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에곤 쉴레(Egon Schiele)
활동년도 : 1890~1918
작가소개 : 에곤 쉴레는 1890년 6월 12일 다뉴브 강변의 튤린에서 태어났다.
비엔나 근방에 있는 이 소도시의 역장이 쉴레의 아버지 였다.
쉴레의 드로잉 감각은 일찍부터 현저하여,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일로 보내었다. 쉴레가 14살 되던해 매독으로 사망한 쉴레의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처벌로써 쉴레의 소묘들을 태워버렸다. 16살 때, 쉴레는 대리인이던 삼촌과 무관심한 어머니가 내켜하지 않는 가운데 비엔나 미술학교로 보내졌다.

1년 후인 1907년, 그의 드로잉을 당시 이름높던 선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 보일 기회가 주어졌다.클림트는 소년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 클림트의 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은 1909년까지의 쉴레의 작품에서 현저히 보인다. 스승의 우아하고 장식적인 형상을 떠나서, 쉴레 자신의 표현적인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1910년 경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점은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이 끊어져 고립감과 자기도취적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때로서, 쉴레는 일련의 심리적, 성적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조용히 작품제작에 몰두할 은둔처를 찾아, 비엔나를 떠나 모친의 고향인 보헤미아 크라마우로 이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골 사람들이 쉴레의 생활방식, 곧, 여인들과 모델과의 관계를 말 삼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웃으로부터의 적개감은 그해 말 비엔나에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이렝바하라고 하는 마을로 옮겨갔을 때도 되풀이된 현상이었다.
비엔나와 윈헨, 괼른,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전시와 함께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가던 참에, 쉴레는 노이렝바하 감옥에 24일간 갇히고 마는데, 죄명은 부도덕과 꾐으로, 모델로 섰던 가출 소녀가 그를 고발했던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쉴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의 철두철미 은둔적이 되었고 그리고 자신을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그린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5년, 몇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하고, 입대 2주 후에 결혼했다. 군인과 남편이라는 이중의 역할은 스스로가 가한 사회적 추방아의 모습을 그의 삶과 그림의 이미지에서 드러내게 도왔다. 더구나, 비엔나의 군대미술관에 배치가 된 후로는 집에서 거처하며 정규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간에 제작된 초상화들은 덜 과격하며 덜 호전적이었다. 1918년 3월 비엔나 서세션(Vlenna Secession)에서의 개인전은 호응이 좋았고 경제적 보답을 주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번진 악명높은 독감이 10월 비엔나에 당도하자,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쉴레의 아내가 먼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쉴레는 그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 뒤를 따랐다. 쉴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사망때까지, 에곤 쉴레는 선과 색채를 대가적인 솜씨로 다를수 있게 되었고, 3천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약 3백 점에 이르는 회화를 남겼다.

그는 분명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와 함께 세기말,세기초의 가장 뛰어난 오스트리아화가 셋에 포함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놀드 쉔베르그 및 루드비히 비트겐스타인과 동시대인으로서, 쉴레는 금세기가 열리던 처음 10년간 비엔나에서 보여진 개인적, 심리적 현상 및 지적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본질에의 탐구와당시의 지적인 틀안에서 개성의 내부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 비엔나 제국 말엽의 퇴폐와 위선과 함께 쉴레 작품의 내용이 되었다.

쉴레의 드로잉은 거의 언제나 그의 회화보다 높이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쉴레에게는 그의 그림이 그의 소묘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드로잉을 대단히 신뢰하여 언젠가 그림으로 더 발전되어 나갈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단명했던 삶이 이것을 허용치 않았다.
쉴레의 유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선과 두텁게 칠한물감의 겸용은 일찍부터 보여, 1918년 그의 삶의 종반까지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보아 그런 예들이 있듯이, 쉴레는 그의 소재를 뛰어난 형상력으로 훌륭히 표현했다. 쉴레의 드로잉은 드로잉 그 자체로 감상될 수 있다. 그렇기에 쉴레가 1950년 이래 점증적으로 독자를 얻어왔던 것이다. 지난 25년간, 쉴레의 대중성은 미술에서 새로이 재부각되고 있는 성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 증대와 함께 더 한층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관심의 촛점과 관조의 근간으로서, 선과 공간과 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쉴레의 이해가 없었다면 감동적인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12년 4윌 27일, 옥중에서 쉴레는 이렇게 썼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이 젊은 화가는 1900년으로 바뀌던 직전과 직후에 살았던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인간 존재를 응시했다.



작품명 : 게르티 쉴레
제작년도 : 190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40x14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에두아르 코스맥
제작년도 : 191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00x10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비웃는 여인
제작년도 : 1910
작품재료 : 과슈
작품크기 : 45x31.4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자화상
제작년도 : 1910
작품재료 : 과슈
작품크기 : 44.3x30.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자화상2
제작년도 : 1911
작품재료 : 종이에 연필과 고무 수채
작품크기 : 48.2x31.7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



작품명 : 자화상3
제작년도 : 1910
작품재료 : 연필과 고무 수채
작품크기 : 55.8x36.9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