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치료하는 지혜   (창45:1-5)


시인 랭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성이여 계절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상처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심한 무력증에 걸렸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세상과 사람들이 다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진찰을 모두 끝낸 다음 의사가 말 했습니다. "당신은 깊은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이 쓴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가리말디의 코미디 프로를 자주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제가 바로 가리말디올시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웃기는 그 사람,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지금 깊은 우울증세를 앓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이 없듯이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이 상처들로 인하여 아파합니다. 고통스러워 합니다. 괴로움에 몸을 떱니다. 그러나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고통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대나무에는 마디가 있습니다. 대나무에게 있어 이 마디는 상처입니다. 아픔과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마디가 많을수록 대나무는 더 높이 자랍니다. 그리고 마디가 굵을수록 더 튼튼하고 우람합니다.
상처가 많을수록, 고통이 많을수록 우리의 삶과 인생은 더 탄탄해지고 성숙해져갑니다. 따라서 문제는 상처가 아닙니다.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지혜에 대해 알아봅시다.

1.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습니다.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가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로 사랑하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깊은 상처를 줍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정말로 사랑해야 될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괴롭히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서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통계에 의하면 가출 청소년들의 85%가 부모 또는 형제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가출했다고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지난 해 4월 달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스물아홉 살 된 주부가 있었습니다. 2000년도에 세살이었던 딸이 뇌진탕으로 숨지자 그 충격 때문에 마약을 시작했습니다.
엄 씨는 결혼 전에 보험 설계사의 일을 보았습니다. 딸이 죽은 후에 남편의 이름으로 보험 4개를 들었습니다. 계획적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핀으로 눈을 찔러서 실명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남편에게 약을 먹인 뒤 두 차례 흉기로 남편의 배를 찔렀습니다. 남편은 2년 만에 숨졌고 엄씨는 2억 8천 만 원의 보험금을 타냈습니다.

남편이 죽자 4개 월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에게도 전 남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실명시켰습니다. 이 남편 역시 눈을 치료하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에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수면제를 먹이고 양 눈을 찔러서 실명시키고, 자신의 오빠도 실명하게 했습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5억 8천 만 원의 보험금을 타냈습니다.

물론 이 돈을 전부 마약 구입비로 사용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사람들은 애굽의 상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의 형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다른 형제들일지라도 자랄 때는 서로 장난도 치고 놀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지만 노예 상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날로 그는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기대심리 때문입니다. 특히 내가 무엇인가를 베풀고 사랑을 준 대상이 그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면 우리는 무조건 크게 실망합니다.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변해도 나한테 만은 이러면 안 되지’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가까우니까 믿고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기대치가 높은 만큼 인간은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대치가 전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도 이상으로 기대를 해서도 안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하지 못합니다. 아주 실망스런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롬 3:4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거짓되다 고 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기대에 못 미치게 되면 그것이 상처가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가까이에 있는 중요한 가치들을 무시합니다. 멀리 있는 것만 선호합니다. 멀리 있는 것은 다 아름답게 보이고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것은 다 추하고 못나 보입니다. 그래서 무시합니다.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못 봐주고 몸서리치게 미워한 사람이 바로 가인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아벨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치 싫었습니다. 분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비뚤어진 비교의식과 경쟁심리로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바로 형제지간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해 비극적인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특별히 잘 해야 합니다.

2. 말로 인한 상처가 제일로 깊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말입니다. 말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폭력은 상처를 낳습니다.

그런데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심각한 것이 말로 인한 언어폭력입니다. 삼상18장 에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옵니다. 그때 모든 백성들이 다윗을 칭찬하여 '다윗은 만 만 이요 사울은 천 천이라' 하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 상처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다윗을 제거할 결심을 합니다. 백성들의 무심한 말이 사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 일로 인하여 사울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말로 인한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주로 가족들인데 아버지에게서 40.7%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32,1%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무시할 때 그리고 다른 아이와 비교할 때 상처를 입습니다. 이 말로 인한 상처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도 합니다.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1)비난하는 말이 상처를 줍니다.
중상 모략하는 말입니다. 근거 없이 소문을 내어서 상대방의 인격에 모독이 되는 말을 할 때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2) 단순한 추측이나 악의에서 터무니없이 하는 거짓말이 상처를 줍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를 반드시 가져옵니다.

3) 확인 또는 검증도 하지 않은 채 남을 쉽게 판단하는 말이 상처를 줍니다. 사람은 복잡합니다. 내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4) 실행하지 아니하는 무책임한 말이 상처를 줍니다.
5) 습관적 혹은 의도적으로 내 뱉는 저속한 욕설이 상처를 입힙니다.
6)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아니한 말이 상처를 줍니다.
7) 생김새나 옷차림등을 비하하여 조롱하는 말이 상처를 줍니다. 8) 표현이 미숙하여 본의 아니게 남을 속상하게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직 간접으로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 조심을 합시다. 말로인한 상처를 주고 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3.모든 상처는 용서로 치유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으면 독이 되고 치유되면 약이 된다.’ 그렇습니다. 모든 상처는 치유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요셉의 인생은 상처 투성 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요셉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렇고 애굽의 보디발이 그랬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큰마음의 상처를 그에게 입혔습니까?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이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 상처들로 인해 그의 꿈은 다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상처들로 인해 망했습니까? 앓다가 죽어버렸습니까?

복수의 화신이 되어 원수 찾아 삼 만 리를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요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을 완전히 극복하였습니다. 치료받았습니다. 그의 찢어진 상처들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는 용서해 주었습니다. 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면 이 장면일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사실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복수가 더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용서보다 복수를 선택하는 것만 보아도 용서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모든 상처를 치료하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주시는 반면 해결의 방법도 주십니다.

상처는 오직 용서로만 해결되도록 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몇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1).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대가성이 없어야 합니다.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됩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모든 상처를 치유합니다.
3). 진정한 용서는 '내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용서를 빌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4). 용서에는 제한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은 용서하고 또 무엇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가 아니라 '그것까지도 용서해 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용서할 수 없는 남자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과거가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머리카락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머리가 빈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사람도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웅변과 명설교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합니다. 미소를 띤 사랑의 말 한마디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우리는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말했습니다.

"형들이 나를 판 것도 형들의 의사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형들을 통하여 나를 이 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고 나는 많은 시련을 당하고 오해도 받아 감옥에도 갔지만 결국 나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오늘이 있도록 하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상처 입은 사람의 말입니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상처받은 인생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상처를 극복함으로 별과 같이 온 세상을 비추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극과 극입니다. 지옥과 천국입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료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