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용 (사랑의교회 장애인선교 담당 목사, 한장연 소장) 2003.05.26 조회 : 326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머리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가진 것을 조건 없이 나누며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며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렇듯 차별과 구별 없이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는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셨습니다. 실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죄만 있으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요, 넘쳐나는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받고는 고통을 떨쳐 버리고 절망의 언덕을 넘어 소망의 하나님 나라를 간직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이 땅에서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의 보이지 않는 담은 많은 장애인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장애인 사역을 교회 본연의 사명이 아닌 부수적인 사역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들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셨습니다. 공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특별히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셨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따라가야 한다고 볼 때 장애인 사역은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을 본연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력이 있을 때 하는 부수적 사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장애인들은 소수이고 교회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영혼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과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장애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요 절망에 빠진 자입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건강해지며 비로소 교회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신의 육체적 장애로 인하여 고민하기보다는 육체적 장애로 말미암는 능력장애,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불리함 때문에 고민하고 나아가서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 때문에 아파하고 갈등합니다. 특별히 "장애인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장애인은 ∼이 되면 안돼!"라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의 시선, 그리고 차별의식이 만연하여 장애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의 능력이 정상인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장애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한 능력위주의 잣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흠이 생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표현되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불쾌하게 생각되는 용어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지체장애인을 절름발이, 혹은 앉은뱅이로, 청각장애인을 귀머거리로, 시각장애인을 소경, 장님, 봉사 등으로 그리고 정신질환자를 미친 사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부정적인 용어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그리고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의 중증장애는 육신의 장애가 아닌 영적 장애가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교회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자세 때문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으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구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해방을 선언하셨고("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것은 곧 여성, 남성, 아동,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넘쳐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은 각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동력을 귀하게 여겼던 초기 농경사회의 영향과 산업사회의 발달로 장애인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도 차별적인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누가 마땅히 가져야 합니까?

"종이 돌아와서 그들이 말한 대로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에게 빨리 시내의 큰 거리와 골목에 나가 거지와 불구자와 절름발이와 맹인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현대어성경, 눅 14:21)

4.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던 초기에는 외국선교사들의 장애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선교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유교적 전통과 일반사회의 배금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이 교회로 밀려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교회 중심으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교회는 부흥과 성장중심의 정책을 펴게 되었고 교회성장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장애인은 결국 소외되어 자선적, 시혜적 차원에서 구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장애인은 무관심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야 할 상처 입은 장애인들을 교회가 외면함에 따라 장애인들은 눈치를 보며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큰 교회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작더라도 건강한 교회, 하나된 교회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하나된 교회는 장애인들도 함께 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5. 장애인 사역에 대한 담임목회자의 인식부족 때문입니다.

현재 일선에서 사역하시는 대부분의 담임목회자들께서는 신학교시절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업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장애인선교는 당연한 목회가 아닌 선택적 목회로 생각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사역은 장애인 선교에 사명이 있는 특별한 사역자들이나 선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부족은 장애인을 동정과 구제의 대상으로 국한시키는 좁은 시각을 갖게 하기 때문에 선교와 교육의 접근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6. 장애인 사역을 위한 전문 교역자와 교사, 그리고 교육자료 및 프로그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영혼구원이라는 편협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영육구원이라는 교회 본질의 사명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큰 교회를 중심으로 복지선교를 표방하며 장애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에 관해서는 신학교에서조차 강의가 없어 가르치지 못했으며 장애인 시설과 연계하여 실천신앙을 배울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장애인 선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교단이든 장애인에 대한 신학조차 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문교역자와 교사가 배출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몇몇 큰 교회들을 중심으로 장애인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기초가 없는 관계로 발전은 매우 느렸고 그나마 장애인 선교를 담당하는 사역자 역시 평생사역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역자가 양성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자료 및 좋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선교를 하고 싶어도 기초가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장애인선교를 시작한 교회는 장애인 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 신학을 정립하여 많은 교회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7. 장애인 사역자들의 평생사역에 대한 의지결여와 교회의 지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사역자의 전문화를 위하여 지원은 꺼리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장애인 사역을 위하여 평생을 드리겠다는 사역자의 헌신도가 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120여 년의 한국교회 역사중 장애인 사역은 거의 제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장애인 사역은 오랫동안 묻혀있던 다이아몬드 광산을 캐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주위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생존을 포기하는 믿음을 가지고 척박한 장애인 선교의 현장에 뛰어든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8. 장애인 선교의 사역을 선교회의 사역으로 국한시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선교가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 형태로 혹은 장애인선교회를 두고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선교는 전문화되어야 하며 전문성을 가진 사역자와 기관(para-church)들이 해야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의 장애인사역은 para-church라고 불리우는 각종 장애인선교단체에서 감당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목회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사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구적인 입장에서 para-church의 사역형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부정적인 양상중 하나입니다. 성도와 교역자와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는 교회 안에서 장애인 선교는 시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장애인 선교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이것이 교회본질을 회복시키는 요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9. 장애인 사역을 하게 될 때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영혼에 대하여 경제적 가치를 따지며 접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수에 의한 민주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에 대한 귀중함을 이미 교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인 사역의 현장을 살펴보면 장애인 편의시설과 교육자료를 준비한 곳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무언의 차별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까지도 돈의 논리에 굴복하여 "영혼구원"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저버리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보다 맘몬(돈)을 섬기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요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애인들에게 작은 것에 크게 감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0.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원의 도구요 통로요 매개체입니다(요 9:1-3). 뿐만 아니라 장애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사역의 대상이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실적 도래와 함께 종말론적 미래와 모든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실로 장애인은 인간의 고통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예이며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 있는 장애인에게 치료와 함께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도래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사복음서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선교는 예수님 사역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도 마땅히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장애인에 대한 커리큘럼조차 신학교 내에 거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받지 못한 목회자들이 장애인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당연하고 우선되는 문제로 취급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 빨리 장애인 신학이 정립되어 교회의 장애인 사역에 힘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