, 또한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배는 사람을 좋게 하거나, 높이거나,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도 유일하게 지속됩니다. 여기서 전도하지만 거기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봉사하지만 거기서는 하지 않고, 여기서 기도하지만 거기서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남는 것은 예배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격과 환희와 우리를 놀라게 하여 항상 입이 벌어지게 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즐거워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할 때 신앙의 욕구가 나와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할 한 청년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할 때 저희 교회를 어렵게 찾아온 청년입니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던 자매인데, 제가 목회 하는 지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다가 저희와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 자매와 처음 전화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목사님, 예배가 고파요..’
여러분,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는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가 즐거워야 합니다. 다윗처럼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서, 거기서 계속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형식을 떠나야 합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예배가 짐이 아닌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제사와 예배를 즐겁게 드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삶의 현장이 있는 믿음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성전을 사모하고, 제사를 즐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더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고백이 나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대적, 어떤 원수가 진을 친다하여도 마음이 두렵지 않고, 심지어는 전쟁이 치려 하여도 요동치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삶의 현장과 내용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사울의 추적을 피한 경험이 있은 뒤에 지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다윗의 생애에 사울이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사울은 마치 원수처럼 다윗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사울은 마치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집요하게 다윗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낼 때 다윗은 많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자기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사울의 시기로 인해 받는 어려움이었기에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는 여기서 고백하는 것처럼 누구도 무섭지 않았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를 둘러 진을 치며 덤벼 든다할지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이런 다윗의 믿음은 앞서서 언급한 2가지의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하늘을 향해 기도만 하지 않았고, 제사만 즐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힘을 얻고, 영적인 충전을 하고, 이제 삶의 현장에서 그를 공격하는 모든 무리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며 살았고, 행동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고백으로 이 시편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믿음을 잘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믿음은 성전 안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성전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자기 생각에서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말로서 찬송과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행함으로, 뭔가 움직이면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인정받은 놀라운 믿음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바로 여기까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는 너무도 거룩해 보입니다. 안에서는 마치 하늘을 다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안에서는 예수님을 닮은 성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밖으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말로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있는데,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 입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손을 들며 찬양한 그 손으로 나쁜 짓하고, 발을 구르며 은혜 받은 그 모습으로, 가서는 안될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행동도 행함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가 회복할 신앙의 바른 모습은 삶의 현장과 내용입니다. 다윗처럼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필요하고, 예배를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의지를 확고히 세워 주님을 믿는 삶이 내용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합니다.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믿음은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안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뻔한 곳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요, 특성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삶의 내용이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성전기공예배를 드리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 날에 다윗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를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안에서 받은 영적인 힘과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한 주간도 힘있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날’이라는 국경일이 있습니다. 원래는 미국의 초대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을 기념하여 지켰는데, 1970년 후반부터 하원은 모든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날이 되면 역대대통령을 평가하는 설문조사를 합니다. 금년에도 갤럽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가장 낮은 지지율을 얻은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입니다. 조지 부시 현직 대통령도 2% 지지율로 최악의 그룹에 포함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최고로 평가하는 조지 워싱턴도 7%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역대대통령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대통령은 링컨, 레이건, 케네디, 클린턴, 그리고 루즈벨트 순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링컨은 갤럽이 실시한 7회의 조사에서 5회나 지지율 1위에 올랐고, 민주, 공화 양당 당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에이브러함 링컨은 역사상 국민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대통령입니다. 그야말로 ‘대통령가운데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에 대한 업적과 뛰어난 리더십을 본받기 위해 연구하고,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구일까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다윗을 꼽습니다. 다윗은 왕 중의 왕이고, 믿음의 사람가운데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당대에 살던 사람도 후대사람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를 아는 사람도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도,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다윗을 언급합니다. 하나님도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오늘은 사사에 이어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다윗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고, 믿음의 많은 기록이 있기에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을 피하여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먼저 그의 믿음을 찾고자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이기에 믿음의 사람 중에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첫째, 성전을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27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시인들이 믿음과 신앙을 기도와 시로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150편으로 되어 있는 시편가운데 가장 많은 시편을 기록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27편은 다윗이 지은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 시편에서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요,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살았습니다. 그 전의 아름다움을 앙망했고, 그 전을 날마다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참으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 대표적인 증거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의 활성화가 다윗 시대에 와서 꽃을 피우게 한 것입니다. 다윗 이전에는 사람들이 잘 성전을 찾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초대 왕이던 사울까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장 삶의 우선 순위로 삼게 했습니다. 모든 절기 때마다 백성들을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모이면 제사와 축제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 비로소 성가대가 조직이 되었고, 다윗은 모든 악기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곳인지를 알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 두 번째 증거는 그가 왕으로 있는 기간동안 가장 큰 업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성전건축을 가장 소중한 업적으로 계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라가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열어갈 때 하나님께 성전건축에 대한 열망과 꿈을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원하던 성전건축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 시대에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한 이유는 물론 자기의 유익을 구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피를 많이 흘린 이유로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다윗의 다음 세대인 솔로몬의 시대에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과 기도의 응답을 겸허하게 받아드렸고, 그 이후부터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잘 준비했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영예를 얻었지만, 모든 준비는 다윗 시대에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장소와 설계와 재료와 인부까지도 모두 준비하였고, 다윗은 성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성전을 사랑했는지 시편 84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성도여러분,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사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내 삶의 가장 우선 순위를 무엇보다도 교회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앞서간 모든 성도들은 그렇게 성전과 교회를 사랑했고, 그래서 당대와 후대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 1세기 살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당시 교회에 가는 것은 핍박과 고난이 따라오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선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좀더 교회로 가까이 가기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날마다 교회의 주변을 돌면서 한 순간도 교회가 머리와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 신앙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모두 교회를 사랑한 결과요, 축복입니다.
