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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0:9-16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나가면 가끔 애교 있는 차를 만나게 됩니다. 차 뒤 유리에 '초보운전' 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차들입니다. 어떤 때는 ‘진짜 초보 운전'이라고 썼는가 하면 '병아리'를 붙을 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차들은 대게 속도가 느립니다. 뒤를 따라 가노라면 첫 걸음마를 하는 아이들 같아서 위태위태합니다.
그래도 차를 처음 운전하는 사람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 나도 차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였다는 생각이 들고 어디든 자유스럽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굉장한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시간입니다. 평생 처음으로 내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땀이 버쩍 버쩍 납니다. 긴장이 되어 입이 바짝 마르고 아찔아찔하기도 합니다. 핸들을 힘껏 잡고 힘을 막 씁니다. 언덕을 오를 때도 내가 힘을 쓰는 것이 아닌데 힘을 막 씁니다. 언덕을 내려 갈 때는 다리가 후들 후둘 떨립니다. 다른 차에 추월을 당하던지 추월을 할 때는 가슴이 마구 뛰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초보 운전자는 겸손해 집니다. 돈 있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 나이가 많고 작고간에 모두 겸손해 집니다.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차를 보면 다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운전 면허 시험에서도 몇 번 떨어지면 합격한 사람이 아주 훌륭해 뵙니다. 겸손해 진 것입니다. 이 병아리 운전자들이 이렇듯 겸손하여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기 때문에 사고가 적습니다. 보험회사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대체로 사고가 많이 나는 시기는 운전 면허를 따고 차를 운전한지 1년에서 1년 반 사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운전에 조금 자신이 붙는 시기입니다. 운전에 한한 한 조금 교만해 졌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운전자는 사고를 내지 않지만 교만한 사람은 사고를 냅니다.
풍자 소설로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는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는 아주 유우모가 풍부했습니다. 어느 날 부유하게 사는 한 부인이 와서 상담을 청했습니다. 그 분은 "목사님이 보시기에 제가 얼마나 예쁜 것 같습니까?" 소문에 그 부인은 자기의 미모에 너무 자신이 만만해서 아침에 얼굴을 만지는데 두시간씩 거울 앞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 부인은 또 묻기를 "이런 것도 죄가 되나요" 합니다. 스위프트 목사님은 "내 잘난 얼굴을 들어다 보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다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한 초대교회의 대표자 베드로는 엄청난 감격을 안고 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큰 권세를 얻었습니다. 엄청난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지는 전혀 예측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두렵기 만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큰 기쁨이 있는데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큰 능력을 받았는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그 앞에 있습니다. 그 세계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 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였고 주님의 죽음을 보았고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유무상통을 하고 함께 깊은 사랑을 나누고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성경에 말씀하신 데로 느끼고 생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살았으며 주님의 말씀 따라 전도하기에 전심 전력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봉사하고 구제도하고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교에 힘을 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평안하고 순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갖가지 장애가 따랐습니다. 예측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옛 사람, 옛 습관들이 그들을 괴롭혔으며 새 사람이 된 그들에게 옛 생각들이 늘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제 새 사람이 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새 사람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따라 주지도 않습니다. 물질 생활도 나아지는 것이 없고, 고생도 면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불안 요소가 가시지를 않고 사회적으로도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들의 변화를 세상을 알아주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음과 세상살이 사이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디 방탕한 사람입니다. 무려 13년이나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다 어느 날 극적으로 변화가 되어 철저히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성자가 됩니다. 많은 사람 존경을 받습니다. 그는 어느 날 그가 옛날에 놀던 유흥가를 지나가게 되였습니다. 그를 알아 본 여자들이 뛰어 나와 반기면서 "놀다 가세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 무답, 무반응입니다. 여자들은 그를 보고 입을 삐쭉이면서 잘났느니, 병신이 되였느니 별별 소리를 다 합니다. 그는 온갖 욕설과 비난을 받아 가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나는 옛 날의 내가 아니요.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였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사람이 되였다고 해서 세상이 달아 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새 사람이 되었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세계관이 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새롭게 되여야 합니다. 이것까지 변화가 되여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였으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완전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씀하신 바가 이 점입니다. 베드로는 새 사람이 되였으되 몸에 벤 풍속, 제도, 윤리, 가치관, 편협한 사상들까지 변화가 되여야 합니다.
