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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네게 요구하시는 믿음 (신 10: 12-22)
오늘은 신명기 10장 12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 상반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그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가 활동하던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바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공의를 행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할 때 사랑만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이어 받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은혜와 똑 같은 말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높은 분이 아랫사람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줄 때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베풀 때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내게 있는 것 가지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까닭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미가 시대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위와 같이 세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행동하는 믿음 (12-13)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끝마다 '주여 주여' 하는데 뒤에 보니 행동은 하나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전부 천국에 갈 줄 아느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이 말로만 다 믿어 버리는 믿음은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도 쓸데가 없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에서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네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신하가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왕처럼 생각하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경외하며 섬기는 일을 말로만 끝내는 것입니까? 말을 아무리 잘 해도 행동이 없으면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행동하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며'라는 뜻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말로만 하는 것입니까? 살전 1장 3절에 보면 사랑의 수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할 때 반드시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손해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데 밑천이 듭니까? 반드시 믿음도 행동하는 믿음, 수고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셋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 하였습니다. 마음, 성품, 나의 전부를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몸 자체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넷째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죽을 고생만 다하고 손해는 손해대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일날 가게문을 닫고 예배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손해만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말씀에서 네 행복을 위하여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 규례, 즉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법을 지켜서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고 나면 나중에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말로만 지키는 것입니까? 실제 행동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이야기하셨지만 사실은 한마디로 우리들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여러분들의 믿음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로마에 헬레나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할 때 숨어서 믿으며 기도를 많이 하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황제 밑에 부제가 4명이나 있었습니다. 황제가 죽고 나자 부제들이 모두 황제가 되겠다고 하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콘스탄틴 부제와 막센티우스라고 하는 부제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막센티우스가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워낙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싸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인 부제도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한 낯에도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깊이 하는 중에 하늘에서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즉 하늘을 보니 십자가 형체가 있는데 계속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잠자면서 꾸는 꿈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가 싸우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깃발을 만들어 가지고 나아가 싸우는데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기적같이 이기고 승리를 하고 황제로 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로마의 핍박을 당하고 있을 때 뒤에서 숨어서 믿으며 기도를 많이 하던 헬레나라고 하는 여자가 바로 콘스탄틴의 어머니입니다. 기도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콘스탄틴이 황제로 등극한 다음에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아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것이 바로 기독교요,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칙령을 내려 당장에 기독교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전부 땅 속으로 들어가 목숨만 겨우 부지하던 사람들이 땅위로 올라왔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황제가 믿으라고 하니까 너도 나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가 완전히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것만 지켜야 합니까? 모르는 것이라도 지키고 나면 전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알든지 모르든지 행동으로 순종하고 나면 행복은 여러분들의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책임지는 믿음 (14-19)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시민이 아닙니까? 그러나 자유에는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말할 자유가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됩니까? 말로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말로 손해를 끼쳐도 됩니까?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라는 것입니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행동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개나 돼지에게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임 질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책임 질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9절을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의 신이요, 주의 주시오, 크고 두려우신 분이요, 사람을 절대로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뇌물을 받는 일이 없는 분이심을 밝히신 다음에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며 즉 사랑하시며 또한 나그네를 사랑하여 의복과 식물을 주시나니 너희가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약자요,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너희가 바로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먹을 것을 받고, 입을 것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남편을 통해서 받고 이웃을 통해서 받는 것 아닙니까? 내가 너에게 준다고 해서 내가 네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줄 것을 나에게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너희가 그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책임 질 사람에게는 책임지는 사람, 책임 질 일에는 책임지는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신 프로히드파에 에릭 프롬(Erich Fromm)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줍니까? 