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보다 더 지혜로워야  (시112:1-10 눅16:1-13)  


기독교와 합리성

저와 가까이 지내는 두 부부가 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부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더 이상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계부를 쓰는 것이 불신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냥 살아가면 되지 무슨 계획에 의한 지출이냐는 겁니다.  인간의 계획은 불신앙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가정도 가계부를 쓰지 않고 있었지만 왜 가계부를 안 쓰는가 하는 이유에 있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계부를 안 쓰는 것은 그들이 지출하는 내역이 너무도 빤해서 어차피 가장 필수적인 데만 지출하므로 계획을 세우나 안 세우나 그 결과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계부를 안 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8-3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 말씀은 제자의 길에도 지혜와 계획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33절의 말씀은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길의 성패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열심을 다하느냐 다하지 못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미리 생각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합리성을 부정하는 종교가 아니라 도리어 합리성을 추구하는 종교이고 동시에 이것이 얄팍한 인간의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목적적 합리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청지기의 비유

오늘 누가복음 16장 본문에는 한 청지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외지인인 부자가 자신은 먼 곳에 살면서 본토인 청지기를 두고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 밑에서 그 재산을 관리하는데, 그 자신이 주인을 대신하여 농부들과 일용직 노동자들과 기타 다른 사업의 상대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마치 자기 소유처럼 주체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소득의 일정한 양을 주인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의 소득으로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욕심을 더 부려서 주인의 재산을 자꾸 뒤로 빼돌린다는 사실을 주인이 알게 되었고 주인은 마침내 이 청지기를 해고하게 됩니다.

2절에 나오는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하는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이미 모든 비리와 비행을 다 파악하고 질책하는 말입니다.

굉장한 분노가 포함된 질문입니다. 이 분노 앞에는 감히 항의나 변명이 필요 없는 상태입니다.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는 말씀은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이 청지기는 해고 통고를 받은 후 얼마 남지 않은 근무 기간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는 서류 변조를 통하여 빚진 사람들에게 선심을 베풀고 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호의로 미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주인의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하여 주면서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였습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 말합니다. ‘이 증서에 50이라고 쓰십시오’ 밀 백 석을 빚진 사람에게 말합니다. 이 증서 80이라고 쓰시오.‘

이 청지기가 탕감해 준 빚이 얼마나 되는가 하면, 기름 오십 말은 당시  물가로 오백 데나리온이고 밀 20 석도 역시 오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오백 데나리온은 당시 물가로 20개월 평균 월급이었습니다. 많은 액수입니다. 이렇게 두명에게만 탕감해 준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거래처를 한결같이 이렇게 많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비밀이 없지요? 나중에 주인이 이 소식을 모두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더 큰 노를 발해야 되는데, 도리어 이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청지기의 재산 허비나 해고 통지를 받은 후의 서류 변조를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저한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아주 특이한 내용으로 인해서 해석하기 어려운 비유중의 하나로 분류되어 왔습니다.



비유와 관점

비유의 문제는 현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말하는 사람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본래의 뜻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엉뚱한 면을 보면 그 비유의 참 뜻을 알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역사에서 전쟁을 할 때, 비록 적군의 장군이지만 그의 용기와 자기 나라를 향한 애국심이 뛰어나면 존경하고 칭찬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일본 수군과 23번 싸워 23번을 모두 이기는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전적을 남겼습니다.

특별히 명량대첩에서는 조선의 13척의 배로 333척의 일본의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전체 해전을 통해서 600척 넘는 일본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켜 일약 세계적인 해군 지휘관이 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에 대한 영웅적인 평가가 있을 때마다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며 겸손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넬슨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이라는 말을 듣고는,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된다.”

도고 제독은 자신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나는 천왕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도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을 버리고 조선을 사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13,31) 의 비유를 읽고서 자기 밭에 겨자씨를 많이 심으면 천국이 온다고 생각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비유에서 주인이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했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결코 불법적인 행위를 장려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법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보아야 합니다.



청지기의 책임성

첫째로 이 청지기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차한 변명이 없었습니다. 깨끗하게 현실을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청지기의 최선

둘째로 이 청지기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여 자신의 미래을 준비하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씨를 잘 압니다. 그가 미국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전체 석차로 3등이었답니다. 졸업할 때 참모총장 면접을 하는데 참모총장이 성적표를 보시고 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왜 당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사관생도 지미 카터는 이 느닷없는 질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지미 카터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자책한 것은 단지 석차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3등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좋은 성적입니다.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다만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청지기의 냉정함

셋째로 이 청지기는 자기파괴적 감정에 속지 않았습니다.

이 청지기는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민이 미래를 걱정하고 일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이 청지기는 매우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매우 냉정하게 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으면서 일이 조금 안되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립니다. 조금 잘되면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에 있다고 기고만장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안되면 운명의 신은 내 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지레 스스로 먼저 포기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 온 사람은 일이 안되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도 일이 안되었을 경우 울기도 하고 억울해 하기도 하지만 쓸 때 없는 분노와 좌절은 겪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새옹지마”의 교훈을 깊게 새겨야 합니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내리막 길에서 “이제 살겠구나” 하고 오르막 길에서 남들도 다 달리는 길을 죽을 상을 하고 달린다면 그 선수는 완주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감정에 속아서 자신의 육체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마라톤을 하면서 감정의 장난에 속으면 안됩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수 십번 쌓았다가 헐어도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을 투기하듯이 살지 맙시다. 인생을 도박하듯이 단 한 판에 다 걸지 맙시다.

그런데 본문의 청지기는 위기에 처해서 이와 같은 자기 파괴적 감정에 속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직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무능력을 그대로 보았습니다.  3절에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똑똑한 겁니다.



충성

넷째로 이 청지기는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청지기의 충성하는 자세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이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작은 것, 하찮은 것, 불의한 이 세상의 재물, 이 세상의 것에 충성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철저한 합리성을 우리에게 강조하십니다. 이 청지기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소유하는 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습니다. 재물은 소유하고 있는 그 자체에서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재물이 있으면 친구가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재물이 좋아서 입니다. 재물이 없어지면 친구도 떠나고 힘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재물을 가지고 다른 것에 투자하라는 겁니다. 이 재물을 남을 위해 쓰라는 겁니다. 그러면 돈이 없어져도 그 명예와 사랑은 여전히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본문의 청지기는 이것을 알았고 이것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

예수님의 결론은 이러한 지혜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꼭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도 이렇게 지혜로운데 “빛의 아들들”이 이만한 지혜를 안 가져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요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이 청지기 만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충성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가 맘몬을 섬기는가 자기 자신을 섬기는가 결단을 하라는 겁니다. 이 지혜있는 청지기에게서 지혜를 배우지만, 충성하는 대상은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합리성이 단지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철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이러한 철저함을 가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진리에 얼마나 철저합니까? 여러분이 믿고 있는 진리에 정말로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철저하지 못합니까? 하찮은 일을 위해서도 세상 사람들은 매우 철저하건만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따라 사는데 왜 철저하지 못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고 충성하면 우리는 영적인 전투에서 이미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고 충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결단해야 합니다. 철저하지 않은 삶 또는 타협하는 삶, 적당주의의 삶에는 결단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결단이 요청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은 내 기분에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