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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1:1-9
성도 여러분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좋은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비하고 준비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임하시면서 주님의 통치는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을 구약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지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같이 참으로 주님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가 우리에게 이루어 졌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6세기경의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남조 유다 사람으로 웃시야 왕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어 남 유다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어려운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과 나아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선지자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임하여서 의로 통치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통치는 온 우주적이며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스도가 이새의 줄기에서 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윗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유다의 왕위를 이어오고 있는데 왜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고 즉 왕족이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날 것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본래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 사는 농부였습니다. 이 미천한 신분이 그리스도가 가지실 신분임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베들레헴 마구간에 나셨고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아니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 승천하시고 그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그리스도가 미천한 신분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긴장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자칫 그를 왕으로 영접하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시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 당장에 무슨 큰 기적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복음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아주 미천하고 세미하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예리하게 보지 않으면 믿을 때와 믿지 않을 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어떻게 일하셨는지도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사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위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놀라운 예언입니다. 구약의 성령의 임하심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직분을 위하여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나 왕들도 성령의 사역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께 적용되는 성령의 사역의 명칭입니다.
① “지혜와 총명”은 왕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들입니다. 지혜는 외적인 분별력을 말하며, 총명은 내적인 통찰력을 말합니다.
② “모략과 재능” 은 9:6에서는 “모사”와 “전능”으로 나와 있습니다. 모략은 정책 수립과 입안, 전쟁 계획의 작성등 포괄적인 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힘을 뜻하며, 재능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영웅적인 힘을 뜻합니다.
③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 이 둘은 믿음의 삶을 사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지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하며, 여호와 경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두려움과 복종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을 봅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우리들의 평화의 왕이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외모만을 보고 판단하다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대접하지 못하고 그를 천대하거나 소홀히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 “(사11:3-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리스도의 의로운 통치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으로 원칙을 삼으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누구든지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며, 정직에 입각한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조금 정직한 대통령이 선출되니까 과거의 부정 부패한 대통령들이 모두 감옥에 가 있습니다. 하물며 공의와 정직으로 다스리시는 왕이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시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 받으며 축복 받을 수 있는 삶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며,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자들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역사 가운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11:6-9 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입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평화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평화는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것은 그리스도가 임하시면서 부터 그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의 통치의 모습은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나라가 임하기 위하여서는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선제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② 그리고 이어서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믿는 자들에게 낙원의 빛이 비추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땅에서는 맛보지 못할 참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께서 친히 누리셨습니다.
“(막4:35-39)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7:55-60)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얼굴은 마음의 창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은 얼굴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그의 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는 자들의 이를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정 반대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하십니다. 증오와 살인과 시기와 모함과 오해로 가득찬 우리의 심령을 깨끗이 주님의 보혈의 피로 씻어 내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살아가는 자에게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약 7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약 시대의 사람이나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나 모두가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공의로 다스리시고 정직과 성실로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공의로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포청천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참으로 공의로 다스리는 한 판관이 나옵니다. 이 판관은 재판할 때에 지위의 높고 낮음을 상관하지 않고 법대로 심의합니다. 그러기에 죄를 범한 죄인들은 그 누구든지 무서워하며, 반대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이 명 판관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바로 앞에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내어진 선지자입니다.
세례요한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마3:5-8)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란 말로만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생각만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만 고쳐먹는다는 것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의견에서 또 다른 의견으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회개란 먼저 생각을 바꾸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며, 더 나아가서는 삶 자체가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① 심판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질 것이며, 양과 염소가 분리될 것입니다.
②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불의와 죄가 지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고 다스리시는 공의로운 나라이며, 평화의 나라입니다.
나의 죄악된 모습일 슬퍼하며, 진정한 자복의 고백과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