그것을 짜증내고 싫어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옆에서 누구가 죽어 나가도 절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할 때는 관심이 많은 법입니다. 가량 머리 스타일을 고치면 당장 알아서 "당신 멋있는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돌아와서 남편의 코밑에 머리를 갖다 댈지라도 비키라고 야단합니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줄을 모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이해를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어도 이해를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집 아들을 죽일 놈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같이 덩달아서 죽일 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이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를 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존중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인격을 존중하고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넷째 주머니를 열어 풀어서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은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책임지고 나선다고 합니다. 사랑을 할 때는 전부 내 탓이요, 내 책임이라고 하면서 책임을 자기가 떠맡고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하 만민의 죄를 떠맡고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사랑하노라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데 너희가 사랑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지고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웃에 대한 책임, 책임 질 일은 항상 떠맡고 나서는 책임지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셋째, 불가분의 믿음 (20-22)
'불가분'이라고 하는 것은 '떨어지면 안되는 것' '죽어도 떨어지면 안 되는 것' '둘이 달라붙어서 하나처럼 얽혀 있는 것'을 불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전혀 모르는 남자, 모르는 여자가 사귀더니 찰싹 달라붙어 죽어도 헤어지지 못하겠다 해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결혼하라 하여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이혼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혼 할 것부터 먼저 생각하지 마시기를 랍니다. 요즘은 3쌍이 결혼을 하면 1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혼은 내가 한 것이지 즉 사람이 한 것이지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까닭에 성경은 결혼 한 사람이 자기들에 좋아서 이혼을 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까닭에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면 간음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간음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공부할 때 어느 수요일 저녁에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부부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존재이기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을 모아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불가분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에서 2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경외하여 섬기며'라고 하였습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신하가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신하와 왕은 하나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신하가 왕에게서 떠나면 이미 신하가 아닌 것입니다. 군신 관계는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왕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군신관계라고 합니다.
둘째 '친근히 하고'라 하였습니다. '친근히'라는 말은 '결혼하고'라 해도 됩니다. 모르는 두 남녀가 하나가 되어 떨어지면 죽는다고 함께 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머니 태중에서 알아 가지고 태어났습니까? 본래 몰랐는데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믿은 다음에는 '나는 하나님 없이는 못살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혼인 관계 즉 부부 관계처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셋째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성경은 히브리 사람들이 기록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맹세할 때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 이상 높은 분이 없기에 그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상천하에서 최고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왜 높으냐하면 하나님은 조물주요, 천하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가 하나님 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높은 분이십니다. 그 이하의 모든 사람을 비롯해서 세상 모든 것은 그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입니다. 즉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에게서 떨어지면 그 시간에 이미 죽은 것입니다.
강대상 앞에 꽃꽂이가 되어 있지만 저 꽃은 뿌리에서 잘릴 때 벌써 죽은 것입니다. 말라지는 것만 남은 것뿐입니다. 생명의 근본이요,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날, 끊어지는 날 그 순간 이미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 가지 뜻을 세 번에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믿는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William Tyndale이라고 하는 사람은 영국사람으로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하기 전 1535년에 이 사람이 영국 법정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산사람을 고스란히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는 화형에 처하는 사형언도를 내리기 직전에 재판장이 "이제라도 내가 잘 못했오 라고 한마디만 하면 깨끗이 사형 언도를 내리지 않겠으니 그 한마디만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카톨릭에는 우리처럼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 카톨릭에서는 라틴말을 거룩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신부들이 라틴말로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강연이라고 해서 몇 마디하고 미사가 끝났습니다. 그 때 천주교인들은 성경을 가지지도 못하고 성경에 대해서는 일자 무식한 상태에서 믿었습니다. 요즘에는 성경을 번역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67년 전이 아닙니까? 그 때 윌리암 틴데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라틴말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고 망할 짓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 번역이 죽고 망할 짓입니까? 결국 윌리암 틴데일이 취소를 하지 않으므로 사형 언도를 내린 다음에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역사에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 밭을 가는 어린 소년이 재판장인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취소를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밀착된 믿음, 하나님과 완전히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믿음입니다. '죽어도 믿는다,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교자적인 믿음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불가분의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말로 다 믿어 버리는 믿음은 원치 않으십니다. '주여 주여'라는 말은 하면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행동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둘째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아담의 믿음, 심지어 그런 아담 자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나님은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셋째 불가분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에는 찾고 필요 없으면 나 몰라라 하는 믿음은 의미가 없고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순교자적인 믿음이 곧 