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순 교수  

미국에 있을 때 ‘자신을 직면하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영성수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직면’(facing)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하여 용기를 내보았다. 말이 직면이지 누군들 자기의 아픔이나 상처에 대해 노출과 대면이 편안하겠는가? 자연스럽게 저항이나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자신이 영성수련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실직이나, 관계의 어려움, 우울증, 성폭력, 외도 등 성인이 된 이후에 갖게 되는 좌절 경험 때문인데, 왜 이 수련에서는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냐고 불만이다.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을 되새긴다고 하는 것이 성인이 된 지금 무슨 소용이 있냐고 거부감을 나타낸다. 수련 안내자들은 성인 마음 안에 있는 내면 아이(inner child) 심리기제에 대해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따라 오든지 떠나든지 선택하라고만 할 뿐이었다.
또 어떤 이는, 치유의 방식이 뭔가 억지스럽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각 그룹으로 나뉘어 자기 이야기를 나눌 때 리더는 알게 모르게 참여자들에게 말을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조장한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을 노출하고 싶지 않거나 남의 이야기만을 듣고 싶은 사람도 있겠기 때문이다. 또한 찬양을 하고 춤을 추는 데 있어서도 이런 모양 저런 몸짓 그리고 힘껏 소리 질러보기를 동원해서 표출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성격적으로 조용한 사람인데, 혹은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참여했는데,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가 되는 기분이어서 편치 않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이 하는 말이 이 정도니 만약 참여자가 아닌 사람이 밖에서 그 수련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룹이 각 방으로 돌아가고 난 후, 밖에서 들어보는 치유작업 ‘소리들’은 아닌 게 아니라 이웃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난 것만큼이나 소란스럽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모르는 외부인들이 밖에서 그저 듣기만 한다면 수련생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히스테릭한 소리, 심지어 싸우는 소리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무리이긴 하다. 프로그램의 내용이 바뀔 때마다의 틈새는 그야말로 침묵수련인데, 막상 그룹치유가 시작되었다 하면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땀을 쏟게 하는 소리들의 절규로 이루어졌다. 정말 시끄러운 영성수련이었다!


영성수련 치유작업의 특색은 프라이멀 요법이 기본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프라이멀 치료란 유아기의 고통을 다시 체험하게 하여 억압된 마음으로부터 정신적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을 말한다. 이 치료 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 소리 지르기(screaming)에 있다. 내 마음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나 절규, 흐느낌을 통하여 원초적 고통을 다시 체험시켜 ‘사산(死産)된 정서’에 힘을 실어준다. 겹겹이 쌓여서 억눌리고 은폐된 고통의 층을 한 계단 한 계단 더 깊이 내려가, 고통을 받을 당시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실제로 맞닥뜨리게 치료 작업을 한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하면서 삶을 무기력하게 했던 어떤 심리적 기제, 즉 내 마음 안 어린이와의 만남이 소리 지르기를 통해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애정이나 인정과 관련된 삶의 주제(실직, 상실, 관계의 파탄 등) 때문에 우울할 수밖에 없는 나, 그러나 가슴 깊은 속 무언가 꿈틀거리며 살고 싶어 하는 나 - 그 내면의 고통을 외부로 드러내는 시도를 하면서 ‘현실적이 되는’ 것이 프라이멀 치료의 진수이다. 그렇다면 심리적 역동을 일으키는 내면 소리들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소리들인가?
프라이멀 치료자 야노프(Arthur Yanov)는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온 내담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달라도 그 말들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갈등이 비슷하게 표출된다는 것이다. 즉, “내 삶은 미궁 속에 빠진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방향을 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뭔가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걸 느껴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거꾸로 피가 몰리는 기분 알아요?,” “온 몸이 조여드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눌리고, 끌려 다니고, 잡아당기고, 가라앉고, 미는 것과 같은’ 단어의 빈번한 사용, 그래서 ‘심장이 뛰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갈피를 못 잡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혹은 어떤 연령대에 이런 말을 많이 할까 탐색해보니, 야노프는 바로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가 그렇겠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가 엄마 자궁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부터 한 바퀴를 돌아 나와야 하는 아이가 어떤 마음과 움직임을 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위의 내담자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하고 있을 것이다!
야노프는 원래의 기억을 토해내는 것, 즉 고통의 억압 대신에 올바른 채널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태아의 출생 과정과도 같이 우리의 내면아이(inner child)는 분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제가 어떻든지 간에 그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이래로 내면에 축적된 고통을 ‘느껴내는’ 일이 치료의 단초가 됨을 통찰하게 된 것이다. 억압은 결코 유익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는 심리기제일 뿐이다. 심리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사람에게 최악의 고통은 무엇인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중요 대상들이(부모나 형제자매, 친구) 우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고통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과 인정의 결핍은 그저 말해보기보다 느껴봐야 한다. 심장이 뛰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울컥거리고, 배가 아픈 것 같은 그 느낌을 고스란히 생생하게 느껴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긴 시간 등반을 마치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 처음으로 자기 피부를 느끼는 것과 같다. 오랜 동안 하고 싶었던, 그러나 억압시켜야만 했던 이야기를 반복적인 소리(흐느낌, 히스테릭한 소리, 아우성 등)로 표출하는 작업은 고통을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의 에너지가 풀리고 고통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된다. 야노프는 우리에게 “고통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만큼 고통을 적게 겪는다.”고 일깨운다.


