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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내의 상처 치유하는 길 (사무엘하 13장 20-22절)
< 상처를 아물게 하는 보금자리 >
어떤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그분이 사는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평수가 크면 차 2대의 주차공간이 주어지고, 평수가 작으면 1대의 주차공간이 하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아파트에 사는 어떤 변호사는 2대의 주차공간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항상 주차선 가운데에 주차합니다. 경비가 말려도 자기 것인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민들이 그 변호사를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목사님의 아들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돌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변호사 차를 칼로 긁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으로는 "그러면 되겠니?"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옛날 혈기를 아들이 그대로 가진 모습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고 합니다. 대개 보면 부모의 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도 물려지고, 나쁜 것도 물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넉넉하면 자녀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랄 것이고,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은 자녀로 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본을 보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다녀 간 임병철 목사님 바로 앞집에 피터(Peter)라는 이태리 계통의 목사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성도가 15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고, 베스르셀러 작가이고, 뉴욕의 떠오르는 별처럼 목회를 잘 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임병철 목사님과 형제처럼 지내는데, 저도 1997년 미국에 갔을 때 그분과 함께 바비큐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피터 목사님의 가족 사랑은 대단합니다. 서양 목사님들은 '9 to 5'가 생활화되었습니다. 아침 9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합니다. 새벽기도도 없고, 심방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 목사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피터 목사님은 드물게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목사님입니다. 그처럼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면서도 한 달에 최소한 한번은 두 부부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고, 일년에 두 번은 꼭 두 부부만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터 목사님 친척들은 거의 마피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피터 목사님의 친척 장례식이 있어서 임병철 목사님도 갔는데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마피아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피아들은 인상도 아주 험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한 마피아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피아들도 가족을 참 아낀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밖에서는 총을 쏘고, 무섭게 싸워도 그들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피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자식을 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피아지만 가족의 연대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처럼 마피아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더욱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끔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름답게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각종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보금자리이지 서로 상처는 입히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 상처 입은 다윗의 가정 >
오늘 본문이 있는 사무엘하 13장에는 한 콩가루 집안이 나옵니다. 형제 사이에 강간도 벌어지고, 살인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콩가루 집안의 가장이 바로 다윗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의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 때문입니다. 그 당시 다윗은 이미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한 명을 더 원한 것입니다. 이 '하나 더' 혹은 '한번 더'가 인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칩니다. 간통 후에 다윗은 그 일을 은폐하려고 충신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그 뒤 다윗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됩니다. 첫 아들 암논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이 심히 분노했지만(21절),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제대로 벌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한을 품고, 이년 후에 계략을 꾸며 그의 이복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죽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왜 가정이 깨집니까? 통제(control)는 너무 많이 하고 영향력(influence)은 너무 적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통제는 가급적 적게 하고, 영향력은 많이 끼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도 서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 방법 >
오늘날 많은 가정들을 살펴보면 압살롬처럼 한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하고, 둘째, 잘못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셋째,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 내에서의 상처 치유를 위해서도 이와 같은 3가지와 함께 기도가 필요합니다.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이 일어날 때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잘못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용기이고 성숙함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르게 될 희망은 없습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 병은 더 커지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제가 여기가 아픕니다"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백이 없으면 용서도 없고, 치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약점을 보는데 자기만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치료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다!"라는 책 등으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척 콜슨(Chuck Colson)이 최근에 칼리 샌티(Carly Santi)라고 하는 젊은 소녀에 관해 쓴 글을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칼리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칼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수치심이 밀려왔고, 삶의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거의 1년간 말도 없이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한 기독교 캠프에 떠밀려 참석했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에 칼리는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아버지에게 감옥에서 진행되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간청을 듣고 그녀의 아버지 데니스 샌티(Dennis Santi)가 성경 공부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데니스는 면회를 온 딸 칼리에게 "네게 수치를 안겨 준 이 아빠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 가정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직한 자백은 인간 관계의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 상처 입히는 행동을 그쳐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입니다. 가정 내에 상처가 생겼으면 먼저 자신이 고칠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서서히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의 잘못을 꼭 고쳐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이 고쳐지기는커녕 배우자에게 더 상처만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낫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내 맘대로 할 거야!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폭발해!"하고 소리치면 남편이 겁나서 물러섭니까? 