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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연합감리교회)
앵커리지 교회들, 목회자들까지도 내가 떠나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도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씨를 성공적으로 뿌려 놓았기에 이제부터는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내 자신 역시도 “이젠 씨를 뿌리던 목회에서 열매를 거두는 목회로 전환을 시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씨를 뿌리는 목회와 열매를 거두는 목회는 다릅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나의 마음 속에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앵커리지를 떠나야 한다는 부담을 받고 난 이후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참으로 많이 가졌습니다. 특별히 매일마다 쌓던 새벽 기도회에서. 그리고 떠나는 것이 성령의 음성이라면 성령께서 친히 주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것에도 나의 인위적인 뜻이 개입되지 못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지난 4월 23-24일에 Walteria UMC의 목사님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나 뵙기 전까지도 나는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Walteria UMC 측에서 나를 만나보기 전에 이미 나의 개척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것을 보고서 앵커리지를 떠나 토랜스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최종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위한 하나님의 성령의 주도적인 손길은 너무나도 치밀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토랜스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Walteria UMC 담임이신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물론 내가 이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Walteria UMC 평신도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격려했던 목사님이시기에 내게 부탁할 조건은 충분히 갖고 계십니다.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일 오전 장년 성경공부 시간에 한국 기독교 역사에 관해 이야기 해 달라. 둘째, 주일 예배 Children’s Moment 시간에 월터리아 교회에 온 이유를 말해 달라. 셋째, 돌아오는 화요일까지 자신에 관한 글을 써서 월보에 기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을 듣고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겠습니까? (회중의 화답) 물론 나의 마음에 큰 부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Yes!” 밖에 없으니까요.
캐트린 목사께서 부탁하신 세 가지 요구 가운데 “월터리아 교회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그 질문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깊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깊은 생각 끝에 어떤 결론을 맺어 Children’s Moment 때 화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회중의 대답) 나의 대답은 “I don’t know why I came here” 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께서는 “개척하러 온 목사가 그것도 모르냐?” 하며 실망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라스카 앵커리지를 출발해서 12일간의 기나긴 여행 동안 내 아내와 교회를 개척하면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는 의견은 많이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나와 내 아내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개척교회 목사로서 어떻게 개척을 진행하고 싶다는 의견은 있습니다. 있을 뿐만 아니라 무척 많다. 그리고 그 의견은 매우 구체적이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개척 교회 표어, 교육 목표, 선교 활동과 목표, 기타 등등 내 머리 속에 환히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I don’t know why I came here”이라 대답했던 것은 나의 생각이나 계획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온전히 일치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곧 내가 “I don’t know why I came here” 라고 대답한 이유는 개척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의 성령의 주도권에 절대적으로 맡기려는 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 그리고 가라!”고 명령하실 때 아브람의 앞길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앞으로 진행해 나간다면 훗날에 어떠한 축복(무수한 후손의 축복, 이름의 명예를 얻는 축복,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축복과 저주를 행사할 수 있는 영적 권위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행동 지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아브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든 지역을 떠나가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곧 길을 떠난 아브람 역시 길을 떠난 후 첫날 머물던 곳에서 “I don’t know why I came here” 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에 관하여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even though he did now know where he was going).” 그래도 나는 아브람 보다는 낫습니다. 머물러야 할 장소는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가는 아브람! 여러분은 아브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멋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브람을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글쎄 나는 그러한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 혹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치켜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전에는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을 보면서 현재의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고백인데,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나도 없는 미지의 땅에서 교회를 개척하겠다며 5년 동안 열심히 씨를 뿌렸던 앵커러지를 떠난 나를 향해 멋 있는 사람, 혹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해주는 사람은 사실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무모한 결정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지난 번 연회 참석차 갔더니 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목회자들 역시 너무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면서 다시 생각해보라 권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은 개척할 때가 아니라 기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 때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내 가족을 생각하노라면 고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알라스카의 추운 곳에서 지금까지 몸과 마음 고생시킨 것이 얼마인데, 개척하겠노라면서 더욱 고생의 길로 인도하는 내 자신을 멋 있는 가장 혹은 용기 있는 가장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이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면서 나와 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를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이 그의 결정에 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서 말하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는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을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보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이유는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편안한 삶을 접고서 고생의 길을 향해 떠나게 된 배경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된 이유였습니다.