내 안의 갈망(desire)과 만난다는 말은, “나는 존재자체로 사랑받고 싶다,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에 접촉되는 영적 순간을 말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영적으로 내면이 평화로워지는, 그래서 자신에게 겸손해지는 그런 순간이다. 실직의 고통을 겪는 가장은 직장을 잃었다는 그 자체보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떨어져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싸운다. 남자 친구를 잃은 여성은 그 일로 인해 여성으로서 자신의 매력에 대해 회의적이 되고 그 때문에 무기력해진다. 어린 시절에 당한 정신적 충격, 부모로부터의 충분치 못한 사랑, 애정을 받고 싶었던 중요 대상으로부터 거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부정적 사건을 겪으면 어느 새 내면에 있는 자기존재에 대한 심상(心像)을 작동시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어디서부터 관계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미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어. 난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자책하며 포기하고 무기력에 빠져든다. 마치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 나갈 준비를 못하는 태아처럼 말이다. 억압이 어린 시절 부모와 관련 있다고 해서 꼭 별거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살지만 나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자기 가치감을 심어주지 않는 많은 중산층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동안 밀폐되어 죽어있던 정서가 다시 살아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비틀즈(The Beatles) 멤버인 존 레논(John Lennon)은 직접 프라이멀 치료를 받은 가수이다. 그의 유명한 노래 ‘어머니’는 유년기 고통의 결산이며 ‘소리 지르기’ 치료 이후 만든 창작품이다. 둔중한 교회 종소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 음산할 정도로 처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기를 버린 부모에 대해 “엄마, 가지 마요! 아빠, 제발 돌아와요!”를 거의 열 번이나 반복하여 절규하는 이 노래는, 그동안 몽상가로서의 존의 모습이 아닌 그냥 존일 뿐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평화롭게 누리는 성숙한 존이다. 치료 이후, 고립되어 우울하게 살았던 그가 자기감정에 진실해지고 그것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창조적인 예술가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진실은 사랑과 평화뿐만 아니라 비참과 분노도 포함한다. 억압되어 있던 정서와의 깊은 해후는 이처럼 인생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와 그에 따른 창의적인 생산으로 귀결된다. 야노프 박사가 자기 내담자들에게 ‘어머니’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하는 이유가 있다. 흐느껴보지 않고는, 소리질러보지 않고는, 절규해보지 않고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나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일단 소리 질러 보라. 어색하더라도 부르고 싶은 이름을 힘껏 불러 보라. 울부짖어 보라. 치유의 반(半)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