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유산을 물려줍시다!  (왕상 11:1-13)

어떤 아주머니께서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원문 그대로 읽겠습니다.
"딸만 있는 사람이 아들 낳는 법 강의한다꼬… 거품물고 까불랑거릴 때, 나는 고마 칵 죽고 싶어지데예. 저 양반이 내 남편인가 하고.
비 온다했는데도 세차하고 들어올 때 우찌 저리도 멍청한지 미치겠더라고예. 비온다는데 뭐 할라꼬 세차는 했는교? 하면 뭐라는 줄 압니꺼? "야 씻거 놓은 거 헹가야 될 것 아이가" 팍 도라삘라 칼 때가 많아예.
골초가 꼴에 담배 해롭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담배끊어라 할 때, 속으로 웃기고 자빠졌네, 지 담배도 몬 끊어삐면서…. 중얼중얼 욕이 절로 나온다카이.
외상술 먹고 와서는 팁은 팍팍 썼다꼬 자랑할 때는 쥑이삐고 싶다카이…. 뭐 다른 사람들 팁도 안 쓰고 하는 거 보이 추자빠서 뭐 어쩌구 저쩌구….
와 그런 못된 버릇은 들었는지 이혼하자고 하몬 이왕 산 김에 한 20년만 더 살고 하자니… 내가 고마 딱… 숨통이 막히는기라예.
우짜지도 몬하고 이리 살고 있는데, 그나마 밤에는…. 그냥 할 수 업시 참심니더…."

아들이 못 보던 노트북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났니?" "학교에서 친구 건데 그냥 집어 왔어요." "임마, 너 그건 도둑이야. 정말 필요하다면 아빠한테 말해야지." "아빠한테 얘기해도 안 사 줄 거잖아요. 정말 필요하면 아빠가 회사에서 집어다 주지."
그 아들에 그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무책임한 말 가운데 하나가 부전자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내게 나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이랬으니 나도 이렇게 살고, 내 자식에게도 이런 모습을 전해 줘야 한다면 이것은 비극 가운데 비극입니다.

사람은 운명의 노예가 아닙니다. 단지 자기 마음의 노예일 뿐입니다. 내 아버지가 그랬으니까 나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흘이 멀다하고 두들겨 팼으니까 나도 내 아내를 그렇게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허구한날 술만 먹었으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술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모순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아버지에게서 좋지 못한 생활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 아버지로 끝내십시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훌륭하고 좋은 삶의 모습을 물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불신앙의 흐름도 내 아버지에게서 끝나야 합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내 가정도 살아야 합니다. 내 아이들도 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나와 내 가정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가문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복이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손과 자자손손 만대에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그 마음에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여건이 어떻든, 오늘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나아갈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지금까지 나를 억누르던 어두운 영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악한 영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나와 내 가정이 나아가야 할 복된 미래를 찾아보십시오.

유명한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며 죽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업적에 관한 것은 살아있을 때 후회를 많이 합니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 일이 무엇인가?" 그러나 죽을 때는 그런 것을 가지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가?"라고 후회하며 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좀더 길고 짧을 뿐이지 모든 인생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후회는 없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내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오늘은 5월 1일, 가정의 달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교회가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특별히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는 나와 내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자녀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 자녀들이 잘될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잘되게 하려면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내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유산은 믿음입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성취한 여호수아는 12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12지파의 두령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강 저편의 신은 애굽 사람들의 신을 말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짐승과 해와 달과 별 같은 것들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애굽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잘 살지 못하는 국가입니다. 가난한 나라입니다. 아모리 사람의 신은 주상입니다. 목상입니다. 나무나 돌 같은 것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신이나 아모리 사람의 신은 모두 우상입니다. 여호수아는 확실히 말합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스라엘 민족이 복을 받은 것은 여호수아의 유언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수아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그 섬김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엉망인 생활 모습으로 내 아이들에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모순된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똑 바로 믿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입니다. 실제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제일 존경받은 분은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하여 미국 역사상 제일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유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링컨이 열살 되는 해인 1818년 10월 5일에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전 그녀는 어린 아들 링컨의 손을 붙잡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에이브야" 여기에서 에이브는 링컨의 애칭입니다. "사랑하는 에이브야, 이 성경책은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에이브야, 너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약속할 수 있겠니?" 어린 링컨이었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링컨은 어머니를 존경했습니다. 링컨은 어머니의 신앙교육에 깊이 감사했습니다. 링컨은 성년이 되었을 때에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어머니를 추억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려서 글을 읽지 못할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성경을 읽어 주셨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으셨다네. 통나무 집에서 읽어주시던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가 지금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네. 나의 오늘,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링컨이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믿음의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은 무엇입니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금쪽같은 내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유산은 무엇입니까?

