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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스승을 모셔라 (사 30:18-22)
최근의 뉴스를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모두들 한숨입니다. 얼마 전 급식문제로 교사의 가르침에 문제를 삼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가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고 무릎을 꿇린 사건으로 온 국민들이 경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극소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 학생들이 자기 맘에 마땅치 않다고 스승을 존경하지 않거나 대항하고 나아가 학부모들이 지나치게 역성하는 풍조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은 “君師父一體”라 하여 왕과 부모와 스승은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림자조차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려 받아야 할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서 사람에게 대한 첫 계명은 부모공경입니다. 그러니까 불효죄는 살인죄 간음죄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 유대 탈무드 이야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부모와 랍비 중 한 분만 살려야 한다면 어떤 분을 택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마땅히 랍비를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는 자도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랍비는 영적 스승입니다. 그 만큼 그들은 스승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없어도 이사가지만 회당이 없는 곳에는 이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승을 주신다는 약속은 험악한 인생길, 미지의 천국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귀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시는 스승은 어떤 분이실까요?
1. 그 스승은 우리 곁에 와 계신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요14:26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깨달음이 떠오르게 하시거나 혹은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요즘 학부모들이 교육에다 쏟아 붓는 돈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만 그 스승은 성령의 스승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니 이보다 더 귀한 스승이 어디 있을까요? 더구나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요14:16-17). 구약에 이스라엘 성전에서 말씀하신 그 분께서 이제는 우리를 성전 삼고 계셔서 가르치십니다.
2. 그 스승은 우리를 바른 길을 지도하시는 분이십니다.
21절에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생활도 간섭하시지만 가장 주된 지도는 영적인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영적으로 풀면 우리 영혼을 바로 되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 스승이 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예언은 육신의 영달이나 길흉을 묻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셔요. 고전14:3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먼저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해야지 내 육신의 길흉만을 점치는 점쟁이 신앙이 되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육신을 위한 말씀도 주시지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영적인 도움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름답게 해 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이 아무리 궁금하고 다급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 다듬는 일을 더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시든지 성령으로 지도해 주십니다. 먼저 영적으로 바로 되어야 육신의 것도 잘 말씀해 주십니다. 예언은 신령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셔요. 그래서 고전14:3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언은사 받아 10년간 육신의 길흉만을 예언해 주다가 수많은 실수 끝에 그것이 잘못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아주 은사를 버리고 돌아서 반 은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은사의 활용 목적에 무지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은사 받아서 10년간 잘못하더니 이제는 은사 버리고 또 30년간 잘못했으니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성경에는 말씀만 있는 것 아닙니다. 은사도 있습니다. 성경의 부분만 인정하는 말씀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지도를 위해 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육신의 문제도 보너스로 주셔서 영육 간에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보혜사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임하십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투철하게 믿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19절에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이라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시온에 거하는 백성이란 보통 백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항상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를 보면 외적과 맞서 싸울 용기와 목숨 내건 담력을 가진 충성된 사람들만이 예루살렘에 거했습니다. 바로 이런 투철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행2:38)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더욱 충만히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에게 성령의 스승께서는 더욱 분명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2. 사모하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18-19절을 보면 그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나아가 사모하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성령으로 더욱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성령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낮춰야 합니다. 더 회개해야 합니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더 복음에 서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 때 성령으로만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분명히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다가 악령의 지도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세속이 틈타 영적으로 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에서 돼지는 부정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육신에 속한 자일 때 잘못된 지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 심령의 근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3. 세상과 육신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20절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했습니다. 이 구절은 참 선지자 미가야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처럼 참 선지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사양치 않아야 합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연단을 상징하는 듯 하지만 그보다 십자가의 인내를 상징합니다. 편안하고 달콤한 세속의 떡과 물로서는 참 스승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상 22장을 보면 미가야는 거짓선지자 400명을 대항하여 참 예언을 말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아합에게 승리할 것이라고 아부하지만 미가야는 아합이 이번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흉한 예언 때문에 아합의 미움을 사고 옥에 갇혀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됩니다. 미가야는 어떤 일에도 악한 왕에게 아부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생의 떡과 물은 이런 타협치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상 욕망의 모범생이 되지 않고 세상 등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이 숨지 않아요. 그러나 나와 세상 사랑을 추구하면 해가 구름 속에 숨듯 하나님의 음성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좋은 경험을 했는데 어느 교회에 심령이 맑아서 예언 잘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무슨 일로 한 시간 가량 앨범을 보았습니다. 앨범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예언자가 마음 판에 사진의 환상으로 가득채운 후에 예언한다면 어떻게 바른 예언이 가능하겠습니까? 잘못된 예언에는 선입관도 한몫을 합니다. 그러므로 선입관이 각인 되지 않도록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주님은 아셨지만 사람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기에 옷을 만진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잡생각으로 가득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해도 하나님의 생각인지 내 생각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미가야 선지자처럼 하나님만 사랑하는 참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시면서도 항상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험악한 인생길에 영원한 스승 성령님의 지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진실로 회개하며 겸손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 몸 바쳐 경외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지도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최근의 뉴스를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모두들 한숨입니다. 얼마 전 급식문제로 교사의 가르침에 문제를 삼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가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고 무릎을 꿇린 사건으로 온 국민들이 경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극소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 학생들이 자기 맘에 마땅치 않다고 스승을 존경하지 않거나 대항하고 나아가 학부모들이 지나치게 역성하는 풍조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은 “君師父一體”라 하여 왕과 부모와 스승은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그림자조차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려 받아야 할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서 사람에게 대한 첫 계명은 부모공경입니다. 그러니까 불효죄는 살인죄 간음죄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 유대 탈무드 이야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부모와 랍비 중 한 분만 살려야 한다면 어떤 분을 택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마땅히 랍비를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는 자도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랍비는 영적 스승입니다. 그 만큼 그들은 스승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없어도 이사가지만 회당이 없는 곳에는 이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승을 주신다는 약속은 험악한 인생길, 미지의 천국 길을 가는 우리에게 귀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시는 스승은 어떤 분이실까요?
