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큰 자!  (마18:1-6)

  어떤 부부가 박찬호 선수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답니다.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부인이 남편에게 "당신 박찬호 선수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것 알아요?" 깜짝 놀란  남편이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라니요 신문에 났는데요." "신문에? 당신 정신 나간 것 아니야?" "뭐 정신 나가" 그러더니 일간신문 한 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스포츠 면을 펼치더니 큰 글씨로 <한국인 박찬호와 일본인 노모가> 이렇게 쓰여 있더랍니다. ▶아직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박찬호 선수와 일본의 노모선수의 이름을 '노모' 즉 늙은 어머니로 오해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작은 오해가 커지면 큰 싸움이 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해 없는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한국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923년 5월 5일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전에 1920년부터 어린이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 교회는 우리보다 좀 빨리 1856년부터 어린이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를 축복하는 주일'이면서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을 통하여 교훈을 받는 주일'입니다. /믿/
  ▶몇 년 전에 국민일보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한 어린이의 글을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예요. 구로 초등학교 3학년이고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박스만 해서 4식구가 다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구로2동에 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운이 좋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 취로사업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있어요.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말해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 가는 날이 더 많아요. 지난 부활절 날 제가 엄마 때문에 회개하면서 운 것 예수님은 보셨죠. 그 날 교회에서 찐 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받아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답니다. 그런데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는 화를 내시면서 "흥, 구원받아서 뭐하냐?"고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만원만 주시면 네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 하시지 않겠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이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노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이 물어물어 저희 집에 찾아오신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을 놓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책갈피에서 흰 봉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수표가 아니겠어요.
  저는 마음속으로 '할아버지께서 가져 오셨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라고 우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도 우시고 저도 감사의 눈물이 나왔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리 안 쫓겨나고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말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선 것이에요. 대예배에 가신 엄마가 얼마나 우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 만해 가지고 집에 오셨더라고요. 저는 엄마가 저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제가 커서 꼭 갚을게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천국에서 큰 자는 바로 용욱이 같은 아이입니다. /할/ ▶먼저 어린이들의 특성 몇 가지만 알아봅시다!
  ①어린이는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행7:20절에 모세가 태어났을 때 예쁘고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도 아름다웠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왜 예쁘고 아름답습니까? ⑴어린이들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고 솔직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⑵어린이들은 비교적 착하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⑶어린이들은 맑은 웃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⑷어린이들은 연약하고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할/
  ②어린이는 어떤 의미에서 천사가 될 가능성과 마귀가 될 가능성을 함께 지닌 미완성품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예쁘고 아름다운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결국 한 아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고 다른 아기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불 신앙과 반항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고 가인은 불신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③어린이는 주님께 드려져야 완성품이 됩니다. 어린이는 물론 부모의 손안에서 자라야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손안에 드려져야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완성품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아 주시고 안수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막10:16절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아이들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착해지고 밝아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아이들 뿐 아닙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④이런 어린 아이들에게 신앙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돈을 잘 법니다! 얼마나 돈을 잘 버는 지 유대인은 <돈버는 벌레>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또 교육을 얼마나 잘 시키는지 유대인의 교육을 <천재 교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가 탄탄하게 잘 뭉쳐져 있습니다. 소위 <고리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리가 아무리 길어도 한 곳만 끊어지면 이미 고리가 아닙니다. 한 가족은 단단히 뭉쳐져 있어야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다 박살내었어도 유대인의 가정만은 파괴시키지 못 했습니다.
  종교적 기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식탁은 교회 강대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식사 때마다 토라 공부, 탈무드 공부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에게 가정은 최고의 학교요 아버지는 최초의 선생님입니다.