더 반발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상처만 입히게 되고, 아무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 문제는 더 꼬이고 악화됩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내의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어느 날 한 마디 합니다. "여보! 요새 사는 맛이 안나요!" 그처럼 작전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해 보십시오. 물론 그 방법을 너무 심하게 쓰면 남편까지 삶의 용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상 적절한 방법으로 우울증이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겁이 덜컹 나서 말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라도 열심히 해봐!" 그처럼 상처가 없는 방법을 써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하게 하면 부러지고, 상처만 입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아이들 교육에 훨씬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엄한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이 때리면 매의 효과도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한번도 때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데 그러느냐?"고 하면 꼼짝 못하고 어머니 말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강하게 우격다짐으로 남을 바꾸려고 하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는 또 상처를 부르고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고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사소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잘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이 커져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서부 시대에 햇필드 가(Hatfields)와 맥코이 가(McCoys)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돼지 한 마리가 누구의 돼지냐 하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싸움이 점차 커졌습니다. 12년 동안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싸웠습니다. 그 싸움으로 햇필드 가의 3명, 맥코이 가 7명, 외부 사람 2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양쪽 집안 중의 어느 누구도 돼지 한 마리가 12명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상처를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때로 아주 사소한 일에서 큰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잘못이라도 생각나면 그 잘못에서 과감히 돌아서고, 특히 잘못된 언어를 주의해야 합니다. 옛말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곱지 않은 말을 들어도 곱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그 애쓴 만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은 하루 속히 털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화해를 손을 내미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화해를 잘 받아들이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합니다. 남이 화해를 요청할 때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화해의 싹을 자르는 것이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더 잘못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기꺼이 용서하고, 기꺼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갈등을 풀려고 애써야 합니다. 갈등이 풀어지면 친밀성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지 않으면 더 비참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 갈등이 인생 전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글을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분이 작년에 캐나다의 앨곤퀸 주 공원(Algonquin Provincial Park)에 가서 카누를 타고 어떤 조그만 섬에 도착했는데, 공원 관리인들이 미친 듯이 구멍을 파고 호수의 물을 바께스로 퍼 넣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불을 끄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불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어디에서 불이 났느냐고 물었더니 나무 뿌리에서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표면 가까운 뿌리가 있는 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했는데, 그 불이 땅 아래에서 몇몇 나무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그것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공원 관리인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불이 났다는 것을 느끼는데, 만약 그 불을 끄지 않으면 그 불은 섬 전체를 태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가정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불붙은 화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감춘다고 감추지만 대개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만약 그것을 끄지 않으면 그것은 전 가정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뿌리에 붙은 불을 하루빨리 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문을 열고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고 해도, 옳고 틀린 것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겉으로는 가장 성숙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장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정의감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덮을 수 있어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기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이론적인 무장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족을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성품이 부드럽게 됩니다. 거기에서 문제 해결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상처 치유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한때 전투적이 되고, 표정이 근엄하게 되고, 목소리가 쉰 소리가 되고, 눈빛이 날카롭게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의 표시로 오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야 하는데, 비정상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쉰 소리가 더 성령 충만한 소리라고 여겨서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를 일부터 망가뜨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심이 충만한 것이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고 소리지르고, 식당에 15명이 와서 10인분만 시키고, 악을 쓰고 기도한 후에 계속 밑반찬을 달라고 해서 원가보다 더 먹어치우는 성령 충만한 교인들을 보면서, 그분은 고등학교 때에 "주님! 저는 성령을 주셔도 충만하게는 주지 마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나오는 말마다 "예수!"가 안 들어간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입혀 놓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래서 뒤끝이 없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뒤끝이 없는 분들이 무섭습니다. 자신이야 상처를 입혔으니까 뒤끝이 없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얼마나 뒤끝이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친구들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이웃들이 혀를 내두르고, 심지어는 가족조차 외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부부관계가 좋고, 상하관계를 잘 하고, 고부관계, 친구관계, 교회 내의 성도관계를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내게 이런 은사가 있느냐?"가 아니라 "나의 인간관계가 아름다우냐?"에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2만개의 부속품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무쇠 덩어리들입니다. 그래도 아무 마찰 없이 굴러가는 이유는 윤활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관계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때 우리의 각종 상처는 급속히 치유될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그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식구들에게 자신의 한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바로 명절 때입니다. 이때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섭섭한 일을 당해도 믿는 사람답게 결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을 생각만 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지만 줄 생각을 하면 별로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과 모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이번 추석을 상처를 입히는 명절이 아니라 상처를 회복하는 명절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그 두 가지만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고, 이번 명절을 가정의 각종 상처가 치유되는 뜻깊은 명절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