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지식   (잠 4:1-9)  
        

구약 시대에는 모든 자녀들이 마땅히 배워야 할 학문의 세 가지 부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는 율법입니다. 둘째는 예언서입니다. 셋째는 지혜문학이었습니다. 우리 구약 가운데 욥기나 잠언이나 전도서는 특별히 이런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이 교육주일을 당해서 이 시간 지혜와 지식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 혹 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성경가운데 어떤 때는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두 가지 말은 뜻이 좀 다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아는 것의 총칭을 가리킨 말이고, 지혜라고 하는 말은 아는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지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에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많아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말을 듣는 이들 가운데도 종종 미련한 사람들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사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그는 아편 맞기를 시작하여 아편 장이 가 되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은 미련한 박사올시다. 보통 사람이 늙어 가면 경험이 쌓여서 지혜가 늘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서양 속담 가운데 미련한 자 가운데도 가장 절망적인 미련 장이 는 늙은 미련 장이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교육은 지식에 중점을 둡니다.
  옛날부터 지, 덕, 체의 세 가지 방면을 골고루 주는 것이 원만한 교육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특별히 지육에 중점을 두어서 과학 교육에 치중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현대는 지식이 아주 발전된 시대요, 또한 지식의 팽창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우주에 대한 지식이 아주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인공유성을 쏘아 올릴 줄 알게 되었고, 우주 공간을 향해서 우주선을 발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는 달의 표면이 어떠한지 사진을 찍어다가 볼 수 있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흔히 계수나무가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토끼가 잇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바와 같이 달 위에는 나무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는 물도 없고, 공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사람이 공간을 걸어  다니는 체험도 얻어 봅니다. 아마 오래지 않아 달나라에 가서 금과 은을 캐다가 부자가 될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것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자체에 대한 지식도 굉장히 팽창하여 갑니다.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알 수 없는 신비의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바다 속에 깊이 들어가서 집을 짓고 여러 달 있으면서 바다 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지층을 연구하고 화석을 연구해서 인간이 세상에 나기 전에 지구의 역사가 어떠했다는 것을 찾아내는 지질학이란 과학도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또 인간의 기록에 빠진 인간의 역사를 고고학이란 학문을 통하여 더욱 탐구하게 되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이 지구 자체에 대한 지식이 발전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지구 위에 있는 여러 가지 생물에 대한 지식도 그러합니다. 현미경이 발명됨으로 인하여 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새로운 미균(黴菌)의 세계가 사람의 눈에 분명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연구를 거듭합니다. 생리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그 방면만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의 깊은 곳을 더듬어 내는 심리학도 점점 발전되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물질 자체를 분석해서 그 속을 연구해 보는, 우리가 어렸을 때는 들어도 보지 못한 원자 과학이 발전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의 국민학교 학생의 지식이 五十년 전 어느 박사의 지식보다 낫다. 아마 어느 면에서 이 사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이와 같이 많이 획득한 지식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二十세기는 분명히 지식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사는 이 二十세기를 지혜의 세기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앞으로 후대의 역사가가 판단 내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과거 七十년간의 二十세기는 그렇다고 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십니다.
  二十세기 초기인 一九一四년에 제一차 세계대전이 폭발 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화재와 많은 재산이 파괴되었습니다. 수 없는 인명의 살생을 악마처럼 감행한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一九三0년대부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 사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지나 사변을 일으켰고, 결국은 第二차 대전으로 번져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해서 피차에 살상을 한 것입니다.
  만일 화성에 우리 인간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이 지구성에 사는 인간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본다고 할 것이면 그들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거 같습니까?『지구에 사는 이간이란 동물은 이상한 동물이야. 사람의 생명 하나를 위해서 여러 의사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병을 고쳐주어 생명을 구해 놓고, 여러 해 연구를 거듭해서 문화를 창조하고,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예술품을 만들어 놓고는 또 갑자기 사람을 몇 천 몇 만을 한꺼번에 죽이고, 여러 해 건설한 것을 며칠 사이에 다 파괴시켜 놓고 하니』라고 얘기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과학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기술을 인간의 공리보다도 인간 자신과 문화의 파괴에 사용했으니 그 얼마나 미련합니까?