불가분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신명기 10장 12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 상반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그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가 활동하던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바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공의를 행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할 때 사랑만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이어 받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은혜와 똑 같은 말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높은 분이 아랫사람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줄 때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베풀 때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내게 있는 것 가지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까닭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미가 시대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위와 같이 세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행동하는 믿음 (12-13)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끝마다 '주여 주여' 하는데 뒤에 보니 행동은 하나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전부 천국에 갈 줄 아느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이 말로만 다 믿어 버리는 믿음은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도 쓸데가 없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에서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네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신하가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왕처럼 생각하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경외하며 섬기는 일을 말로만 끝내는 것입니까? 말을 아무리 잘 해도 행동이 없으면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행동하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며'라는 뜻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말로만 하는 것입니까? 살전 1장 3절에 보면 사랑의 수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할 때 반드시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손해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데 밑천이 듭니까? 반드시 믿음도 행동하는 믿음, 수고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셋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 하였습니다. 마음, 성품, 나의 전부를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몸 자체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넷째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죽을 고생만 다하고 손해는 손해대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일날 가게문을 닫고 예배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손해만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말씀에서 네 행복을 위하여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 규례, 즉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법을 지켜서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고 나면 나중에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말로만 지키는 것입니까? 실제 행동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이야기하셨지만 사실은 한마디로 우리들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여러분들의 믿음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로마에 헬레나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할 때 숨어서 믿으며 기도를 많이 하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황제 밑에 부제가 4명이나 있었습니다. 황제가 죽고 나자 부제들이 모두 황제가 되겠다고 하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콘스탄틴 부제와 막센티우스라고 하는 부제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막센티우스가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워낙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싸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인 부제도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한 낯에도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깊이 하는 중에 하늘에서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즉 하늘을 보니 십자가 형체가 있는데 계속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잠자면서 꾸는 꿈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깃발을 만들어 나가 싸우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깃발을 만들어 가지고 나아가 싸우는데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기적같이 이기고 승리를 하고 황제로 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로마의 핍박을 당하고 있을 때 뒤에서 숨어서 믿으며 기도를 많이 하던 헬레나라고 하는 여자가 바로 콘스탄틴의 어머니입니다. 기도가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콘스탄틴이 황제로 등극한 다음에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아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것이 바로 기독교요,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칙령을 내려 당장에 기독교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전부 땅 속으로 들어가 목숨만 겨우 부지하던 사람들이 땅위로 올라왔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황제가 믿으라고 하니까 너도 나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가 완전히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것만 지켜야 합니까? 모르는 것이라도 지키고 나면 전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알든지 모르든지 행동으로 순종하고 나면 행복은 여러분들의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책임지는 믿음 (14-19)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시민이 아닙니까? 그러나 자유에는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말할 자유가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됩니까? 말로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말로 손해를 끼쳐도 됩니까?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라는 것입니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행동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개나 돼지에게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임 질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책임 질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9절을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의 신이요, 주의 주시오, 크고 두려우신 분이요, 사람을 절대로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뇌물을 받는 일이 없는 분이심을 밝히신 다음에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며 즉 사랑하시며 또한 나그네를 사랑하여 의복과 식물을 주시나니 너희가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약자요,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너희가 바로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먹을 것을 받고, 입을 것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남편을 통해서 받고 이웃을 통해서 받는 것 아닙니까? 내가 너에게 준다고 해서 내가 네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줄 것을 나에게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너희가 그 책임을 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책임 질 사람에게는 책임지는 사람, 책임 질 일에는 책임지는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신 프로히드파에 에릭 프롬(Erich Fromm)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줍니까? 