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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8:30-35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 이웃 경쟁자들과의 싸움, 날씨 환경 등과의 싸움이요 질병과 싸움 다른 나라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지면 영원히 망합니다.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혼자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하는 아합 왕과 이세벨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450명과 갈멜 산에서 싸움을 하여야 했습니다. 지는 날에는 죽는 무서운 싸움이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믿음으로 사움에 임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도와 우리 대신 싸워 주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가까이 오게 함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30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나 간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므로 우리와 사이가 먼 분이 아니고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지내야 하고 또한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과 가까이 지낼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올 때도 될 수 있으면 강단 앞으로 가까이 오면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앞좌석이 금자리라고 보통 말 들 합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함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30하)
제단이 무너진 이유는 우상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제단이 무너진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항로를 이탈한 비행기는 격추를 당하게 되고 괘도를 이탈한 열차는 전복되게 되고 차선을 이탈한 자동차는 충돌 하게 되고 해로를 이탈한 배들은 암초에 부딪히게 됩니다.
엘리야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제단부터 보수하였습니다.
방치된 주님의 제단을 바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으뜸"<골1:18> 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분을 향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왕으로 좌정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제단은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허물어진 제단의 수축은 신앙생활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수 조건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신의 묵묵부답으로 크게 실망한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보수작업에 동원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문제가 바알 경배에 있다고 목청을 높여 외치는 것보다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는 일에 직접 가담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허물어진 제단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게 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양심을 일깨우고 가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똑똑히 알도록 합니다.
제단 수축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교제와 경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제단의수축이 없으면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단의 보수작업에 착수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바알 신에게 무엇인가 희망을 걸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제단을 무너진 채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의 무능력을 목격하고는 시선을 여호와께로 돌렸습니다.
바알의 제단으로 가까이 나아가면 그만큼 여호와의 제단에서 멀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너져 있어야 할 바알의 제단은 건재한 반면에 서 있어야 할 여호와의 제단이 붕괴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도 이와 동일할 수 있습니다. 자주 허물어지는 기도의 제단, 넘어진 지 오래되는 말씀의 제단, 방치된 봉사의 제단들이 교회와 개인의 삶 속에 즐비하게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에게로 더 기울어져 있습니까? 우리의 제단은 지금 시급한 보수작업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상을 섬기고 세상에 몰두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전은 더럽혀졌고 허물어졌습니다. 제단의 수축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응답 되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되 온전히 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무엇을 빠뜨리고 순종하였는지 한번 뒤돌아 봐야 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고 있는지? 기도 생활은 제대로하였는지?
말씀은 제대로 듣고 순종하였는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했는지?
봉사 생활은 충성스럽게 했는지? 어느 한군데만 소홀해도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적은 부분에까지 충실해야 합니다.
그 동안 아합 왕과 이세벨의 후원을 받은 바알 선지자 들이 득세하여 산에 바알 신당은 멋있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단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도 없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없어서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한 주간 동안 세상사는 동안 흐트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회개할 것 회개하고 준비하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한 나라 대통령을 만날 때도 준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뵈는 성전에 나올 때 집에서부터 준비하고 교회에도 예배 전에 나와서 준비 기도하고 예배에 임하여야 주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열두지파에 하나씩 취한 돌을 합축함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31)
엘리야는 12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12지파가 다 포함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북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선지자로서 바알을 대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부 유다까지 포함된 언약의 백성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탄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쪽과 북쪽의 정치적 분열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언약의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일체의 편견이나 차등의식을 버리고 화해와 연합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단을 쌓음
왕상18: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제단을 쌓거나 희생제물을 바치거나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알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피상적으로 보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에 해당하는 모든 세속 종교들에는 대속의 가르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속 종교에는 십자가의 구원을 약속해 주는 언약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속죄가 있으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죄가 용서되고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러나 바알 종교의 제단에서는 동일한 송아지 번제가 올려지고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는 간절한 기도가 있을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며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습니다. 바알 신은 대속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의지하고 제단으로 나아갑니까?
십자가의 대속을 믿지 않는 자는 바알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와 같습니다. 그런 기도는 비록 피땀이 맺히는 통절한 간구일지라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십자가의 구속을 약속하신 언약을 믿는 자들에게만 내려지는 신령한 구원의 은총입니다.
엘리야 한 사람 대 바알 선지자는 450명이었습니다(22절)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것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불레셋은 장군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단을 성결케 하는 엘리야
도랑을 만들어 분리함
왕상18:32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이는 세상과 분리되는 관계를 예표 한다고 하겠습니다.
성도는 분리된 백성입니다. 애굽, 죄, 세속과 분리 됩니다.
물을 붓게 함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33-35)
엘리야는 제단 위에 제물을 벌여놓고 또 그 위에 많은 물까지 들어부었습니다. 이것은 만용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전시였습니다. 그의 신앙행위는 바알 선지자들의 처신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제단 둘레에서 미친 듯이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고 광란의 춤을 추면서 예언을 외치고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였습니다. 바알은 경배 자들의 광신적 열성과 각종 괴이한 의식들이 동원되어야만 겨우 움직일까 말까하는 신이었나 봅니다.
그는 신도들이 흔들어 깨워야 했고 끊임없이 자극을 주어야만 겨우 반응을 보일 정도의 극히 피동적이고 강력한 우상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의 피땀에 감동을 받거나 그들의 열의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제단위에 물을 퍼부은 행위는 하나님의 기적이 잘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렵게 만드는 처사였습니다. 그래서 상식적인 판단으로 보면 설혹 불이 하늘에서 내리더라도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괴어 있기 때문에 점화된 불이 금방 꺼질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의 물 붓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참되게 드러나게 하는 귀한 사역이었습니다.
지금 싸움의 내용은 자기가 믿는 신에게 열심히 기도해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신이요 살아 있는 신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불이 조금만 내려도 제물이 잘 타도록 해야 할 터인데 엘리사는 제물이나 그 밑에 장작이나 땅도 물로 흠뻑 적셨습니다. 이렇게 해도 하나님은 강한 불을 내려 주시어 다 태워 버릴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태양신인 바알신은 태양의 빛과 열을 내려 제물을 태울 줄 알았는데 전혀 응답이 없었지만 보이지 않고 살아 계시지 않던 하나님은 불로서 응답하시어 번제물과 나무와 도랑물까지도 다 핥으시듯 강한 불을 내리어 태워 버렸습니다.
사람 보기에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도 그랬고 요단강이 갈라질 때도 모멕 거두는 장마철에 요단강 물이 범람할 때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그때가 하나님이 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막 9: 2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이 내려서 응답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적은 불로도 태움 받을 수 있도록 물기 없도록 해야 하는데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었고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이 정도의 물 묻은 제물과 물을 다 태울 불을 내려 주실 것을 믿었고 주위 사람들 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여 사람이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