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절과 감사   (신명기 16:13~17)
  
오늘은 추석날 입니다. 금년에는 공교롭게도 추석날과 주일날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이 명절날은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소중하게 지키는 3대 명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애급으로부터 430년 만에 해방을 맞는 유월절이고 또 하나는 여름 곡식을 추수하고 드리는 칠칠절 즉 맥추절이고 또 가을에 곡식을 거두면서 드렸던 추수감사절 즉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 년에 세 번 이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명절에는 모든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여 축제로서의 명절을 지켰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 명절을 반드시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명절은 나름대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명절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감 사


본문을 보면 “너희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라”(16)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고 복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드리라”(17)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명절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추석명절은 하늘에 감사하는 뜻을 지닌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농부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하늘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농사는 절대적으로 하늘의 도움과 은혜를 입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비가 오질 않으면 먼저 하늘에 기우제를 드렸습니다. 농사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에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농부들의 순박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농사도 삶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는 불효자가 동네에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다스렸습니다. 그 불효자 때문에 하늘로부터 노여움을 받지 않을까 해서 두려웠던 것입니다. 동네에 살인사건이라도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회개의 제사였고 용서를 비는 제사였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이렇게 순박했고 순전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늘을 향한 앙천사상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시 65: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속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는 농사의 절대적인 힘은 하늘이 주는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절대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첫 곡식을 거두게 되면 반드시 먼저 하늘에 제물로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여름내 수고해서 얻은 열매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추석명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민족의 추석명절은 뜻이 있고 의미가 있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원형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 그것이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권장하시는 삶이고 바라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지각이 없으면 감사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각이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꾀는 있고 요령은 많은데 덕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 결과 많이 누리고 소유하고 살아가면서도 감사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도리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엡 5:19)고 했습니다. 이 추석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 속


본문 14절을 보면 “절기를 지킬 때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고아들까지 함께 해서 즐겁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가정의 결속을 다지라는 말씀이고 이웃과 민족의 결속도 다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결속이 이루어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소망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하신 최대 관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가정의 건강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가장 먼저 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건강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배려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가정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결속을 유지하는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범법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해치는 불경건한 요소를 제거하라고 성경에서 누차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이 건강하고 신성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고 세상이 흔들리게 됩니다. 가정이 복잡하고 갈등하고 불화해 보십시오. 그러면 정신이 혼란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의욕이 저하되고 기쁨이나 감사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 신앙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영적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은 사람의 몸으로 말하자면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이 심장이 건강하면 온 몸이 건강하듯이 가정이 건강하면 살아가다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은 가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안정되고 건강하고 중심역할을 잘 하게 되면 우선 삶이 건강해 집니다. 그리고 신앙이 건강해 집니다.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정들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깊으신 배려를 하고 계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의 내용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한 가지 깊은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다 잘 살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문제없이 살고 결혼하면 모두 아이를 낳고 모두 성격이 좋고 조화를 이루어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 보면 결혼을 했는데도 아이가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아들을 낳고 딸을 낳으면 참 좋을 것인데 그렇게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보면 아이가 없는 가정이 있고 있어도 딸만 낳는 가정이 있고 아들만 낳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마음에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집은 딸이 일곱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은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이름이 팔남이 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한 가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팔남이의 아버지가 참 성자 같은 남자라는 점입니다. 그 아버지가 성자 같으니까 그 가정이 안정되게 유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자연, 우주, 생물 인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똑같은 모습으로 지으시고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아들딸 고루 낳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녀가 없는 가정이 있고 어느 가정은 넘치는 가정이 있고 어느 가정은 부족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가정은 문제가 없지만 부족한 집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딸 부잣집의 남자가 성자였으니 인내하는 마음으로 딸을 일곱을 낳았지 괴팍한 남자였으면 셋쯤 낳다가 밖에서 아들을 낳아가지고 들어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두 해 아이를 기다려 보다가 낳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딸 부잣집, 아이가 없는 집 남편들은 대부분 마음씨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니고 성격이 괴팍한 남자에게 딸만 일곱을 낳게 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아이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가정들이 깨지고 불화하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조화를 위해서 배려하시는 섭리일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목회하다 보니까 보고 깨닫고 발견하게 된 통계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명절을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도 같은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다 명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명절을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좋은 날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 간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명절날은 전국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날입니다. 아마 명절날이 없으면 온 가족이 함께 모인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 명절날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여 결속이 느슨하던 가정을 결속시키고 다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가족애를 결속시키는 날이 명절날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절을 잘 유용해야 합니다. 가정건강을 위해서 이 날을 유념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떡을 만들어 나누고 흩어져 살며 소원했던 관계를 다져야 하고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만일 오늘 같이 개인주의화 된 시대에 이 명절날이라도 없어 보십시오. 얼마나 이 세상이 삭막해져 가겠습니까. 오늘은 그러잖아도 삭막해져가는 시대입니다. 강원도의 어느 콘도에 서울의 한 부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금년 명절에는 콘도에서 제사를 드릴 테니까 상을 준비해 주십시오.” 그런데 전화 받은 분의 실수로 준비를 못했습니다. 명절날 콘도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왔던 그 부자는 그만 호텔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삶의 고유한 의미가 이렇게 자꾸만 퇴색해 가는 시대입니다. 공동체가 자꾸만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건강성도 그 의미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 년에 세 차례 명절날에 모이라고 강조하신 것은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이되 너와 자녀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도 다 모여 이 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여 명절을 보내는 동안 히브리인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확인하고 결속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섭리입니다. 추석 절은 그런 의미로 지켜야 합니다. 명절은 먹고 노는 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날입니다.


결 산


추석은 결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명절입니다. 추석은 가을의 중심이고 상징입니다. 매년 추석 때가 되면 모든 식물들이 보기 좋게 익어갑니다. 그것은 추석이 결산의 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석 절은 결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추석 때만 되면 가는 곳 마다 풍성하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풍성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시 65:13절을 보면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며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하고 찬양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된 평화의 모습입니다. 전쟁 시나 국가에 재난이 일어나면 처량하고 마음이 불편한 날이 명절날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 받으며 살아갈 때 명절날이 되면 서로 모여 한탄하고 눈물 흘리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나 전쟁이나 재난을 당한 민족에게는 명절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책망하실 때는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서 안식일을 빼앗고 명절을 빼앗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은 평화 시에 누리는 날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 65편의 말씀은 천국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장에는 양 떼로 옷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으로 덮였으며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며 또 노래하나이다.”

그래서 추석 때는 한 가지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결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실한 모습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까. 엊그제 시골을 갔다 오는데 길옆에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환상적이었습니다. 탐스러운 사과들이 열렸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보기만 해도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결실한 모습은 그렇게 보기에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고 누리는 과수원 주인은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말 못하는 식물들도 저렇게 익어가고 때가 되니까 열매로서 자기를 나타내는데 우리 신앙인들도 저렇게 영적으로 익어가고 성숙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익어가고 성숙해 가는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좋고 행복한데 우리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숙하고 익어가는 식물들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습니다. 자식들이 커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성숙한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고 기쁘고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니 반대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은 보기에 얼마나 흉하겠습니까. 그 모습은 보기에도 흉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해서 보는 사람들이나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결실한 모습은 자신도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행복한 일입니다. 추석 절은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추석명절은 결실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명절입니다. 흉년이 들고 농사가 피폐한 해의 추석 절은 모두에게 시름만 안겨주는 명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추석 절은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두가 함께 모여 흩어졌던 구심점을 회복하고 성숙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 보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명절을 아주 의미 있게 보내면서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일조해야 합니다. 그것이 명절이 지니는 뜻이고 의미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