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나니  (계1:3)

  옛날 동유럽의 유대인가에서는 가난뱅이와 갑부와 러시아의 황제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합니다. 가난뱅이는 안식일 전날 밖에는 새 셔츠를 입지 못합니다. 갑부는 매일 새로운 셔츠를 갈아입습니다. 로츠차일드 남작은 하루에 세 번 셔츠를 갈아입습니다. 황제는 시중을 드는 사람이 붙어 있어서 쉴새없이 연달아 새로운 셔츠를 갈아입습니다. 가난뱅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조반을 든다. 로스차일드 남작은 오후 2시나 3시경까지 자고 나서 조반을 듭니다. 황제는 꼬박 하루를 자고 나서 다음날 조반을 듭니다. 가난뱅이가 낮잠을 잘 때는 마누라가 깨우게 돼 있습니다. 갑부는 침실 밖에 심부름꾼이 한 사람 서 있어서  낮잠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망을 보고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남작쯤 되면 12인의 종이 집안 가득 망을 보고 있어서 누구도 소리 내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침실 앞에 1개 연대의 병사가 늘어서 있어 큰 소리로 "조용! 조용!"하고 소리치고 있습니다.(예화 뱅크-행복)

저술가인 윌 듀랜트는 연구와 학식에서 행복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행을 해보았으나 권태만을 느꼈습니다. 재산을 모아보았으나 걱정과 불화를 확인했습니다. 저술에 몰두했으나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차 안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한 남자가 기차에서 내려 아기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여인과 아기에게 입 맞추는 것이었스빈다. 그 가족을 태운 차가 조용히 떠나는 것을 보며 듀랜트는 자신이 본 모습이 행복이란 것을 알았습니다.(무엇이 행복인가-예화뱅크).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행복일 까요?
오늘 성경은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성경이 성도에게 복이 있도록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특히 계시록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말씀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우리의 소망은 주님 오시는 그날입니다. 그날에 관해 기록된 말씀이 복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복이 있나니'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Johnson).
요한은 계시록의 주된 내용이 미래에 있을 예언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말씀을 그에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언 정황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밝힙니다.
  요한은 신약의 예언자로서 구약의 예언자들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계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신 말씀이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말씀과 같은 형식임을 보여 줍니다.
(겔 2:9-3:3)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신 말씀과
(계 10:8-1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신 말씀이 같은 표현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약의 예언자적 기대의 성취를 바라며 나타나고 있으며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여 오므로 구원역사의 장엄한 완성을 보여 줍니다.
  성경에는 수 백 가지의 역사적으로 적중되고 성취된 예언들이 있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에는 350여 가지의 예언과 프로필이 있습니다. 동정녀에게 나실 것,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지파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등 선택을 좁히고 좁혀왔습니다. 피터스트너 박사는 예수에 관한 예언 여덟 가지가 한 사람에게 우연의 일치로 성취될 가능성을 수학의 확률 원리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대머리가 열명 중에 하나있고, 손가락 하나 없는 사람은 1000명중의 하나, 그리고 눈먼 사람은 10,000에 하나로 칠 때 동일인이 손가락이 잘리고 대머리에 소경이라면 이 셋을 곱한 수치가 됩니다. 여덟 가지가 동일인에 우연히 성취될 가능성은 텍사스주(한반도의 3배)에 은돈을 두자 높이로 깔아 놓고 그 중에 표해 놓은 단 하나를 단번에 집어내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350개 예언의 우연의 일치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확률로 본 예언성취-예화뱅크)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짐을 통해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복된 말씀임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읽는자 (호 아나기노스콘)는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냅니다.
유명한 무디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기로 서약하면서 생활을 했는데도 늘 넘어집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중에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그를 휩싸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라고 생각한 무디가 산을 내려와 살아보면 그 은혜가 한 달을 못 갑니다. 그래서 '아하, 혼자는 안 되겠구나! 유명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부흥집회마다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제 이런 귀한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리라" 그러고 나서 한두 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또 비참한 자기를 보게 되었고, 또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 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에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며 혐오하던 무디가 어느 날 문득 펴든 성경이 로마서 13장 17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무디는 위대한 무디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듣는 자들(호이아쿠온테스)은 말씀을 듣는 회중들을 나타냅니다.
(눅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느헤미야 8장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온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 스스로 단합하여 새벽부터 말씀 듣기를 간청하였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5절). 뿐만 아니라 말씀에 명한 대로 경건하게 절기를 지킵니다.
   '모든 백성이…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1절)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능한 학사로 알려졌습니다(스 7:6). 그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해석자로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학사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수문 앞에 있는 널따란 광장에 마련된 '나무 강단'위에 섰습니다(4절).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기 위해 사용한 이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최초의 강단으로써 공개된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2절)이 모여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갈망하며 구했습니다. 복음을 갈구하며,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새벽부터 오정까지…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3절).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에스라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말씀을 청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백성들이 모두 일어선 것은, 말씀을 듣고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겸손과 경건을 나타내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아멘'으로 응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응답하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듣고 응답하며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상의 경배입니다.
   에스라는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다음에 율법의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여의사는 독신으로 병원에서 일하면서 일과 연구에만 몰두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자신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아편을 조금씩 맞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날이 갈수록 양도 많아지고 맞는 횟수도 잦아짐에 따라 어느새 마약중독에 걸렀습니다. 그는 정신이 약해지고 혼란스럽게 되어 일하는데도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전도사로 부터 전도를 받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은 말씀을 묵상하던 중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신 속량하였고 이제는 자신이 저주 안에 있지 않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자유 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속사람이 아편중독에서 놓여나서 새 사람이 된 것이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강건해진 속사람으로 이해 모든 일에 더욱 힘쓰게 되었습니다.(말씀으로 강건해진 속사람-예화 뱅크)

지키는 자들(테룬테스)은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자로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출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한 선교사가 100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한 한국인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선교사를 찾아온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 자신 있게 산상수훈 전부를 암송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교사는 '이 사람에게 성경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는 성경이란 암기한 것만큼 행동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순례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한국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당신이 지금 제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제가 지난날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입니다. 저는 과거에 성경 구절을 암기하려고만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이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나면 즉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웃을 찾아가 그 이웃에게 성경 구절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자 비로소 성경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읽고 듣고 지킬 때 복이 됩니다.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은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 또한 그 가운데 기록한 것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합니다.
'때'(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때(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합니다.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합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호퀴리오스 엥귀스)는 주의 재림의 소원을 나타내는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 계 22:20)와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Martin). 바울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 오는 것을 믿는 이상 모든 핍박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라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5:7-9)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합니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한 교회에서 종말론적 설교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남자가 불손한 태도로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와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맨 앞자리로 나와 앉는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사람은 아이언사이드 박사에게 다가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을 믿습니까? "아이언사이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 그러믄요." 그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 역시 선생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이 말에 그는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무슨 뜻의 말씀이신지요?" 하고 그가 물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선생을 붙들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진리가 선생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느냐는 뜻입니다"라고 아이언사이드는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경건치 못한 그 남자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누가 목사님께 가서 제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요."( 삶의 변화-디럭스바이블)
  우리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언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진리는 우리 성도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세워주고, 선한 일을 해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은 우리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연구하도록 격려해 주며 또한 이 예언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충실히 행하면 장차 임하는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은 반드시 요한계시록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말씀에로 확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더 말씀을 잘 읽고 들으며 충실하게 지키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한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는 우리 모두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함이 복이 있음은 때가 가깝기 때문임을  기억합시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