내가 앵커리지를 떠나게 된 이유는 나와 나의 가족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떠나가라 하신다면 언제든지 떠나가고자 합니다. 어디를 향해?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길을 떠나갈 것입니다. 길을 떠나가면서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행동 지침서는 내가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날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인정하며 살아가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대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찾은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찾은 바 된 인생! 그 인생이야말로 멋 있는 인생이요, 용기 있는 인생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이요, 용기 있는 사람이며, 나의 평생 본 받고 싶은 신앙의 이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 찾은 바 된 인생이 되고 싶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삶의 주도권을 양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갖기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욱 큰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 고귀한 아버지 (noble father, exalted father)” 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별로 나쁜 이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의 뜻보다 더 큰 사람으로 아브람을 만들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의 삶의 주권을 양도하라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을 때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무리의 아버지 (father of a multitude, or chief of multitude)” 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한평생 “아브람 (존귀한 자)”이 되는 꿈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존귀한 자!” 누구를 위해 존귀한 자가 된다는 말인가요? 자신을 위한 존귀가 아닌가요? 사실 자신을 위한 명예나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됩시다. 열국의 아비가 됩시다. 수많은 민족, 수많은 나라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면서 살아가는 큰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오늘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까지도 친히 인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의 성령의 절대적인 인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합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세우지 않았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시는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문도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에 모인 사람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께서 그 교회의 문을 여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겐 오래 전부터 개척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척은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이루고자 교회를 세운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굳이 “교회” 라는 간판을 달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주식회사” 혹은 “비영리 단체” 라는 간판을 달아 놓으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열어주셔야 합니다. 나는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열어 주신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개척을 위해 헌신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렸을 때, “열국의 아비” 라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듯,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성령의 주도권에 자신들을 내어 맡겼을 때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았듯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되어 크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앵커리지 교회들, 목회자들까지도 내가 떠나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도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씨를 성공적으로 뿌려 놓았기에 이제부터는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내 자신 역시도 “이젠 씨를 뿌리던 목회에서 열매를 거두는 목회로 전환을 시도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씨를 뿌리는 목회와 열매를 거두는 목회는 다릅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나의 마음 속에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앵커리지를 떠나야 한다는 부담을 받고 난 이후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참으로 많이 가졌습니다. 특별히 매일마다 쌓던 새벽 기도회에서. 그리고 떠나는 것이 성령의 음성이라면 성령께서 친히 주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것에도 나의 인위적인 뜻이 개입되지 못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지난 4월 23-24일에 Walteria UMC의 목사님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만나 뵙기 전까지도 나는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Walteria UMC 측에서 나를 만나보기 전에 이미 나의 개척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것을 보고서 앵커리지를 떠나 토랜스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최종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위한 하나님의 성령의 주도적인 손길은 너무나도 치밀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토랜스에 온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Walteria UMC 담임이신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물론 내가 이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Walteria UMC 평신도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격려했던 목사님이시기에 내게 부탁할 조건은 충분히 갖고 계십니다.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일 오전 장년 성경공부 시간에 한국 기독교 역사에 관해 이야기 해 달라. 둘째, 주일 예배 Children’s Moment 시간에 월터리아 교회에 온 이유를 말해 달라. 셋째, 돌아오는 화요일까지 자신에 관한 글을 써서 월보에 기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 캐트린 목사님의 부탁을 듣고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겠습니까? (회중의 화답) 물론 나의 마음에 큰 부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Yes!” 밖에 없으니까요.