우리의 성전, 우리의 교회를 사랑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날마다 성전을 사모하며 공적인 모임은 물론, 교회를 늘 지나다니며 사는 것이 참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앞서간 선진들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를 즐기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 6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또한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즐겨했던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제사, 예배를 즐겼던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즐겁지 않으면 어떻게 성전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며, 교회를 사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지 않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결코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즐겁게 드린 것이 예배를 잘 드리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토미 테니’라는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저술가가 지은 책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예배에 대한 성경을 말씀을 연구하다가 이 책을 저술했는데 깊은 감동을 줍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에 보면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아주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구약에 나타난 성막, 성전을 복원하기 원한다면 다윗의 성막을 재건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 다윗의 장막일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성막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이 있고, 솔로몬의 성전이 있고, 그리고 다윗의 장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장막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은 가장 처음에 세워진 것입니다. 전통과 뿌리에 있어서 이것만큼 의미 있는 장막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선택했더라면 가장 화려한 외형을 자랑하는 솔로몬의 성전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만큼 아름답고 멋진 성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지목하여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성막으로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의 장막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즐기는 예배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의 두 기둥은 놋으로 만들어졌지만 다윗의 장막의 있는 기둥들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모범과 마음을 따라갈 예배자들, 사람들을 살아있는 돌들로 사용하기 원하셨다”
구약시대부터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의미는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의 중요한 기능, 속성, 특성,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신앙행위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됩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고, 또한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배는 사람을 좋게 하거나, 높이거나,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도 유일하게 지속됩니다. 여기서 전도하지만 거기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봉사하지만 거기서는 하지 않고, 여기서 기도하지만 거기서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남는 것은 예배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격과 환희와 우리를 놀라게 하여 항상 입이 벌어지게 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즐거워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할 때 신앙의 욕구가 나와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할 한 청년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할 때 저희 교회를 어렵게 찾아온 청년입니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던 자매인데, 제가 목회 하는 지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다가 저희와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 자매와 처음 전화통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목사님, 예배가 고파요..’
여러분,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는 예배가 고파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가 즐거워야 합니다. 다윗처럼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서, 거기서 계속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형식을 떠나야 합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예배가 짐이 아닌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제사와 예배를 즐겁게 드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삶의 현장이 있는 믿음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성전을 사모하고, 제사를 즐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더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고백이 나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대적, 어떤 원수가 진을 친다하여도 마음이 두렵지 않고, 심지어는 전쟁이 치려 하여도 요동치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삶의 현장과 내용이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사울의 추적을 피한 경험이 있은 뒤에 지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다윗의 생애에 사울이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사울은 마치 원수처럼 다윗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사울은 마치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집요하게 다윗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낼 때 다윗은 많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자기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사울의 시기로 인해 받는 어려움이었기에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는 여기서 고백하는 것처럼 누구도 무섭지 않았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를 둘러 진을 치며 덤벼 든다할지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이런 다윗의 믿음은 앞서서 언급한 2가지의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하늘을 향해 기도만 하지 않았고, 제사만 즐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힘을 얻고, 영적인 충전을 하고, 이제 삶의 현장에서 그를 공격하는 모든 무리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며 살았고, 행동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고백으로 이 시편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믿음을 잘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믿음은 성전 안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성전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자기 생각에서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말로서 찬송과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행함으로, 뭔가 움직이면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인정받은 놀라운 믿음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바로 여기까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는 너무도 거룩해 보입니다. 안에서는 마치 하늘을 다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안에서는 예수님을 닮은 성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밖으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말로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있는데,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 입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손을 들며 찬양한 그 손으로 나쁜 짓하고, 발을 구르며 은혜 받은 그 모습으로, 가서는 안될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행동도 행함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가 회복할 신앙의 바른 모습은 삶의 현장과 내용입니다. 다윗처럼 성전을 사모하는 것이 필요하고, 예배를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의지를 확고히 세워 주님을 믿는 삶이 내용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합니다.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믿음은 빛을 발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안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뻔한 곳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요, 특성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삶의 내용이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성전기공예배를 드리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 날에 다윗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를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안에서 받은 영적인 힘과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한 주간도 힘있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