  유대인의 천재 교육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정치가 바로 되어 있고 선진국이며 신사의 나라가 영국입니다. 민주주의가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원래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영국은 원래 바이킹, 즉 해적이었습니다. A.D. 8세기에서 10세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의 템즈강 지역을 점령했고,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킹들이 머리가 대단히 우수하였습니다. 훌륭한 후손을 키우기 위해 고민하다 훌륭한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을 도둑질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억지로 끌려와서 해적들의 아내가 되었지만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훌륭하게 양육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해적이었지만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으로 아들은 신사가 되어, 오늘날 영국이 신사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교과서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세운 학교가 있습니다.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톤> 대학은 모두 청교도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최우수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학교들이 300년 간 미국의 교육을 주도하고 세계 선교를 이끌고 왔습니다. /믿/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린이를 모델로 사용을 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어른 앞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이같이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떤 모습에서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처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막10:15절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받든다'는 말씀은 '손안에 넣는다. 환영한다. 영접한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손으로 떠받들듯이 영접하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손으로 떠받들며 그것을 영접하고 환영하고 즐거워하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바로 하늘나라를 떠받드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마11: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는 말씀은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만을 갖춘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즉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런 의심 없이 떠받들고 환영하며 영접해드린 제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이 주일날, 주님은 우리들에게 어린이 같은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떠받들면서 그대로 어린이처럼 영접하는 심령을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냐?> 하는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논쟁에 대하여 답을 주셨는데 어린 아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설교 제목도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맑은 날씨에 산 위에서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했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순종한 어린 아이 같은 심령이었습니다. 요단강에 법궤를 앞세우고 강을 밟고 지나갔던 여호수아, 여리고성을 돌고 있던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은 마치 어린 아이 같은 그런 귀한 심령들이었습니다. 풍랑 치던 바다를 밟고 예수님에게로 걸어갔던 베드로도 바로 어린 아이 같은 심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1-10절까지 연결된 말씀인데,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비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자 맷돌에 관계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한 가지 주제, 즉 천국이라는 주제 속에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흔히 '어린이 교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아니라 어린 아이를 통하여 어른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주인 될 자격에 관한 교훈입니다. <천국시민의 자격이 과연 무엇인가? 또 천국 시민으로써의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이런 교훈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서열 제일이냐? 누가 킹 메이커냐? 누가 실세 자냐? 여기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고 세 가지의 교훈을 주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정직성과 겸손함을 들어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선택받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이 천국에 합당한 인물이 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 대중들에게서 벗어나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시며 그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당시 12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단 한번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늘 미숙하고 부족하며, 연약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사랑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시고, 잘못하면 고쳐주시고, 실수하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천국백성으로 훈련시키셨고, 사명자로 훈련시키시면서 단 한번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향하고 계십니다. /믿/

1. 오직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킹 메이커'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기 '그 때'는 어느 때인가? 마17:22-23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시기가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공포할 때를 말합니다.
  또 막9:33-34절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는 자리와 직위에 대한 논쟁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10장으로 넘어와 보면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이런 청원을 합니다.
  37절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 때나 지금이나 명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총회장자리, 노회장 자리, 그저 장 자리하면 뻑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여기 '그 때'는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둔 바로 그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수난을 생각하고 죽음을 앞둔 안타까움으로 같이 고민해야 할 때요, 기도할 때입니다.
  그런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누가 킹메이커냐는 문제로 핏발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자식들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누가 더 많이 상속받는가를 논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상황이 임박했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 이것이 관심이었습니다.
  <천국에는 누가 더 크니이까?> 이 질문은 천국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입니다. 이유는 천국은 계급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곳임을 요한계시록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 역시 계급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나 교회에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는 존재합니다. 가정의 부부사이는 계급이 없습니다. 남편이 사장이라고 해서 아내가 말단사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계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천국이나 교회는 계급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질서를 잘 지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할/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 속에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②제자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야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우리들이 무슨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요? 국무총리는 누가 하고, 국방부 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은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출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월급을 많이 받나? 누가 더 많은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자리문제, 위치 문제를 중하게 봅니다. 또 누가 좋은 것을 가졌는가? 큰집을 가졌는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관심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예쁜가 하는 관심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를 보면 <누가 더 큰집에 사는가? 누가 더 멋진 새 옷을 입었는가?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가?>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면서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세속적인 것에 빠져 있습니다.
  ③그래도 그들이 '천국'이라는 분명한 범위를 정했다는 것은 신앙의 발전이 있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주제는 천국임을 분명히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천국의 개념이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누가 큰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눌린 자의 콤플렉스입니다. 항상 정치적으로 눌려있고,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려있다 보니 천국에서는 좀 높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한번 크게 윗자리에서 행세하며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크고 분봉왕 헤롯왕도 크며, 대제사장, 바리세인, 서기관등이 큰 것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대체 누가 큽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무엇인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대가 어떤 기대였습니까? 아마도 저들의 기대는 "그래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헤롯왕도, 대제사장이 크지마는 천국에서는 우리 12제자가 크다"는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나타납니다.
  ▶2절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전설에 의하면 이 어린아이는 베드로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만 성경에 기록이 없으니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실물을 통해서 교육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면서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또는 들의 백합화, 겨자씨, 씨 뿌리는 일들을 통하여 귀중한 진리를 교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물 교육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또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들보다는 작고, 사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①제자들이 계산한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통해서 믿음의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②외식하는 헌금이 아니라 과부의 엽전 두 푼을 통해서 최선을 다한 헌금의 진리를 교훈 하셨고, ③지극히 적은 겨자씨를 통해서 살아있는 믿음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어린아이는 무시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인원이 장정만 60만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어린아이가 계수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존엄성을 가장 철저하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중한 영혼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 속에는 누가 크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①돌이켜야 합니다. 여기 '돌이켜야' 한다는 말은 '돌아서는 것, 즉 회개'를 의미합니다. ▶너희들이 자꾸만 위를 보느라고 높이높이 생각하고 있는데 돌이켜 굽히라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았느냐? 내려다보아라! 큰 것을 생각했느냐? 작은 것으로 낮추어라!' 즉 허황한 것을 버리고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라! 돌이켜서 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만약에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입니다. 무섭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래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도, 세례요한의 복음의 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바른 회개를 한 사람이래야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믿/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길이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계획하고 마음먹고 있는 그 일이 죄와 관련된 일이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한 일이 아니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②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칼빈'은 <단순성을 의미한다>고 했고, '클라크'는 <단순성과 가르치기 쉬운 점>이라고 했으며 '뱅겔'은 <겸손과 단순성과 잘 받아드리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부터 악할 뿐 아니라 그 악을 유전으로 받아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악하냐? 어린아이가 악하냐?'를 묻는다면 삼척동자라도 어른이 더 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①부모를 의존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긴 채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엄마의 젖을 먹고 엄마의 표정을 살피면서 행복해 합니다.