  지금도 월남에는 이런 성질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유진영에서는 월남 문제를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공산진영은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청이불문(廳而不聞)이올시다. 이 월남 문제가 평화적으로 잘 해결되겠느냐? 혹은 이문제로 말미암아 마지막에는 제三차 전으로 발전되고 뭇 인간의 문화와 인류 자체가 원자 전으로 파괴를 당하겠느냐? 전세계에 잇는 사람들이 이 문제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 二十세기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깨닫습니까? 전세계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지식보다도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얻은 모든 지식과 기술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쓸 만한 지혜 있는 인간이 요구됩니다.
  지혜 있는 정치가, 지혜 있는 사회 과학자가 요구됩니다.『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옛날 잠언의 교훈은 오늘날 현대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교훈입니까?


  여러분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지식은 과학을 통하여 얻으려니와 이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지혜의 근본이 어디 있습니까? 디모데 후서 三장 十五절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이런 글귀를 기록했습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미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고 인류의 문화와 인류 자체를 구원케 하는 지혜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가르쳐 주는 책은 아닙니다. 이런 지식을 바로 써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二十세기에도 필요합니다.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쓰는 법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이 교훈 하는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간추려서 간단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지혜문서 가운데 하나인 욥기 二十八장 二十八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곧 명철(明哲)이니라.』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편 五十三편 一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신론은 악하다기보다는 사실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에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생활을 한 모든 철인, 지인 등 모든 위대한 인물은 비록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마는 보이는 것과 같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글 가운데 신목이 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하나님의 눈이 번개 불과 같이 밝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지혜 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가 이러한 참혹한 세계가 되었습니까? 주를 경외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렇게 부패와 부정으로 가득히 쌓인 사회가 되였습니까? 우리 사회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입니다
  로마서 一장 十八절 이하를 찾아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계시와 그 영광과 능력이 어떠한 것을 인간의 속에서 나타내 보여 주셨고,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도 나타내 보여 주셨건만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마음이 어두워져서 살아 계신 하나님 대신에 짐승이나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이성 뿐 아니고 여러 가지 죄악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기사를 우리가 읽어 볼 수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첫 걸음이올시다..
  고린도 전서 一장 二十四절을 읽어보면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분명히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 『그런고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하나님의 지혜를 그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지혜를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첩경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통하여 배운 바 좋은 지식과 기술을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사용하면 내 개인뿐만 아니고 우리 온 민족, 아니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혜를 생각할 때에 야고보서의 교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三장 十三절 이하를 읽어보면 거기에 야고보가 지혜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좇아오는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 가운데 세상을 좇아온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인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혜 이외에 위로부터 좇아 내려온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첫째로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矜恤)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 거짓이 없어서 화평의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성경에 가르쳐 주는 지혜는 남을 속이는 사특한 세상 사람의 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성결과 화평과 과용과 양선과 모든 선한 열매가 가득 찬 그리스도의 생활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얻어야 나도 우리 사회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과학적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 지혜는 성경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이 지혜는 곧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가 믿고 그를 내 마음에 영접해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자연히 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화라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에 신문 배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부자 집에 신문을 돌리러 갔는데 큰 철창문이 있어서 신문을 멀리 던져 넣느라고 그 살창 문으로 멀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때 언 듯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머리는 문안에 있고 몸은 문 박에 있으니 내가 문안에 있는 것인가, 문밖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 생각으로 한참 있다가 다른 것은 잊어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대문을 왈칵 열었습니다. 목이 대문에 걸려 나가서 부러질 뻔하였습니다. 그가 후에 하는 말이 내가 문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는 몰랐지마는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잇다. 그것은 사람이란 안에 다 들어가 있든지 밖에 온전히 나와 있든지 해야지 절반은 들어가고, 절반은 안 들어가는 것은 가장 미련한 일이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 미안한 말이지마는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마는 머리는 교회에 있고 몸은 다른 곳에 있는 분은 없습니까?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사람이올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려면 온전히 영접하세요. 하늘 문이 열렸을 때에 온전히 들어가세요.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이 다 이 지혜를 배워서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이 교육주일에 참 지혜를 아울러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한경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