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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 목사 (막 4:35-41)
사람은 많습니다 만은, 모든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사람은 환경 지향적 인간입니다. 이것을 아더-오리엔테이션(Other-orientation) 이라고 말합니다.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주도되고, 종속되어 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지식과 자기 경험 지향적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셀프-오리엔테이션(Self-orientation)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에 의해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가 주도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앙 지향적 인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두고 페이뜨-오리엔테이션(Faith-orientation) 모든 것을 신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는, 그리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면,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특별히 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자기도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금 이미 습관화되고, 문화화 되고, 성품화 되고, 체질화까지 돼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어느 세계에 있는 지를 모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행과 불행,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환경에서 찾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좀 칭찬해주면 힘이 솟아오르고, 조금 어려운 말을 들으면 그날로 기가 아주 팍 죽어버리고 맙니다. 기쁨도 슬픔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서 항상 빌려오고 있습니다. 웃는 사람 속에 웃습니다. 우는 사람 속에 웁니다. 칭찬 들으면 그런 대로 괜찮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받으면 또 미움받으면 미워합니다. 완전히 주변 환경에 따라서 내가 좌우되고 종속되고 끌려가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27장 11절 이하에 보면은 여기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이 잠깐 나옵니다. 미항을 떠난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이 배가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순풍을 만났습니다. 아주 바람이 잘,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줄 때 배가 가면서 저들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득의한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미래도 밝게 전망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얼마 안 가서 또 풍랑이 일어나니까 이젠 또 죽느니 사느니 이건 누구 책임이냐 원망이 많습니다. 좀더 풍랑이 거세지니까 아주 절망하고 맙니다. 그 외적환경에 따라서 좋아졌다 나빠졌다, 행복했다 불행했다, 소망을 생각했다가 또 절망했다가, 이래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또 소유도 그렇습니다. 소유라고 하는 것, 사실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의 사는 것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했는데 정말로 뭐 소유가 꼭 있다고 행복하고 없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우리가 경험하고 살면서도 그렇지를 못해요.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하고, 철저하게 환경 지향적 그런 인간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거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 자신이 중요하고, 내 진실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평판에 따라서 웃고 울고 살고 죽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또 중심합니다. 그래서 자기경험 자기 지식이 자기를 주도합니다. 그래서 경험 외의 일은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합니다. 이미 경험한 것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과거에 경험한 바에 의해서 잘못됐다 생각하는 일이라면 앞으로도 잘못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과거 지식, 과거 경험에 뿌리를 두고 과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못하는 건 다 못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미련한 생각입니까. 내 능력 내 지식 내 경험 거기에 집착하고 그 이상의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철저하게 자기 주도적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은 어찌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 같은 그런 내용이 나타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배가 있습니다. 몇 척이 있는데, 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다. 여기에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중에 주동적인 분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런 중요한 사람들이 다 직업이 어부입니다. 한평생 이 바다에서 물고기 잡아 살아온 사람들이요. 이 바다에 익숙합니다. 그 바다가 가보시는 대로 넓직하지도 않아요. 바다라고 하지만 호수입니다. 아주 이 속에서 잔뼈가 굵었고 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요,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는 이 사람들이 풍랑이 좀 일어났다고 해서 아주 절망을 합니다. 이젠 죽었다,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벌벌 떨고 있고요.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전직이 어부가 아닙니다. 목수입니다. 바다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바다를 모르는 예수님은 여기서 편안하게 고물에서 베게하고 주무셨다는 얘기입니다. 이 풍랑 속에 고요함을 찾고 계셨어요. 이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은 죽는다고 야단이고 바다를 모르는 사람은 편안하게 자고 있더라구요.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지 않습니까?