  인간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시인은 <주의 날개 그늘 밑에 내가 쉬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
  ②요구가 많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부모가 해주어야 하고 또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든지, 부담감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들이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만일 거절이라도 하는 날이면 울고불고 졸라댑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모와 자식간의 그 끈끈하고도 굵은 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의 정당하고 바람직한 요구에 거절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요구가 정당하지 못하면 부모는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또 정당한 요구라도 부모가 능력이 없을 때, 못 들어 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우리의 요구를 미루거나 거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요구도 다 수용하시고 들어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구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약4:3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③쉽게 돌이킵니다. 야단치면 무서워하고, 매를 들면 떨고, 설득하면 알아듣고 다짐하면 순종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어린아이는 좀처럼 보따리 싸들고 대문을 나서지 않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버릇은 어른이나 아이나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명을 등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짐 싸들고 교회를 떠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끈질기신 분입니다. 한번 택한 백성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도망가고 피하면 더 큰 징계가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돌아서는 것이 유리합니다. 빨리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돌아서면 징계가 가벼워집니다. /믿/
  ④정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직은 상대적인 정직입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정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에 비해서 훨씬 정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현실에 약합니다. 어른이 말하면 액면 그대로 믿습니다. 어떤 일을 달래기 위해 '어린이 공원에 언제 놀러가자' 약속을 하면 어린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립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성, 정직성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지지 않고 잘 믿습니다. /할/
  ⑤쉽게 본을 따라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모방성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 말씨,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모방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행동을 잘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인성교육, 사람교육이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승(개나 고양이 등)을 기르는 데는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식을 기르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관심은 학교 교육이나 자식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22:6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아주 강조를 하셨습니다. 또 '결단코'라는 표현을 써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3.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4)

  ▶4절에서 말씀하시는 초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초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모든 어린아이가 천국에 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초점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기들이 존재할 수 없고, 부모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고, 부모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들은 겸손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 누가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겸손, 즉 자기 비하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이웃을 잘 섬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는 데 열심입니다. 지식을 높이고, 가문을 높이고, 그래서 자손심도 굉장히 내세웁니다. 그런데 천국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할/
  ▶천국 공식은 작은 자가 큰 자이며, 낮은 자가 높은 자이며, 죽은 자가 산 자이며, 주는 자가 얻는 자입니다.
  표현과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자신을 과시하고픈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을 겸손의 덕으로 누르고, 신앙의 힘으로 통제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교만 방자한 사람이 됩니다.
  약4: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으며,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중심교훈은 <어린아이들처럼 되라는 것>이고 그 다음엔 <어린아이들처럼 낮추라>는 것입니다. /할/
  겸손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내가 매일 매일 십자가 아래 죽노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죽일 때만이 나타나는 미덕입니다. 천국은 신앙의 자만이나 교만 (나는 당연히)라는 자만심을 허락지 않습니다.
  천국의 문은 심히도 좁고 협착하여 겸손한 자 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

4.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라!(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코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어린 아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쁜 의미로 사용한 곳이 있습니다. 엡4: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세상 풍조에 쉽게 빠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은 세상 경험이 없고 판단력이 부족해서 잘 속아 넘어 갑니다. 못된 어른들이 따라오라고 하면 그냥 속아 따라갔다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피해를 보았는가?
  신앙도 연약하면 사탄에게 속아 넘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장부의 신앙을 가지라고 당부합니다. 신앙의 연약한 부분을 교훈하면서 어린 아이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좋은 의미로 설명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은 ①성장하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어린아이는 쉬지 않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라야 합니다.
  ②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가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그 부모의 붕어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③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결코 남에게 화를 내거나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미움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④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따르고 고칩니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5.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여기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죄가 무엇인가?
  ①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의 본성은 유혹자입니다. 마귀는 다양하게 접근합니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다가와서 속삭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다른 사람들을 죄를 짓게 유혹하는 죄'랍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장본인을 죄인으로 보지만 그러나 본문은 죄를 짓게 한 그 사람이 더 크게 정죄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②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사기 치거나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아서 넘어지게 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신앙을 팔고, 교회를 팔고, 직분을 팔고, 예수를 파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실족케 한다'는 말은 원문에 '스칸달리조'라는 말로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스캔들이라고 하면 남녀관계를 많이 생각하지만 스캔들의 본래의 뜻은 '남을 넘어지게 하고 거침돌이 되게 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캔들이라는 말은 이성관계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 경제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금을 유용했다거나 어떤 일로 넘어지고 감옥에 가게 되는 대형 사건이 스캔들이 되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06년 5월 7일 어린이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