1. 그 스승은 우리 곁에 와 계신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요14:26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깨달음이 떠오르게 하시거나 혹은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요즘 학부모들이 교육에다 쏟아 붓는 돈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만 그 스승은 성령의 스승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니 이보다 더 귀한 스승이 어디 있을까요? 더구나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요14:16-17). 구약에 이스라엘 성전에서 말씀하신 그 분께서 이제는 우리를 성전 삼고 계셔서 가르치십니다.
2. 그 스승은 우리를 바른 길을 지도하시는 분이십니다.
21절에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생활도 간섭하시지만 가장 주된 지도는 영적인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영적으로 풀면 우리 영혼을 바로 되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 스승이 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예언은 육신의 영달이나 길흉을 묻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셔요. 고전14:3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먼저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해야지 내 육신의 길흉만을 점치는 점쟁이 신앙이 되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육신을 위한 말씀도 주시지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영적인 도움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름답게 해 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이 아무리 궁금하고 다급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 다듬는 일을 더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시든지 성령으로 지도해 주십니다. 먼저 영적으로 바로 되어야 육신의 것도 잘 말씀해 주십니다. 예언은 신령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주셔요. 그래서 고전14:3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언은사 받아 10년간 육신의 길흉만을 예언해 주다가 수많은 실수 끝에 그것이 잘못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아주 은사를 버리고 돌아서 반 은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은사의 활용 목적에 무지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은사 받아서 10년간 잘못하더니 이제는 은사 버리고 또 30년간 잘못했으니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성경에는 말씀만 있는 것 아닙니다. 은사도 있습니다. 성경의 부분만 인정하는 말씀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지도를 위해 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육신의 문제도 보너스로 주셔서 영육 간에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보혜사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임하십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투철하게 믿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19절에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이라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시온에 거하는 백성이란 보통 백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항상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를 보면 외적과 맞서 싸울 용기와 목숨 내건 담력을 가진 충성된 사람들만이 예루살렘에 거했습니다. 바로 이런 투철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행2:38)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더욱 충만히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에게 성령의 스승께서는 더욱 분명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2. 사모하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18-19절을 보면 그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나아가 사모하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성령으로 더욱 충만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성령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낮춰야 합니다. 더 회개해야 합니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더 복음에 서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 때 성령으로만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도를 분명히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다가 악령의 지도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세속이 틈타 영적으로 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에서 돼지는 부정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육신에 속한 자일 때 잘못된 지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 심령의 근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3. 세상과 육신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20절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했습니다. 이 구절은 참 선지자 미가야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처럼 참 선지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사양치 않아야 합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연단을 상징하는 듯 하지만 그보다 십자가의 인내를 상징합니다. 편안하고 달콤한 세속의 떡과 물로서는 참 스승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상 22장을 보면 미가야는 거짓선지자 400명을 대항하여 참 예언을 말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아합에게 승리할 것이라고 아부하지만 미가야는 아합이 이번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흉한 예언 때문에 아합의 미움을 사고 옥에 갇혀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됩니다. 미가야는 어떤 일에도 악한 왕에게 아부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생의 떡과 물은 이런 타협치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상 욕망의 모범생이 되지 않고 세상 등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이 숨지 않아요. 그러나 나와 세상 사랑을 추구하면 해가 구름 속에 숨듯 하나님의 음성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좋은 경험을 했는데 어느 교회에 심령이 맑아서 예언 잘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무슨 일로 한 시간 가량 앨범을 보았습니다. 앨범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예언자가 마음 판에 사진의 환상으로 가득채운 후에 예언한다면 어떻게 바른 예언이 가능하겠습니까? 잘못된 예언에는 선입관도 한몫을 합니다. 그러므로 선입관이 각인 되지 않도록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주님은 아셨지만 사람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기에 옷을 만진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잡생각으로 가득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해도 하나님의 생각인지 내 생각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미가야 선지자처럼 하나님만 사랑하는 참 선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시면서도 항상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험악한 인생길에 영원한 스승 성령님의 지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진실로 회개하며 겸손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 몸 바쳐 경외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지도를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