그 개혁이 문제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올 포트는 자신의 논문 가운데 '편견의 본질'을 말한바가 있습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 편견을 둘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그 하나는 자신을 장당 화하고자 하는데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위와 욕구에 의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잘난 체 하려는 데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비난을 하면서 잘난 체 하려는 그 사람이야말로 못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므로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잘못 되였다고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편견을 가지게 되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소견머리 좁은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을 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번에 3000명이나 회개를 시키고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탄 없이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그는 자신을 죽이려하는 종교의 지도자들 앞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여유도 있고
담력도 있고 능력도 있었지만 편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은 문화적 편견, 종교적 편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모두 고넬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입니다. 유대 나라는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사람들이 원수입니다. 원수를 살리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드리고 그들이 살아나도록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속 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고넬료는 로마의 군인이고 장교고 대장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사람 때문에 유대인들은 꼼짝은 할 수 없습니다.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사람 집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안됩니다. 식사도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함께 밤을 지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서슴없이 그 사람 집에를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마 장교인 고넬료는 로마 사람의 체통, 그리고 장교의 체통을 다 버리고 온 집안 사람들과 함께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종교적 습관까지 버리고 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베드로는 담대히 이 사실을 공회에서 말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 15:7]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행 15:8]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9]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감정을 초월하고 종교, 민족, 원수된 것까지 초월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1. 그들은 두 사람이 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를 합니다.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경건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3번 기도 시간에 기도를 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공통점이 별로 없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 갈릴리 어부 출신의 예수님의 제자와 로마 귀족 출신의 백부장, 모든 면에서 전혀 공통점이 없는 주 사람입니다. 그러나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이 기도했다는 것이 같은 점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고 로마인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두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교제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 관계도 없고 인연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만나게 하셔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편견, 잘못된 오해를 벗어버리고 하나가 되려면 함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속에 대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중매로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만나는 것이 편견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사람의 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나게 하심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서로 만나 상대를 공격하고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고 상대의 고집을 꺾으려고 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드로의 만남은 보통 만남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만난 만남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목사를 만나려 하니 옆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만큼 기도하고 만나서 말하라고 했답니다. 참으로 말 잘했습니다.
2. 두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청하라 하니 사람을 보내 청하고, 응하라 하니 그 청함에 응했습니다. 가라하니 가고 오라 하니 왔습니다. 고넬료는 고백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신 것을 다 전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다 함께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뜻에 순종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유대인이던, 로마인이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편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고집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셔도 나는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약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하십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람을 피웁니다. 하나님은 다시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호 3:1]" 몸값을 지불하고 그 여자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호 3:3]"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몹시도 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죄를 지은 당신 백성 사랑함이 그와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가 더러운 여자를 사랑하기 힘든 것처럼 나도 나를 배신한 내 백성을 사랑하기가 힘들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죄를 지어 하나님을 배신했지만 배신한 그 백성을 버리시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좋기에 버리시지를 못하시고 사랑을 계속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하고 죽어 버리기를 바랐습니다. 민족적이고 종교적이며 감정적인 원인이 그렇게 요나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그 성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다 하셨으면 정한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잘 못 평가하고 의심을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여 진 것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요, 당신이 그렇게 정결하게 된 것도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함이요 당신이 그렇게 깨끗하게 살려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더럽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정결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이 점에서 서로 사랑하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는 깨끗이 산다 하면서 다른 사람을 의심하면 그것은 자기 기만적인 교만입니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산다고 생각을 하면서, 정직히 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정직히 살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민족 속에 교만해 진 것입니다. 본문 35에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5]"라고 말씀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냐 이방인이냐 배웠느냐, 부자냐 가난하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보면 다 도적질을 했다하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보고 무식하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편견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다 받아 주십니다. 집단적 편견, 집단적 이기주의, 종교적, 사회 계층적, 생활의 편견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들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평생토록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교회당도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결심을 하고 선배 선교사에게 인사를 하려 갔습니다. "저는 제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무척 힘들고 어려울 것일세" "욕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겠습니다." "조롱할 것이네" "돌을 던지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하렵니다" "돌을 던질 것이네" "그러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겠습니다" "칼로 찌를 것일세" "죽지 않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겠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지" 그 때 그는 아주 중요한 대답을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겠습니다" 그의 결심이 이 같이 단호한 것을 보고야 그 선배는 고향에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고향에 돌아와 그 마음 그 정신으로 복음은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사랑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동기가 되였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나의 과거에, 나의 편견에 매여 살아서는 안됩니다. 나의 본질, 나의 이야기, 주위 사람들의 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과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과 나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편견은 있을 수 없습니다. 편견의 수건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헬라인이나 수구디아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 [롬 14: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저를 생각합시다. 여기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습니다. 완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맙시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