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주인  (에베소서 6:4)


일제 시대 말에 평양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몇 명의 졸업생들이 모여 "너는 장래 무엇이 될거냐?"며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정치가가 되겠다고 하고, 또 어떤 친구는 사업가가 되겠다고 하고, 또 어떤 친구는 교수가 되겠다고 하는 등 저마다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직업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소년의 차례가 되자 "나는 목사가 될거야"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겨우 목사가 될거냐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중년신사가 그 소년들이 있는 자리에 오더니, 머리를 숙이면서 "장래 목사님!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깨우쳐 이 나라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소년들은 그 중년 신사의 뜻밖의 행동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뭐 대단한 것 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유달리 목사가 된다는 소년에게만 이렇게 인사를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겠다는 소년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그 중년 신사는 다름아닌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목사가 되겠다고 한 소년은 후에 건국대 총장과 한신대학장을 하신 정대위 목사였습니다. 그 뒤 소년 정대위는 도산의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미국에 건너가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기까지 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야말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교회는 "컨퍼메이션(Confirmation)"이라는 예식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견신례"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우리의 견신례와 달리 어린이가 중학교 입학할 때 교회에서 약 6개월 동안 신앙과 교회생활에 대해서 공부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 전 교인 앞에서 받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 예식을 거행할 때 목사가 "이 소년을 축복하고 싶은 사람은 앞에 나와 이 소년과 같이 서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의례 그 소년의 가족과 일가친척이 나옵니다. 다른 성도들이 나와 아이와 함께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교회에서는 전 성도가 다 앞으로 나왔습니다. 목사는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느냐고 물으니까 성도들이 각자 자기들의 자녀들의 가정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생각하고 자책하면서, 남의 집 아이지만 미래의 세대를 축복하는 심정으로 앞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자녀를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가정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처럼 온전히 교육시키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할 때, 누가 그 아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그건 그 아이의 사정이라고 눈감아 버려야하겠습니까?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만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양육하는 일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일꾼들을 누가, 어떻게 키워야 하겠습니까?

1. 교육의 책임자는 부모입니다.

보통 부모의 역할을 보면,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가정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어머니는 가정 살림과 자녀 교육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가 잘못되면 "집에서 애 하나 간수 못하고 뭐하냐?"며 아내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면, "또 아비들아" 하면서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자녀들의 교육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자녀교육의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모 모두 자녀교육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나는 아버지니까" "나는 바쁘니까" 하고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청소년 탈선 원인에 있어서 '아버지 역할의 부재'가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안계신 집안의 아이들이 문제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편부, 편모 가정의 아이들이 문제아가 될 소지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다 할지라도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청소년 탈선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그저 때맞춰 용돈이나 주는 잔소리꾼에 불과한 존재로 각인되어 자녀 교육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청소년들이 고민을 상담하는 대상으로 37%가 친구를, 32%가 어머니를 꼽았으나, 아버지와 상담한다는 비율을 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50.8%가 자녀가 자신에게 상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낳았다고 부모가 아니라 그 자녀양육의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 역시 철학자였습니다.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소질을 타고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우수에 젖으며 엉뚱한 질문을 해댔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걱정이 되어 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어떤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자녀들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처럼 자녀들의 가슴 속에 예수의 낙인이 찍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아이가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참인간, 참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신앙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색한 부자가 아니라 인류복지에 크게 이바지할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유언을 남기며 "너는 어떤 경우에도 급하게 화내지 말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꼭 주일에 교회에 가서 진실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가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또한 "네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너의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돈을 쓰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어느덧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고, 어떤 것을 남기시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여러분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로 자녀를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2.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일 전에 라디오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학자들의 토론을 들었습니다. 그 토론을 하는 학자들 가운데 초등학교 학생 아들에게 과외를 열 두 개나 시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요사히 강남과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가격이 천장부지로 뛰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학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금년 초에 특목고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 목동 신시가지 학교 학생들이 제일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목동이 교육 중심지로 부상된 것입니다. 교육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정도로 우리 나라의 교육열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나라입니다.
보통 부모들은 자녀를 자기 소유로 압니다. 그래서 자기 방식대로 가르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방식, 자기 표준으로 가르칠 때 억압적인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혈기와 기분으로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적, 심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면 자식은 격분하게 되고 그 결과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소극적인 면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자녀를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오하이오주의 대부호 테일러씨의 농장에 한 거지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17세의 '짐'이라는 소년이었습니다. 일손이 필요한 테일러씨는 그 아이를 하인으로 고용했습니다. 그 아이는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할만큼 신실하기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 그리고 주인인 테일러씨도 그 '짐'이라는 소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짐이 자기 외동딸과 만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테일러씨는 하인 주제에 감히 주인집 딸을 넘보는 짐에게 화가 치밀어 심하게 때린 후, 빈손으로 내어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후 35년이 지난 어느날 테일러씨는 낡은 창고를 정리하면서 낡은 보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보따리는 옛날 자신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다 쫓겨난 짐의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보따리를 풀어보니 몇 권의 책이 들어 있었고, 그 책에는 제임스 에이 가필드(James A Gafield)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테일러씨는 짐의 본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짐의 본명을 알게 된 테일러씨는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 이름이 미국의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아니 우리 교회의 어린이, 청소년들을 보는 눈이 더 깊어야 하고, 더 넓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거나, 소홀히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안에 담겨있는 엄청난 가능성과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장래도 분명히 크고 위대할 것입니다.

3.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은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는 인내로써 대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나간 아들을 끝까지 기다린 아버지의 사랑처럼 부족한 우리를 향해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녀에게 인내로써 대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부당하게 엄격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다루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지 우격다짐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금시대의 영웅이었던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한때 여성 편력 문제로 탄핵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대부흥을 가져왔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착증에 걸려 백악관에서 정말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행동은 불우했던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클린턴은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얻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새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클린턴 모자를 시도 때도 없이 구타하였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클린턴은 그런 과정에서 성도착증에 빠지게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 교육 방법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해야 합니다. 즉 인간적인 고집이나 욕심이 아니라 주의 뜻하신 바를 좇아 양육과 훈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 중직자들은 자녀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대학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해도 늦지 않으니 교회는 1년 동안 쉬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삶의 원칙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해야 된다는 편의주의를 은연중에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키운 자녀는 스스로를 믿음으로 지킬 수 없어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서 맡긴 영혼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녀로 만들기를 힘써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한 생애를 살아나가야 됨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건한 신자들 가운데서도 자녀의 신앙생활을 도외시하고 신앙교육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자녀가 부자가 되고 축복받는 아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경우 자녀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효도하지 않는 것도 그 어디에 하소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자녀를 위한 기도와 신앙교육으로 자녀들을 신앙 안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 호소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딸이 어떤 남학생과 함께 가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경제 형편이 어려워 밖에 나가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교육은 우리 자녀의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미래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자녀들을 먼저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름길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는 말씀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신앙 교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