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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웃음은 해악(害惡)인가?
불교 사원에 가보면 거기 있는 불상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원만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지만 가톨릭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괴로워 보이는 모습을 하고 매달려 있습니다. 얼굴 표정까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괴로워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학자는, 불교가 깨달음의 경지를 부드럽고 온화하며 원만한 미소로 표현하는 데 반해서 기독교는 구원의 정점을 고통으로 표현하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저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정점의 순간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고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그것으로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 아니라 환희의 부활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지만 부활은 웃음입니다. 부활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큰 웃음, 곧 하느님의 홍소(哄笑)입니다.
‘웃음’이란 것이 사람들만의 전유물일까요, 아니면 동물이나 식물도 웃을까요? 인간은 짐승이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켜 ‘웃는다’고 하지 않고 ‘운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동물이라고 해서 울고 싶을 때만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순전히 사람들의 편견일 따름입니다.
웃음이라는 것은 그냥 터져 나오는 것이므로 웃음을 참기는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크게 웃는 것을 참아야 할 때는 있지만 대체로 웃는다고 싫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웃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웃음의 의미에 대해 따져보기도 하고 웃음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요즘은 의사들도 웃음이 건강의 필수요소임을 인정합니다. 웃는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가장 좋은 치료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이렇게 좋은 웃음을 나쁜 것으로 보고 금지했습니다. 웃음은 경건한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봤습니다. 웃음은 진지함이 부족한 것이요 하느님에 대한 불경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차례로 죽어갔습니다. 사인은 독극물에 의한 타살이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죽은 수도사들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금서(禁書)들이 보관되어 있는 서고에 몰래 들어가서 책을 읽다가 독살됐습니다. 살해자는 그 금서들을 읽지 못하게 하려는 한 완고한 노 수도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간 수도사들이 읽었던 책은 ‘희극론’ 곧 웃음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때는 웃음을 큰 해악으로 봤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웃음은 고난에서 살아남는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유대인들 말고도 고난의 길을 걸어온 민족이 많이 있고 유대인이 대학살을 경험한 유일한 민족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난의 역사를 온 인류에게 널리 홍보했기 때문에 그들이 고난 받은 민족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좀 얄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가 거짓은 아닙니다. 이들은 이러한 엄중한 고난의 시간을 웃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아는 책은 역시 성경(우리에게는 구약성경)이므로 우스운 얘기들도 성경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든 것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노아는 종족보존을 위해 모든 동물들을 한 쌍씩 방주에 넣었지요. 마지막 날 방주 문이 닫기기 직전에 ‘선’(善)이란 녀석이 방주에 들어가겠다고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노아는 혼자는 들어갈 수 없으니 짝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짝을 찾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짝이 될 만한 녀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아무나 데리고 방주에 들어갔는데 그게 바로 ‘악’(惡)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이 뜻하지 않게 심판에서 살아남았고 선과 쌍을 이루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 사라, 요나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하느님이 웃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웃었다는 얘기도 역시 없습니다. 하긴 사람이 웃었다는 얘기도 거의 없는데 하느님이나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우 드문 예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명인물 중에 - 무명인물도 마찬가지지만 -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었다는 얘기를 남긴 독보적인 인물들입니다. 창세기 17장과 18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었다는 얘기가 연달아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두 사람을 웃게 만든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이 말을 들었던 아브라함은 “내 나이 백 살이고 사라의 나이 구십 살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라고 중얼거리면서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스마엘이나 잘 돌봐 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웃은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이 미더웠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말이 되지 않아 어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다음 장인 18장에는 사라가 웃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소돔 성을 살피러 가다가 아브라함의 집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된 하느님의 사람들(하느님 자신과 혼용되고 있습니다)이 아브라함에게 앞에 했던 얘기와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미더웠기 때문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반복되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 뒤에서 이 대화를 엿듣던 사라가 웃었습니다. 이를 눈치 챈 하느님의 사람이 사라더러 웃었다고 나무라자 사라는 자기는 웃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이에 하느님의 사자는 “아니다. 네가 분명히 웃었다.”고 따지고 들었고 사라도 지지 않고 안 웃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히브리어로 ‘웃음’이란 뜻인데 여기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이 노부부에게 웃음을 안겨줬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웃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곧 이들의 불신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너무 진지하게만 읽어서 그렇지 사실 알고 보면 성경에는 웃기는 얘기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하느님으로부터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니느웨에 가기 싫었습니다. 