1970년대 독일에 어느 부호가 모든 재산을 사회복지재단에 기증했습니다. 다섯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서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에 제일 큰아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도시락 가방 하나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늘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밤마다 기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기도의 유산은 보이는 유산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기도하면서 살면 내 아이들도 기도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내 아이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것입니다. 부모가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의 삶을 살면 내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 아이들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진실되지 못한 생활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내 아이들은 자라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우습게 여깁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그대로 여러분의 아이들도 따라서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돈 몇 푼 더 물려주려고 아둥바둥 거리면서 거짓된 생활을 살지 말고, 돈 좀 못 벌어도 진실된 생활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세상의 명예를 좇아서 불나방처럼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헛된 모습을 보여주지 말고, 하나님 잘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써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모습을 내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십시오. 아이들 앞에서 정말 믿음으로 멋진 부모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자자손손 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한마디로 솔로몬은 여자들을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이웃 나라의 이방 여자들을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17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후궁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나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떠나게 했습니다. 4절 이하를 보면, 늙은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따라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솔로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성장했던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어떠했을까? 성경은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악독한 정책을 세우고 더 난폭한 죄를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들 르호보암에게 자신의 많은 재산과 왕위까지 물려주었으나 5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많던 보물을 애굽 왕 시삭의 침공을 받아 몽땅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르호보암은 나라를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무서운 것은 르호보암이 아버지 솔로문의 부패한 모습을 그대로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지게 했던 장본인 솔로몬을 보게 되면 그가 그렇게 여성 편력이 심했던 원인을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부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른 여인을 얻고자 충실한 부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난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어쩌면 솔로몬은 아버지의 여성 편력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났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 이상의 또 다른 어머니를 대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아버지의 여성 편력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보다 더 심한 여성 편력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삶의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식들이 배운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믿음이 좋은 것도 자녀들이 배웁니다. 부모가 믿음 없이 타락하는 것도 자녀들은 그대로 배웁니다. 우리가 살아 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재물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건강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아이들에게 믿음 없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안 버리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금지옥엽이야 정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3절에 보면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에 도착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아브라함은 단을 쌓았습니다. 나무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을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갑니다.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리를 잡은 후 이삭이 지고 온 나무를 차곡차곡 쌓습니다. 이러한 것을 과연 아브라함 혼자서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이삭은 죽어야 하는 자리고 아브라함은 죽여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무 단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나무를 쌓는 일은 했다 하더라도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묶어야 했습니다. 젊은 아들과 늙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는 묶을 수 없습니다. 소나 돼지를 끌고만 가도 힘이 듭니다. 닭을 잡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닭 한마리를 잡으려 해도 난리가 납니다. 하물며 사람이 싫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삭이 반항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묶었다 하더라도 나무 단 위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이삭이 스스로 올라가 줘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는 죽어야 하고 아버지는 죽여야 하는 이런 절박하고 기막힌 현실 앞에서 담담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 값싸게 생각하고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고통과 대가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 모습을 아들 이삭이 그대로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그는 고통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장작더미에 올라가 불에 타 죽는 번제가 되어도 하나님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양 몇 백마리, 소 몇 백마리, 땅 몇 평을 물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그의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어떤 복을 주셨는가를 창세기 26장 12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어떤 장로님의 집 마당에서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자랑합니다. "우리 아빠는 시장님하고 친해."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우리 아빠는 국회의원님하고 친해." 장로님 아들이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리 아빠는 하나님하고 친해." 아들의 이 말을 듣고 있던 장로님이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를 헛되지 않게 키웠구나. 내가 헛되게 살지 않았구나." 그리고는 마음이 든든해지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지 내 가정과 아이들에게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눈으로 본 그대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은 부모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더 빨리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신앙의 산 증인으로 살아있는 믿음의 모델이 되어 주십시오. 제발 아이들에게 믿음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난 인생으로 내 아이를 모난 아이로 만들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모를 척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좀더 자랐을 때에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거나 아버지가 믿는 그 하나님을 버리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입니까?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할 때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그 때에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믿음의 사람입니까? 좀더 이야기를 하자면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나는 어떨까요? 내 눈이 아닌 내 남편이나 아내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내 눈이 아닌 내 목사님의 눈으로, 내 눈이 아닌 내 아이들의 눈으로 본다면 오늘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종종 드리는 말씀이지만 절대로 종교적인 행위를 하다가 가지 마십시오. 아이들에게 종교적인 모습만 보여주다가 떠나가지 마십시오. 종교가 한 인간과 한 집안에 준 피해는 어마어마합니다. 잘못된 종교 때문에 나라가 망합니다. 백성이 망하고 국민이 망합니다. 잘못된 종교적인 행위 때문에 내 아이들 대대로 모순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감정도 기분도 결국은 결정적입니다. 지나온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정말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과 기분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거야. 나는 내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을거야" 여러분, 우리 어떤 일을 당할 때, 기분과 감정의 포로가 되어서 천길 만길 떨어집니다. 그런데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면 혹여 나도 내 아이들에게 그런 감정과 기분을 전해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여러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분노와 절망을 걷어내십시오. 분노와 절망 대신에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금부터 다르게 살겠다. 지금 이 시간에 나는 달라졌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부터 두 번 다시 나는 감정과 기분의 포로가 아니라, 내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외칠 수 있는 결단을 하십시오. 믿음의 결단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입니다. 지금 성령의 힘이 운행하실 때에, 모든 낡고 어리석은 생각으로부터 해방되십시오. 때로는 내 자신에 보여주는, 때로는 내가 나를 봐도, 때로는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를 보아도, 때로는 자기 자신도 자신이 보여주는 모습에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영혼의 어디에는 희망의 불씨가 있다고 하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내 아이들에게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물려주지 마십시오.

