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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 (요8:1-11)
자유는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준다
가난과 굶주림의 모진 어려움과 눈물의 고통을 통해 얻어진 빵은 그 가치가 소중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던 불치병의 환자가 기적적으로 소생했을 때 그 건강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멸시천대와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과 인정과 존귀함을 받을 때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자유를 잃고 고통당하며 신음하던 사람이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그 자유의 가치는 얼마나 큰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나는 새였다. 슬픈 음악을 노래하는,
나는 새였다. 항상 지루한 말을 반복하는,
나는 새였다. 나는 새였다. 날지도 못하는 떨어진 날개를 가진,
나는 새였다. 날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는 새였다. 나는 자유를 잃고 방황하는,
나는 새였다. 오 하나님! 나는 이제 날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을 참 인간 되게 하고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갖게 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고 위치가 높다 할지라도 그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자유가 많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그 넉넉함의 자유가 있습니다. 지식과 학문을 쌓은 사람도 그만큼 지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 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가 많습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이 주는 자유가 큽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누리는 자유는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평안과 참된 안식을 제공하게 되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하다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데 이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상실한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 천지만물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는 창조의 형상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자유인의 찬양, 자유인의 행복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축제요, 예배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을 얻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돈을 벌어도 돈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권세를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얻든지 그것을 얻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고, 그것에 매이면 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을 때 자유인이 됩니다.
어느 탐험가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어서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푸덕 푸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했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고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이 사람은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 가지고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져서 쓰러지는 겁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고 물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온 힘을 다해서 간신히 돌아와서 갑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어 담아서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습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고 이제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목마름
여러분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알면 자유이지만 모르면 필연입니다. 알면 은총이지만 모르면 숙명입니다.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것을 알면 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자유가 있고 거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푸른 창공을 날아간다고 해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자유를 가로막는 죄
진리는 어떤 비밀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으며 그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지적(知的) 자각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을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간음죄와 위선죄
요8장에 무엇엔가 붙잡혀서 살아가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정욕의 지배를 받으며 간음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자였고,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위선과 독선의 지배를 받으며 위선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음죄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과 위선죄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지금 정욕의 지배를 받으며 간음죄의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그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의인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종교적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예수님까지 죄인으로 정죄하려고 했던 극단적인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요8장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더 불행했는지는 모릅니다. 간음죄의 종으로 그리고 위선 죄의 종으로 살던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행한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분은 불행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은 인간을 악한 기질과 성품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이고 죄의 종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실 그 분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은 간음한 여자를 정욕의 기질과 성품 그리고 간음죄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또한 위선자들을 위선과 독선의 지배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고 사울을 극단적인 위선 죄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병든 기질과 병든 성품에 얽매어 죄의 종으로 어둡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무질서하고 또는 난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울증, 무기력증, 공포증, 도피증, 피해망상증 등에 사로잡혀 시달리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자기만이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며 욕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며 살아가는 위선자들과 독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병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질과 성품이 모두 비정상적으로 병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인생을 그렇게 진단하고 취급하시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인생을 자유케 해 주셨고 새롭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 주셨습니까? 죄를 내리치는 설교를 하심으로 그 여자를 자유케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자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므로, 주님의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게 하므로, 그리고 자기의 부끄러운 죄를 주님 앞에서 자복케 하므로 그 여자를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은 간단한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족합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서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 한 마디로 족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한 마디로 족합니다. 주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하시는 한 마디를 가슴을 열고 받아 드릴 때 우리의 운명은 바꾸어 집니다.
