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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8-16
엘리야가 어느 정도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가뭄의 영향으로 시내가 말라 마실 물이 없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목을 축여 주던 그 시내는 얼마 후에 말라 버렸습니다(7절). 우리는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서 섭리 안에서 종들에 대해 한 가지 문을 닫으실 때, 그분은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확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위로가 들어오는 통로가 점차 좁아지고 시냇물도 조금씩 말라 들어가는 것을 보아야 함은 분명 하나의 시련일 것입니다.
세상적 번영이라는 시냇물이 말라 들어가는 것도 그런 시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과신이라고 하는 그토록 아끼던 시냇물이 말라 들어갈 때 우리는 얼마나 극한의 절망감을 느끼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의 곤경은 곧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9절).
사르밧은 이세벨의 고향인 두로와 시돈 중간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로 불리우는데(눅 4:26) 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7). 그런데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사르밧이란 녹이는 집이란 의미가 있어 격렬한 시련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는 불의 선지자는 용광로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기근이 닥쳐 메마른 땅을 사백 리나 여행해야 했던 그 시간은 엘리야에게 충분한 믿음에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신약의 엘리야인 요한도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줄 것이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이다. 이 점은 마치 바로(Pharaoh)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받은 모세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이다(출 2:10).
하나님은 그 곳에서 한 과부가 너를 공궤하리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에게서 찾아졌다는 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준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입니다
(고전 1:26-3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
엘리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이방 지역인 사르밧에 가게 됩니다.
우리는 시력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의지해서 걷습니다. 엘리야는 비밀한 시냇가에서 오래 숨어 지났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나 그의 인내심 양편 모두에 대한 하나의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공을 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기다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거룩한 부름이 있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갈멜의 그 시험하시는 시련에 맞설 수 있던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믿음은 귀한 금처럼 정련의 불길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또 다른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사르밧에 도착한 엘리야는 그 곳에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곳도 가뭄의 피해가 컸습니다. 따라서 가장 비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과부들이었습니다.
시냇물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축복의 집을 마련해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힘의 산들이 우리를 떠나가고 우리의 육체에 속한 소망의 언덕들이 없어질 때에도 주님의 친절하심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그분의 화평의 약속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엘리야는 이러한 과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물을...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번째 시험(test)이었다.
청컨대...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 앞서의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란이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B hr).
먼저...그 후에 - 장차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에의 두려움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개재된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이 과부는 한번 먹을 분량의 가루와 기름만을 지닌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의 사정을 듣고선 그녀의 절박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먼저 자기에게 음식을 먹게 하면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집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통의 기루가...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본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막 6:41-43).
하나님께서는 사르밧의 과부에게 명하여 그를 공궤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9절). 아마도 선지자는 그 여자가 기근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을 만큼 부유한 과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생각처럼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명'한 것이 실패치 아니했던 것처럼 과부에 대한 그분의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 가난한 과부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시돈 지방의 사르밧 여인은 어떤 방법으로든 예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넬료처럼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컨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사전 예고를 지니고 있는 이 여인은 지금 굶주림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녀의 이성이 생각할 수 있는 한 생각해 보았자 그녀와 죽음 사이에는 '가루 한 움큼'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마지막 가루를 요리하기 위해 땔나무를 모으러 나갔습니다(10-12절). 그녀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명령이 거짓임을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와 비슷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엘리야는 자기가 기숙할 수 있는 부유한 과부를 기대하면서 그녀의 집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그녀와 마주쳤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그녀에게 '떡 한 조각'을 요청하고 그가 얻은 대답은 그녀가 자신과 아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은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전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이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롬 4:20-22)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는 먼저 그녀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취하겠다고 함으로써,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함으로써 거룩한 약속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과부의 가루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축복을 갖고 계심을 알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14, 15절). 선지자 그녀에게 기근이 끝날 때까지 통의 가루는 물론이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말씀을 믿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 움큼의 가루를 그녀의 주린 영혼과 함께 엘리야에게 바쳤습니다. 그녀는 사실상 하나님의 명령 앞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며 그분의 약속 앞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일찍이 그러한 행동, 그러한 소망에 대한 선례가 있었던 적도 없고 누군가의 본보기를 보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에 대한 믿음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는 바닥이 나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했습니다(16절).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 끼분의 양식으로 엘리야를 정성껏 대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도 신실하게 이행되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말한 대로 사르밧 과부의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뭄 속에서도 이 여인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밀가루와 기름을 풍족하게 공급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적은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뭄의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날 동안 그들은 기적과 같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떡을 먹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통의 바닥에 가루가 있는 한은 그들은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는 그분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는 말씀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전적으로 의지합시다. 사르밧 과부가 한 움큼의 밀가루에 생명을 부지하다가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에 기꺼이 주의 종을 공궤하였던 것처럼 주를 위해 헌신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흔들어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