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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얻는 구원 (마9:18-26)
오늘 본문은 본문이 전하는 일이 있기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이적기사 중 그 절정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어린 소녀 하나를 살려 일으키신 일입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그저 "한 관리"라고 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즉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셔서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이 사람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의 집에는 상가에 불려와 피리를 불거나 곡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시끌벅적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두 사람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사람의 곡하는 사람을 부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체 높은 회당장의 집이었으니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를 많이 불러왔을 것이고 문상객도 많았을 터이니 집안이 얼마나 떠들썩했을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물러가라"(24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집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왜 "물러가라"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죽음을 무효화하시고 그 소녀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 죽음의 상황이 사라지고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가 필요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 부는 자들과 곡하는 자들에게 "물러가라" 하시며 이어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죽은 소녀를 가리켜 잔다고 하셨겠습니까? 정말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는 것과 죽은 것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들이었겠습니까? 만일 그 소녀가 정말 자고 있었던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소녀는 분명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다가 깨는 것처럼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 소녀가 "잔다"고 표현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 소녀이지만 자는 아이 깨우듯이 일으켜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그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소녀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집을 향해 가고 계실 때 다른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이 걸치신 겉옷 가를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는 즉시 그녀를 구원해주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권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이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계십니다. 병도 바람도 파도도 귀신도 다스리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으로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 혈루병 앓던 여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3-44) 의사였던 누가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불치환자로 판정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불치병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예수님에게서는 얼마든지 가능함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2) 했습니다. 그 자신만 부정할 뿐 아니라 그가 눕는 침상, 앉았던 자리, 그의 침상이나 앉았던 자리에 접촉하는 자, 그의 몸에 접촉하는 자, 그와 직·간접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입은 옷까지도 다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환자는 일반인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병뿐 아니라 사회적 소외와 이로 인한 온갖 삶의 불편과 외로움까지도 함께 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은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용한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전하듯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한 없이 더 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임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딸아" 하신 것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그녀를 가장 친밀한 관계 속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하신 것은 그녀의 마음의 고통을 아시고 그것을 씻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하였다" 하신 것은 그녀를 단지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매장과 불치의 절망과 영적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의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면 살아나리라고 믿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이고 기회입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는 행위에 딸린 마술적 효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겠지만, 성찬식 자체에 구원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식에 의례적으로 참여하고 떡과 포도주를 기계적으로 받아먹고 마시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 것으로 소유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이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성찬식으로 하여금 은혜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 떡과 포도주를 받는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없는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연극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르고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랍고 한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 본문은 본문이 전하는 일이 있기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이적기사 중 그 절정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어린 소녀 하나를 살려 일으키신 일입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그저 "한 관리"라고 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즉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셔서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이 사람의 간청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의 집에는 상가에 불려와 피리를 불거나 곡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시끌벅적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두 사람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사람의 곡하는 사람을 부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체 높은 회당장의 집이었으니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를 많이 불러왔을 것이고 문상객도 많았을 터이니 집안이 얼마나 떠들썩했을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물러가라"(24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집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왜 "물러가라"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죽음을 무효화하시고 그 소녀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 죽음의 상황이 사라지고 피리 부는 자나 곡하는 자가 필요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 부는 자들과 곡하는 자들에게 "물러가라" 하시며 이어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죽은 소녀를 가리켜 잔다고 하셨겠습니까? 정말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는 것과 죽은 것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들이었겠습니까? 만일 그 소녀가 정말 자고 있었던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소녀는 분명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다가 깨는 것처럼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 소녀가 "잔다"고 표현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 소녀이지만 자는 아이 깨우듯이 일으켜 살리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그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소녀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집을 향해 가고 계실 때 다른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이 걸치신 겉옷 가를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는 즉시 그녀를 구원해주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권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이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계십니다. 병도 바람도 파도도 귀신도 다스리시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와서는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으로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복음에 보면 그 혈루병 앓던 여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3-44) 의사였던 누가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인은 불치환자로 판정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불치병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예수님에게서는 얼마든지 가능함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2) 했습니다. 그 자신만 부정할 뿐 아니라 그가 눕는 침상, 앉았던 자리, 그의 침상이나 앉았던 자리에 접촉하는 자, 그의 몸에 접촉하는 자, 그와 직·간접으로 접촉한 사람들이 입은 옷까지도 다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환자는 일반인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병뿐 아니라 사회적 소외와 이로 인한 온갖 삶의 불편과 외로움까지도 함께 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은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용한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전하듯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한 없이 더 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임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딸아" 하신 것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그녀를 가장 친밀한 관계 속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하신 것은 그녀의 마음의 고통을 아시고 그것을 씻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하였다" 하신 것은 그녀를 단지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매장과 불치의 절망과 영적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의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죽었던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기만 하면 살아나리라고 믿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통로이고 기회입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는 행위에 딸린 마술적 효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겠지만, 성찬식 자체에 구원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식에 의례적으로 참여하고 떡과 포도주를 기계적으로 받아먹고 마시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 것으로 소유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이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는 그 믿음의 고백이 성찬식으로 하여금 은혜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 떡과 포도주를 받는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없는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연극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르고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랍고 한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