그것을 짜증내고 싫어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옆에서 누구가 죽어 나가도 절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할 때는 관심이 많은 법입니다. 가량 머리 스타일을 고치면 당장 알아서 "당신 멋있는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돌아와서 남편의 코밑에 머리를 갖다 댈지라도 비키라고 야단합니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줄을 모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관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이해를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어도 이해를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집 아들을 죽일 놈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같이 덩달아서 죽일 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기에 이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를 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존중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인격을 존중하고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넷째 주머니를 열어 풀어서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은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책임지고 나선다고 합니다. 사랑을 할 때는 전부 내 탓이요, 내 책임이라고 하면서 책임을 자기가 떠맡고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하 만민의 죄를 떠맡고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사랑하노라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데 너희가 사랑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지고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웃에 대한 책임, 책임 질 일은 항상 떠맡고 나서는 책임지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셋째, 불가분의 믿음 (20-22)
'불가분'이라고 하는 것은 '떨어지면 안되는 것' '죽어도 떨어지면 안 되는 것' '둘이 달라붙어서 하나처럼 얽혀 있는 것'을 불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전혀 모르는 남자, 모르는 여자가 사귀더니 찰싹 달라붙어 죽어도 헤어지지 못하겠다 해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결혼하라 하여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이혼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혼 할 것부터 먼저 생각하지 마시기를 랍니다. 요즘은 3쌍이 결혼을 하면 1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혼은 내가 한 것이지 즉 사람이 한 것이지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까닭에 성경은 결혼 한 사람이 자기들에 좋아서 이혼을 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까닭에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면 간음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간음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공부할 때 어느 수요일 저녁에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부부는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존재이기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을 모아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불가분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에서 2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경외하여 섬기며'라고 하였습니다. 경외라고 하는 말은 신하가 왕에게 쓰는 말입니다. 신하와 왕은 하나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신하가 왕에게서 떠나면 이미 신하가 아닌 것입니다. 군신 관계는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왕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군신관계라고 합니다.
둘째 '친근히 하고'라 하였습니다. '친근히'라는 말은 '결혼하고'라 해도 됩니다. 모르는 두 남녀가 하나가 되어 떨어지면 죽는다고 함께 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머니 태중에서 알아 가지고 태어났습니까? 본래 몰랐는데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믿은 다음에는 '나는 하나님 없이는 못살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혼인 관계 즉 부부 관계처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셋째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성경은 히브리 사람들이 기록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맹세할 때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 이상 높은 분이 없기에 그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상천하에서 최고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왜 높으냐하면 하나님은 조물주요, 천하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모든 존재가 하나님 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높은 분이십니다. 그 이하의 모든 사람을 비롯해서 세상 모든 것은 그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입니다. 즉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에게서 떨어지면 그 시간에 이미 죽은 것입니다.
강대상 앞에 꽃꽂이가 되어 있지만 저 꽃은 뿌리에서 잘릴 때 벌써 죽은 것입니다. 말라지는 것만 남은 것뿐입니다. 생명의 근본이요,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날, 끊어지는 날 그 순간 이미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 가지 뜻을 세 번에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믿는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William Tyndale이라고 하는 사람은 영국사람으로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하기 전 1535년에 이 사람이 영국 법정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산사람을 고스란히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는 화형에 처하는 사형언도를 내리기 직전에 재판장이 "이제라도 내가 잘 못했오 라고 한마디만 하면 깨끗이 사형 언도를 내리지 않겠으니 그 한마디만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카톨릭에는 우리처럼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 카톨릭에서는 라틴말을 거룩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신부들이 라틴말로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강연이라고 해서 몇 마디하고 미사가 끝났습니다. 그 때 천주교인들은 성경을 가지지도 못하고 성경에 대해서는 일자 무식한 상태에서 믿었습니다. 요즘에는 성경을 번역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67년 전이 아닙니까? 그 때 윌리암 틴데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라틴말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고 망할 짓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 번역이 죽고 망할 짓입니까? 결국 윌리암 틴데일이 취소를 하지 않으므로 사형 언도를 내린 다음에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역사에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 밭을 가는 어린 소년이 재판장인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취소를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밀착된 믿음, 하나님과 완전히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믿음입니다. '죽어도 믿는다,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교자적인 믿음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불가분의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말로 다 믿어 버리는 믿음은 원치 않으십니다. '주여 주여'라는 말은 하면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행동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둘째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아담의 믿음, 심지어 그런 아담 자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나님은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책임지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셋째 불가분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에는 찾고 필요 없으면 나 몰라라 하는 믿음은 의미가 없고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순교자적인 믿음이 곧 불가분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