이삭은 그 자식들을 축복했습니다. 야곱도 그 자식들을 축복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으며 하나님 앞에 받았던 축복과 약속과 비전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중의 최고의 믿음은 자녀들을 축복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절정은 축복하는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도 영원히 대를 이어가고 영원히 남는 믿음은 축복하는 믿음입니다. 신앙의 총결산은 마지막 날 내가 남기는 축복에 의해 판가름납니다. 성도가 가진 가장 위대한 재산은 축복권입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식을 향하여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부모의 손끝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 손끝으로 내 자식을 저주하면 그 자식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손끝으로 내 자식을 축복하면 내 자식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에게 저주의 손을 내밀지 말고, 축복의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는 풍성한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십시오.

좋은 가정에 태어나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좋은 가정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더 좋은 복입니다. 초등학생이 다른 학교로 전학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메가마트에서 물건을 사던 사람이 한솔마트에서 물건을 사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삼성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경동 청구에 산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정에서 살아가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내 가정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건강한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가족들에게 진실한 믿음의 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우상숭배를 자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귀신 섬기는 습관을 물려주었습니다.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는 습관을 주었습니다. 허구헌날 술만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다시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금쪽같은 내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제일 좋은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귀신 섬기는 구습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자식들은 망합니다. 허랑방탕한 모습을 보여주면 자식들은 망합니다.

미국의 어느 곳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은 통나무 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작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위대한 집입니다. 이 집의 후손들이 미국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조나단, 사라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12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11명은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들 후손 5대에 걸친 가계를 조사했더니 1명의 부통령, 3명의 주지사, 3명의 대도시 시장, 13명의 대학총장, 139명의 변호사, 33명의 판사, 116명의 목사와 선교사,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68명의 의사, 66명의 교수, 82명의 고위관리가 배출되었습니다. 조나단, 사라 부부는 믿음으로 결합했고 그 믿음을 유산으로 자손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어야 합니다. 모범 된 믿음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자손만대가 큰 은혜와 복을 받는 믿음의 후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