그 여자는 입을 열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 한 마디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정죄를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나는 정죄를 받아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해 마땅한 죄인인데, 지금 주님의 말씀과 행동 때문에 이렇게 정죄를 당하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나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주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주여 나는 망할 자인데,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주여, 나를 고소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나이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열고 회개하면서 주님께 응답했을 때 그 여자의 운명이 바뀌어 졌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주님이 선언했습니다. "아들이 너를 자유케 하노라. 아들이 너를 자유케 하면 네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내가 너를 자유케 하노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지어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엔 가 얽매어서 부자유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못된 기질에 얽매어서 부자유하게 살아가고 자기의 죄악 된 습관에 얽매어 부자유하게 살아가며 때로는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어서 부자유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탈출이 필요하고 우리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자유케 됩니다. 이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하리라." 주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주님께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삶의 자유와 여유와 기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에 몰두, 수시로 경이
영국의 <런던 타임즈> 라는 잡지에서,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위는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킨 후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3위는 멋진 공예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4위는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 낸 의사였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중 재벌이나 귀족이나 정치인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보람 있는 일을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보람이란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네 사람의 행복은 순간적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래성을 완성한 아이가, 집에 가서 숙제 안 하고 놀기만 했다고 엄마에게 혼이 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다음날 아이가 감기에 걸려 속상할 수 있습니다. 공예품을 완성한 예술가가, 그 날 밤 그 공예품을 도둑맞고 낙담할 수 있습니다. 의사도 다음 번 수술에서 실패하여 한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행복감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복감이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복한 순간을 많이 가지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 위에서, 네 사람의 공통점을 다른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간에 몰두하는 겁니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는 일에, 엄마는 아기의 맑은 눈을 보는 일에, 예술가는 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아무런 다른 생각이 없이 몰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일이든, 혹은 타인을 돌보는 일이든 관계없습니다. 그 일을 하는 순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순간에 몰두>, 이는 매우 중요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대체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하여 봅니다. 지금 나는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를 제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몸은 현재에 두면서도, 생각은 과거나 혹은 미래에 가 있습니다. 곧 과거의 불쾌했던 일에 대해 원망과 자책을 갖거나,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와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런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현재에 충실한 것, 달리 말하여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는 것이 행복과 밀접한 관련을 지닙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그 음악에 빠져 보고 그 음악을 듣는 일에 몰두하는 것, 산길을 가다가 길가에 핀 어떤 들꽃이 확 마음을 끌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들꽃과 만나는 일에 몰두하는 것, 바닷가에서 마침 노을을 보게 되면, 오로지 그 하늘을 보는 일에 몰두하고 노을에 자신이 온통 물들어 보는 것입니다.
아이가 들에서 놀고 있는데, 나비 한 마리가 지나가니 그 나비에게 마음이 확 쏠려서 아이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비를 따라갑니다. 설령 길을 잃는다 하더라도, 나비에 몰두하는 그런 상태를 “경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중에 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해서 결코 나비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의 무게중심이 길을 잃음에 놓여져 있는 것이고 그의 삶에 경이는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게중심이 나비 자체에 두어져 있어서 그는 수시로 경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몰두가 경이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대체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때는 몰두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월드컵 축구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될 때 쉽게 몰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만 몰두를 경험한다면, 삶에서 몰두의 폭이 좁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일에 몰두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츰 몰두하는 일의 폭을 넓혀 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몰두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원망과 자책이고, 미래의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나 죄책감에 매어살면 어떠한 일에도 몰두하기 어렵고 삶에서 경이를 맛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늘을 신뢰하고,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입니다. 하늘에 내맡김에서 순간에 몰두가 가능해집니다. 하늘에 내맡김, 이는 몰두를 통한 행복감의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현재를 사는 삶, 곧 순간에 몰두가 중요한데 대부분의 우리는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그래 더 많은 시간을 과거나 미래에 살게 됩니다. 현재를 한 순간도 살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과거나 미래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다가, 차츰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가야 합니다.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갈수록, 곧 순간에 몰두하는 시간이 늘어 가는 만큼, 우리의 행복감도 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설 명절을 맞아 주의 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새롭게 한해를 다짐하며 설계하시는 여러분에게 과거의 모든 불행과 원망과 탄식과 불평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얻은 자유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며 살아가는 기쁨이 가득 넘치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