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믿음  (히11:4)


목사가 헌금에 대해 설교하고 있을 때 교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설문을 미국에서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1위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전능하시고 부요하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왜 부요하게 살지도 못하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있을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한 노파가 대통령 집무실에 와서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링컨이 여러 정적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때이었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어 보여 비서진이 설득하여 돌려보내려 하고 있는데 마침 링컨이 비서실에서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파는 대통령에게 "잠간이면 됩니다. 잠시만 만나 주십시오."하더랍니다. 링컨이 집무실에 들어오라고 한후 물었답니다. "부인,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노파는 뜻밖에 "아무것도 저를 도와 주실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대통령님께 드릴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각하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국정에 늘 분주하실 터인데 조금이나마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백성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하를 사랑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링컨은 자기의 생애에서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모든 스트레스가 달아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부족을 돕는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헌금은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경사상 최초의 헌물을 드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아벨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드림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아벨이 헌물을 드릴 때 가인도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군이었기에 곡식의 소산물로 드렸고 아벨은 목자이었기에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아벨의 제물에 피가 있었다는 지적을 한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해석은 오늘날은 정당하게 수용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운데는 소제와 같은 농산물도 있었기 때문이고 아직 이 시점에서 피의 제사는 율법으로 제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벨의 제사는 어떻게 드려졌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아벨의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아벨에게 있어서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1. 믿음은 첫째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창4:4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분명히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고 했을뿐(창4:3), 땅의 소산물의 첫 열매를 드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여기 아벨과 가인의 헌신의 질적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가 아니겠습니까?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여호와께 드렸다는 것은 여호와의 존재가 아벨에게서 우선순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첫째이신 하나님께 첫째 것을 드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일 잠언3:9과 같은 말씀에서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명령으로 기록됩니다. 신약에서 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첫째로)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우선순위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런 우선 순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의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땅히 그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자동차 기업의 프런티어인 헨리 포드의 일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유머도 있었고 믿음도 있는 사람이어서 여러가지 흥미있는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그가 한번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방문했다가 한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그의 방문후에 고아원 강당을 짓기 위한 기금후원 요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겨 그는 2,000파운드를 후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에는 잘못 기사화되어 포드회장이 20,000파운드를 약속했다고 머리 기사로 뉴스가 나갔습니다. 고아원측에서 이것을 포드에게 사과하면서 정정광고를 요청하겠다고 했더니 포드가 한숨을 쉬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힐수 없지요. 다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18,000파운드를 더 내지요. 그대신 강당이 완공되면 강당입구에 이런 글이나 써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헨리 포드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금을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의 첫째 원인(first cause)이 되어주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선을 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우선순위로 삼은 사람들만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라고 할수 있습니다.

2. 믿음은 좋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벨은 첫째 것을 드렸을뿐 아니라, 기름을 드렸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름은 구약시대에 가장 좋은 부분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제사할 때 기름부분은 반드시 태워서 주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기름은 주님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영양 과잉섭취의 시대에서는 이해가 잘 안갈지 모르지만 지구촌의 가난한 지역에서 아직도 지방섭취를 위해 기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때만도 집에서 고기를 먹게되면 기름이 내 차례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그때 먹어둔 기름이 제 몸에서 역사하여 심은대로 이제 비로소 거두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레슨은 이것입니다. 기름은 좋은것의 상징이고, 아벨은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좋은 것을 드리고 싶어한 가능한 추측의 하나는 그가 이미 주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고 살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좋은 것을 드린 이유는 이미 좋은 것들을 내려 주시는 좋으신 주님께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1:17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에게 어찌 좋지 않은 것을 드릴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감사절은 이 좋은 것들로 금년한해도 우리네 삶의 마당에 은혜를 내리신 하나님께 우리의 좋은 것으로 돌려 드리며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한 사람들의 감동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현대교인들이 이런 감동을 상실하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에 한미준 조찬 모임에 갔다가 어느 목사님께 이런 재미있는 유머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설교를 아주 못하는 목사님과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정답은 "영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감사절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영감(감동)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께 감사드리는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정신을 묵상할 때마다 늘 강조하는 교훈의 하나는 헌금은 결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은 존재의 문제요 철학의 문제입니다. 헌금을 통해 우리는 돈이 아닌 존재를 드리고 우리의 정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니아 교인들의 헌금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후서8:5)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해오는 유명한 일화가운데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톤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집회가 있어서 선교헌금시간이 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바칠 헌금이 없었던 그가 헌금 연보대가 강단으로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면서 "저는 저 아프리카를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 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예물에 담긴 아벨의 헌신을 하나님이 친히 인정 하셨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 4절 기사에 보면 아벨이 제물을 드린후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제물을 받으셨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아벨이라는 인간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제물보다 더 중요한 아벨의 헌신을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예배학자는 헌금행위를 가르쳐 '생명을 바꾸는 사건'(exchanging life)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헌금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목숨을 바친다고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일지 모르나 구체적인 헌금으로 헌신하는 것이 더 어려울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흑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들의 예배에는 뜨거운 정서적 교감이 있어서 대체로 예배시간도 길고 설교자의 메시지에 회중들이 목소리로 반응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한 흑인 목사님이 설교하시며 "여러분 오늘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했더니, 회중들이 "맞습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하고 화답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걷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의 과제는 너무나 긴급합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했더니, 또한 회중들이 "맞습니다. 달려가야 합니다"고 화답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또한 "세상은 너무나 넓습니다, 열방중에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서 교회는 날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했더니, 또다시 회중들이 "예,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고 화답합니다. 다시 설교자는 "여러분 이런 선교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모두 구체적으로 돈으로 헌신합시다" 했더니 조용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떤 성도가 화답하기를 "우리 교회로 하여금 그냥 다시 걷게 하십시다" 하더랍니다. 여러분과 저는 혹시 이 흑인 성도와 같지 않으신지요? 신앙고백과 헌신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 아닌지요?

다시한번 이 감사절에 유명한 선교사 C.T.Studd의 고백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결코 지나친 것일수는 없다"고.  

출처/이동원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