캐트린 목사께서 부탁하신 세 가지 요구 가운데 “월터리아 교회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그 질문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깊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깊은 생각 끝에 어떤 결론을 맺어 Children’s Moment 때 화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회중의 대답) 나의 대답은 “I don’t know why I came here” 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께서는 “개척하러 온 목사가 그것도 모르냐?” 하며 실망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라스카 앵커리지를 출발해서 12일간의 기나긴 여행 동안 내 아내와 교회를 개척하면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는 의견은 많이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나와 내 아내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개척교회 목사로서 어떻게 개척을 진행하고 싶다는 의견은 있습니다. 있을 뿐만 아니라 무척 많다. 그리고 그 의견은 매우 구체적이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개척 교회 표어, 교육 목표, 선교 활동과 목표, 기타 등등 내 머리 속에 환히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I don’t know why I came here”이라 대답했던 것은 나의 생각이나 계획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온전히 일치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곧 내가 “I don’t know why I came here” 라고 대답한 이유는 개척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의 성령의 주도권에 절대적으로 맡기려는 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 그리고 가라!”고 명령하실 때 아브람의 앞길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앞으로 진행해 나간다면 훗날에 어떠한 축복(무수한 후손의 축복, 이름의 명예를 얻는 축복,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축복과 저주를 행사할 수 있는 영적 권위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행동 지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아브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든 지역을 떠나가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곧 길을 떠난 아브람 역시 길을 떠난 후 첫날 머물던 곳에서 “I don’t know why I came here” 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에 관하여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even though he did now know where he was going).” 그래도 나는 아브람 보다는 낫습니다. 머물러야 할 장소는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가는 아브람! 여러분은 아브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멋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브람을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글쎄 나는 그러한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 혹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치켜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전에는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을 보면서 현재의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고백인데,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나도 없는 미지의 땅에서 교회를 개척하겠다며 5년 동안 열심히 씨를 뿌렸던 앵커러지를 떠난 나를 향해 멋 있는 사람, 혹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해주는 사람은 사실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무모한 결정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지난 번 연회 참석차 갔더니 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목회자들 역시 너무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니냐면서 다시 생각해보라 권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은 개척할 때가 아니라 기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 때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내 가족을 생각하노라면 고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알라스카의 추운 곳에서 지금까지 몸과 마음 고생시킨 것이 얼마인데, 개척하겠노라면서 더욱 고생의 길로 인도하는 내 자신을 멋 있는 가장 혹은 용기 있는 가장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이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면서 나와 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를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이 그의 결정에 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서 말하는가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는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을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보기로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이유는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편안한 삶을 접고서 고생의 길을 향해 떠나게 된 배경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된 이유였습니다.
내가 앵커리지를 떠나게 된 이유는 나와 나의 가족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떠나가라 하신다면 언제든지 떠나가고자 합니다. 어디를 향해?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길을 떠나갈 것입니다. 길을 떠나가면서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행동 지침서는 내가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날마다 새벽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인정하며 살아가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대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찾은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찾은 바 된 인생! 그 인생이야말로 멋 있는 인생이요, 용기 있는 인생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아브람을 멋 있는 사람이요, 용기 있는 사람이며, 나의 평생 본 받고 싶은 신앙의 이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 찾은 바 된 인생이 되고 싶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삶의 주도권을 양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갖기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욱 큰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 고귀한 아버지 (noble father, exalted father)” 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별로 나쁜 이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의 뜻보다 더 큰 사람으로 아브람을 만들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의 삶의 주권을 양도하라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을 때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무리의 아버지 (father of a multitude, or chief of multitude)” 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한평생 “아브람 (존귀한 자)”이 되는 꿈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존귀한 자!” 누구를 위해 존귀한 자가 된다는 말인가요? 자신을 위한 존귀가 아닌가요? 사실 자신을 위한 명예나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됩시다. 열국의 아비가 됩시다. 수많은 민족, 수많은 나라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면서 살아가는 큰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오늘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까지도 친히 인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의 성령의 절대적인 인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합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세우지 않았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시는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문도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에 모인 사람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께서 그 교회의 문을 여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겐 오래 전부터 개척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척은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이루고자 교회를 세운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굳이 “교회” 라는 간판을 달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주식회사” 혹은 “비영리 단체” 라는 간판을 달아 놓으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열어주셔야 합니다. 나는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열어 주신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개척을 위해 헌신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렸을 때, “열국의 아비” 라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듯,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성령의 주도권에 자신들을 내어 맡겼을 때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온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았듯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되어 크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