왜 그랬을 거 같습니까. 제자들은 생각합니다. 그 동안 바람과 싸워본 일도 많고 바람에 대한 지식도 있고, 풍랑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경험도 있습니다 만은 오늘 같은 이 사건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런 물결은 본 일이 없어요. 지난날에도 풍랑을 거슬러 가며 이 바다를 건너간 일도 있었지만 오늘 풍랑은 예사롭지 않아요. 이건 첫 경험이요. 이건 처음 보는 일이요. 요새 뭐 좀 춥다고 해서 뭐 몇십년 만에 춥고 뭐 50년만에 뭐……. 여러분 아무리 그래봐도 그건 새것이 아니에요. 50년 전에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새 경험이 아니에요. 역사에 없던 일이다 이러면 뭐 깜짝 놀라야겠지만 뭐 몇십 년만에 있었던 일이 오늘 또 있는 거에요. 뭐 이거 뭐 그냥은 지금 50년만에 있었던 추위라고 해요. 그리고는 뭐 어렵다고 그러더라니 내가 "그럼 50년 전에 있었군요." 그렇잖아요. 그럼 내가 50년 전에 경험한 거라구 그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놀랄 것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경험에 한계를 넘어설 때 그만 손을 놓고 마는 거예요. 이제는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라는 거죠. 그 자체가 얼마나 참 가소로운 일입니까. 보십시오. 지식, 자기 경험, 자기 지식 안에서 용기를 내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고, 그의 지식과 경험이 말해줍니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고 예견, 예지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지식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서 오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의지의 한계 안에서 풀이하고 해석하려고 하니까 이것이 해석이 안될 때 곧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지식 자체가 잘못된 지식 자체가 두려움을 만드는 것이올시다. 어떤 철학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반드시 발생한다." 아주 심리학적인 얘기입니다. 칼 융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말합니다. "잠재의식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반드시 실현되기를 원한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이런 일을 두려워하고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꼭 그런 일이 옵니다. 그 생각 자체가 문제라 이거야. 그 잠재의식 속에 있는 두려움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난대요. 너무나도 무서운 얘기입니다.
심리학자 롤로 메이라고 하는 분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무서운 병은 말이죠 "불안과 공허" 라고 그렇게 전제합니다. 왜 불안하게 됐고 왜 두려워하며 살게 되었느냐? 이에 대해서 그는 몇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가치관 상실에서 온다는 겁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가치의 그 근본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가치관의 상실로 인해서 결국은 우리는 두려워하게 됐다. 왜요? 변화되어야 될 것이 있고 잃어버려야 될 것이 있어요. 그런데 잃어버리고 또 얻고 그래야 되는데 잃어버려야 될 것이 무엇인지, 얻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 그 가치 기준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잃어버려야 될 것 잃어버리면서도 그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관에 문제가 생긴 거죠. 또 한가지는 인간 존엄에 대한 자아의식의 상실입니다. 내 존재에 대한 의식이 도대체 문제가 됐어요. 도대체 인간이 뭡니까? 근본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또 하나는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상실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부부간에도 안통하고 부모자식 간에도 말이 통하질 않아요. 특별히 제가 평양에 가서 그분들하고 나흘동안을 얘기를 하루종일 했어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겁니다, 도대체가 이게. 분명히 한국말은 한국말인데 도대체가, 쉽게 말해서 말도 안돼는 거요.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이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없어요.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세계에 살면, 감옥에 갇힌 것이 되고 마지막엔 고독해 지고, 무능해지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에요.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존재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의 뜻이 내게 또 이해가 돼야 되는데, 이게 안돼는 거예요. 언어를 상실한 것, 이것이 바로 가슴이 터지는 거야. 이게 두려움의 이유요. 또 하나는 자연에 대한 무관심, 이거는 깊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다섯째는 인간 비극의식의 상실, 이런 말인데요, 아주 철학적 표현입니다.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신뢰와 존경과 헌신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적어도 세상을 바르게 살고 명랑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중요하다, 적어도 이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이 시간 죽어도 좋다, 그만한 가치 그만한 헌신이 있고 살아야 됩니다. 이번에 제가 평양 가겠다고 그러니까 여러분들 다 말렸어요. 가지말라고, 그 무서운데 가지 말라고. 하지만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가다가 죽어도 가고, 가서 못 오고 죽어도 가는 거예요. 왜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용기가 있는 겁니다. 뭐 이것이 꼭 잘될 거라고,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그 생각 안 합니다. 여러분 죽 얘기한 거예요. 이 일을 위해서는 이대로 죽어도 상관이 없다 할 만큼의, 다시 말하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일의 낙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면서 살면 거기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것이다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없으니까 현대인들은 피곤하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요, 너무 어이가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요 풍랑도 보았어요. 