원수 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몰래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배가 항해하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자 선원들이 이 불행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제비 뽑아 알아보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는 자청해서 바다에 뛰어들어 큰 물고기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회개를 했고 물고기는 그는 바깥으로 토해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하느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왕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니느웨 백성 모두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베옷을 입고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짐승들까지 회개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요나 이야기가 실화인지 픽션인지를 갖고 논쟁했습니다. 실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얘기이므로 꾸며낸 것일 리 없다고 주장했고, 만들어낸 얘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다느니, 짐승들까지 회개했다느니 하는 얘기가 어떻게 실화일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요즘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학자라면 전자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요나 이야기가 실화냐 픽션이냐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요나서가 무엇을 말하려 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이 한 자나 튀어나와 하느님께 따지듯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금방 뉘우치고 벌을 거두실 분임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당장 저를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아무리 원수라 해도 사람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 정상은 아닙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니!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 났다고? 요나 자신도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서 순종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뭐 뭍은 개가 뭐 뭍은 개 나무란다더니 자기도 불순종의 죄를 저지른 주제에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니느웨 사람들을 탓한단 말입니까!
요나서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나서는 사실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내세우고 자랑해왔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고작 요나의 이기적인 신앙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얘기가 바로 요나서입니다. 그 얘기를 요나서는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웃기면서 하는 데 요나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이 싫다고? 그러냐? 근데 그러는 너는 어떤데? 네 주제는 어떤데?” 바로 이것이 요나서입니다.
예수님의 유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웃었다는 얘기가 없지만 예수님은 상당히 자주 웃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것은 그저 ‘희망사항’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에 비추어서 해본 추측이므로 근거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하루는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사실 현실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른다면 율법이야 뭐라고 하든지 끝없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넓은 아량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한도를 정해놓습니다. 보복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용서의 한도를 정하는 일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줘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물음에 대해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21-22). 만일 누가 7×70=490 이라고 계산을 해서 ‘아하, 예수님은 490번까지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초점에서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점은 용서에 횟수 제한을 두려는 생각 그 자체이지, 몇 번 용서하느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용서하는 데 무슨 횟수가 있느냐? 넌 그게 문제야!’하고 면박을 주며 말하지 않고 웃으면서 용서라는 행위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미국에서 통용되는 ‘삼진법’이 옛날에도 있었다면 베드로는 분명 삼진법 때문에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베드로가 겪었을 정신적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읽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세 번 물으신 이유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쉽게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세 번 물으신 이유가 세 번 배신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베드로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때는 이미 예수님이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확고하게 믿으셨습니다. 다만 세 번 물으신 이유는 베드로가 이미 용서받았음을 웃으면서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요?
신앙은 진지하고 책임감 있고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늘 긴장해 있고 메마른 사막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웃는다’는 행위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이고 뭔가는 구별하기 위해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어서는 행위일 때가 많습니다. 늘 엄숙하고 웃지도 않고 인상 쓰고 있는 사람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해서 신이 죽어줬으면 바라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는 철학자 니체는 “내가 보니까 악마는 웃지 않더라.”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이 말이 “신은 죽었다.”는 말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제게는 더 뜻이 깊어 보입니다. 악마는 웃지 않습니다. 웃지 않는 신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웃는 신이 내가 믿는 하느님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웃을 때 웃고 울 때 우는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지금도 좀처럼 웃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엉뚱하지만 내가 하느님을 웃기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왜 나는 하느님을 웃기지 못할까요? 내가 웃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웃지 않으면서 남을 웃기는 사람을 우리는 개그맨이라고 부릅니다. 개그맨은 웃으면 안 됩니다. 자기가 웃으면 남이 웃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개그맨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기도 웃으면서 남도 웃기는 사람, 저는 이런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