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처음사랑
- 계 2:1-7 -


▣들어가는 말

에베소 교회는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주님이 아세아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 중에서 첫번 수신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가이스텔 강 어구에 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도의 수도였습니다. 지중해 동부에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가 에베소와 함께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도시들을 로마로 연결하는 육, 해로상의 교차로였습니다. 항구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얼마나 번창하고 화려 했던가를 짐작할 만합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장엄했던 아데미 신전의 폐허에 서서 옛 영화를 더듬느라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정치 상업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 면에서도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체류하면서 전도한 결과 에베소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본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어떤 서신보다도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의 교훈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사랑이 풍성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사랑이 그 주제 입니다.

1.에배소 교회의 장점

1)훌륭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나타내 보이시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장자 유업의 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에베소 교회는 모름지기 아세아 교회의 장자 교회요, 으뜸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아세아에서 일곱교회를 선정하여 편지를 보내십니다. 그 훌륭하고 위대한 교회들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첫번졔 편지의 수신교회가 된것입니다. 계 1:20에 보면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사자라고 합니다. 일곱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완전한 종, 사역자들을 말씀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장로로서 시무했습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신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행위로 주님께 인정 받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인내는 주님이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완전한 교회였습니다.

2)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가려 냈습니다. 진리에도 충만했던 교회였기에 이단사설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3)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로마의 군대가 예수의 이름을 저주하고 배반하면 그에게 영예와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폴리캅은 86년동안 주님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는데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느냐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굳굳하게 화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주님께 인정을 받아 아세아 일곱교회 중에서도 일등교회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본받아 에베소 교회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문제점: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1)위대한 교회의 금촛대를 옮겨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완벽해야 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뼈대와 같고, 기둥과도 같습니다. 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가 뼈대와 같다면, 사랑은 살과도 같습니다. 뼈대가 없을 수 없지만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살이쪄서 뚱뚱한 것도 보기 흉하지만, 바짝 말라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척 보기에 혐오감을 줍니다. 적당하게 살이 오르면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건강합니다. 사랑 받게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생활하라고 권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수분을 섭취하여야 잎이 푸르러 집니다. 수목이 울창한 것은 수분섭취를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무의 수분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생활 속에 체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슴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랑, 일반적인 원칙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이 되는 사랑을 가지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만큼, 얼마나 사랑에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불가불 편지를 써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만큼 사랑이 식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아야 할만큼 위험한 지경에까지 놓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라고 말한 그 사랑입니다.(렘2:2)
신랑이 신부를 맞이 하려는 가슴 설레이는 순간의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으로만 전달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이나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뜨거운 가슴만이 또 다른 가슴을 뜨거웁게 불태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그 가슴 설레이게 하던 기쁨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두 손과 발에 쇠못이 박히고, 온 몸이 갈갈이 찢기어, 방울 방울 선지 피를 흘리며, 나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짊어 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감동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몸을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렇게도 죄악이 더럽고 추해 보이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뜨겁고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저의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 날의 감격, 주님께 대한 그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불타는 정열 다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자지 못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먼길을 걸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후 제 인생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끊임없이 뜨거운 열정이 솟아 올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리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외장쳐 전했습니다. 저의 젊은 날은 입에 풀 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였지만, 벌어 먹기 위하여 일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도 그것이 더 고마웁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후회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복음 위하여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첫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미쳤다고 수군대던 것이 싫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그 때, 그 처음 사랑의 진실이 없습니다. 그 감격도 시들어 가고, 그 기쁨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던 날,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천날을 하루 같이 지냈습니다. 라반의 딸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결혼이 성사 되었습니다. 신방에 들었지만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라헬보다 언니 레아와 먼저 결혼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절망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희망의 샘입니다. 무한한 인내의 샘물을 솟게 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합니다. 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7년을 하루 같이 보낸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세월을 단축시켜 줍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도 이기게 해줍니다. 인내를 주고, 불평 불만을 없애 줍니다. 만사를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도 눈물을 줍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조의 눈물은 실패의 눈물입니다. 슬픈 눈물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아픔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망의 눈물을 줍니다. 감격의 눈물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의 눈물을 줍니다.

(예화) 사랑의 눈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은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하는 클락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매일밤 전도집회를 하는데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놈,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희망을 모두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설교는 형편 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매일밤 5-6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비틀어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나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 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그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몹씨 운 적이 있었답니다. 그 후 그는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했습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의 노력은 성공 했으나 설교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능력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씨를 뿌리려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사랑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맺는말

에베소 교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금촛대는 영원히 옮기어 지고 말았습니다. 옛날 그 교회들의 전성기를 자랑하던 폐허에서 지금은 흔적마저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외양은 훌륭하지만 속이 썩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상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은사의 경험은 많지만 사랑의 경험은 없습니다. 은사는 한국 교인들을 열심있게 하는 반면 교만하고 비뚤어지게 합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성도들, 처음 사랑을 가지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금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