자기 경험도 판단해보았어요. 자기 능력도 재평가해 보았어요. 그러나 못한 게 있어요. 지금 여기에 예수임이 계시다는 걸 잃어버렸어요. 이 멍청한 제자들이 예수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이 배에 계시다는 걸 몰랐어요.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걸 까맣게 잊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깨우면서 하는 말도 되게 맘에 안 들어요.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나이까." 자기 중심적이에요. 우리는 깨어있고, 예수님 주무시는데 '예수님 깨셔야겠습니다. 이게 지금 배에 물이 들어오는데 그냥 주무시다가는 돌아가십니다. 예수님 깨셔야겠습니다' 이러지를 않고, 아니 깬 사람이 자는 사람보고 "우리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되게 못됐어요, 아주 하는 것이요. 자기 중심,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에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시고 꾸짖으신 다음에 조용해졌을 때 제자들에게 딱 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모든 문제를 믿음 문제로 돌렸어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적다, 그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현실 속에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하구요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경륜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에요. 디스펜세이셔날 미닝(Dispensational meaning)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이것을 몰랐던 거예요. 예수님이 여기서, 이 풍랑속에서 돌아가실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같이 편승하고 있으니 저들도 죽을 사람들이 아니에요. 여기서 이렇게 끝내서는 안될 분이 아니에요. 그런 큰 구원의 경륜을 가지신 분이 여기 계시는데 말이에요 왜 걱정을 하겠어요.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는 없어요.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어요. 유명한 요한 웨슬레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향하신 그 크신 뜻을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럴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냈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저 하시는 그 플랜(plan)이 있어요. Administration이 있어요. 이것을 이루기까지는 절대로 이까짓 풍랑에서 죽을 수가 없어요. 그걸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은 바울이 이 배가 큰 파선이 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때에 이런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 됩니다. 내가 로마로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해야 될 엄청난 사명을 지니고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사해야 되니까 당신들도 무사할거요, 걱정하지 말라고. 이런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자세히 보면요, 크다는 말이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헬라 원문대로는 메가스라고 그럽니다요. 메가톤이라는 말이죠. 크다. 영어로는 great. big 이 아닙니다, great. 아주 크다, 그런 뜻인데 메가급. 메갓이란 말이 딱 세 단어가 있습니다. 메가네 아네몬, 큰 풍랑 메가톤 급의 풍랑이다, 그런 말이구요. 그 다음에 조용해졌을 때에 랄레네 메갈레,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심히 잔잔해졌다, 하지만 원문대로는 큰 고요함, 아주 메가톤 급의 고요함, 그런 뜻이고요, 이 사건을 보고 깜짝 놀라요 제자들이. 이거는 풍랑보고 놀라는 거 하고 달라요. 예수님 바다를 꾸짖어서 조용하게 만드는 걸 보고 깜짝 놀라죠. 큰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이것은 포본 메간 했습니다. 큰 두려움, 이 사람들이 크게 심히 두려워했다, 그랬단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었다는 말은 마가복음 1장 25절에 보면 귀신을 꾸짖었다는 말과 꼭 같은 말이에요. 귀신을 향하여 "나가라" 하고 명합니다. 악마도 순종하고, 바다를 향해서 명령을 할 때, 바다도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이건 경건입니다. 칼빈에 대한 글을 쓴 분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칼빈, 이 사람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는 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 외에는 무서운 게 없어요. 그것이 칼빈이었다 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임 두려워 했다는 이 말은 풍랑을 무서워했다는 말하고 전혀 틀립니다. 세상이 무섭다는 얘기가 아니고 실패가 무섭다는 얘기도 아니고, 나의 나약함이 무섭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그들은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은 경건입니다. 오직 이 경건,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두려워해야 될 분을 두려워 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예수님을 진작 두려워했더라면 저들은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고 그 큰 경건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아무 두려움도 없는, 심지어는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러한 고요함, 그러한 자유, 그러한 평화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큰 풍랑과도 같은 급변하는 세대에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역사의 주인이 여기 계시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이 풍랑 속에 있는 이 작은 배 안에 주님과 내가 함께 있음을 알게 하사 주님의 크고 위대한 경륜이 이루어지는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면서 경건한 중에 조용히 참 평안, 참 고요함 지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