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목사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길을 떠났던 아브람은 가나안 지역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세겜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에 깊게 간섭하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뜨거운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려오면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단을 쌓는 아브람.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 열심,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아브람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다는 것, 곧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올려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헌신, 사랑의 정도를 나타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대로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예배에 성공한 인생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단을 쌓으며 살았던 아브람에게 어느날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2년이 되었을 무렵, 가나안 전역에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했던지라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토를 뒤에 남겨두고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의 가족 역시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피난 떠나가는 이민자 행렬에 끼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0절). 그는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 가족에 충실한 가장으로서 마땅히 선택해야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령 아브람이 그렇게 믿었다 할지라도,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어긋날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의 행동은 여러 가지의 좋지 못한 불순종의 결과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첫째로, 애굽에 내려간 아브람은 그곳 사람들로부터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애굽 왕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두려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이 애굽 사람들과 애굽 왕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까? 근본 이유는 그가 거하지 않아야 할 곳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람이 충실했다면 굳이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애굽 백성들과 애굽 왕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에겐 세상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당당한 자세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둘째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2-13절). 아리따운 아내 사래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부부관계가 아닌 오빠와 누이 관계로 소개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가 섞인 거짓말입니다.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힘든 교묘한 거짓말입니다. 사실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 누이 동생임은 사실입니다.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창 20:12). 아버지 데라에게 몇 명의 처들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 처들 중 하나의 딸이었습니다. 곧 아브람과 사래의 관계는 배다른 오빠와 누이 동생 관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애굽 사람들에게 사래를 누이 동생으로 소개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는 사래를 누이 동생이라 소개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래가 자신의 이복 동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사래를 “이는 나의 아내라” 라고 애굽 사람들에게 소개했어야 합니다. 설령 사래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생존을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참
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도 좋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짓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출세를 위하여, 사업 성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거짓말 합니까? 그렇지는 않죠? 우리는 아무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참을 참이라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말해야 합니다.
셋째로, 아브람이 애굽 왕에게 사래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 동생으로 거짓 되이 소개함으로써 큰 재물을 얻었습니다.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16절). 애굽행은 아브람을 위하여 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성공했으니까요. 단숨에 말입니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말입니다. 비록 양심은 쓰리고 아팠을지라도. 그런데 정말 아브람은 애굽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말할 있습니다. 아주 현명하게 (교묘하게) 처신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인생역전의 멋진 삶을 일구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성공은 사실 사래의 몸값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내의 몸값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내를 애굽 왕에게 팔아서 성공을 검어 쥔 것입니다.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이니라” (15절 하반절). “취하여 들이다”는 “사다, 데려 오다”는 뜻으로 쓰인 히브리어 라카흐입니다. 바로는 아브람에게 돈을 주고 사래를 사서 자신의 후궁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얻은 부귀 영화를 성공이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고 취한 불의의 삯입니다. 그것은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가룟 유다가 손에 쥐었던 은 삼십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저버리고 천하를 얻는들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이와 같은 시험이 있었습니다. 사탄이 자신에게 절을 한번만 하기만 하면 천하를 주겠다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리라” (마 4: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재물을 얻고 편안히 사는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불이익이 다가오거들랑 거부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지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넷째로, 아브람의 불순종은 바로와 그 집에 하나님으로부터 독한 재앙이 임하도록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7절). 성경은 바로와 그의 집에 임한 재앙이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재앙을 당한 바로가 그것이 보통의 재앙이 아님을 금방 깨달았던 것으로 보아서 매우 심각한 재앙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아브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 보다 오히려 화(저주)의 근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갔을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화의 근원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복을 나누어주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아브람의 불순종은 바로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18, 19절 상반절).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뭉개지는 하나님의 사람의 자존심이여!” 실로 초라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거짓말에 대한 질책을 받다니. . . “당신네들, 그렇게 살아가면 안됩니다” 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 오히려 세상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훈계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훈계와 질책을 받는 처지입니까? 우리는 삶의 정도를 가르쳐 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참된 삶의 교훈입니다.

여섯째, 아브람의 불순종은 결국 애굽에서 아브람이 불명예롭게 쫓겨나도록 했습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20절). “보내었더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솨라흐인데, 이것은 대부분 “보내 버리다, 내던지다”는 의미로 쓰인 동사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는 자신의 의지로 걸어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이방 사람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고 내쫓김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 우리로부터 배울 것이 있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 말 속에 담긴 삶의 지혜가 있기에. 우리와 함께 있으면 소망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기에.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가족 때문에, 사업 때문에, 친구 때문에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수 있습니다. 변명을 통해 말씀과는 어긋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신앙의 양심을 달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변명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날 심판좌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변명을 충분히 들으시고 우리 삶에 대한 판결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말씀에 순종했던 우리의 삶에 대해 주실 상급을 결정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변명 보다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설령 굶주려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겠노라 결단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다 굶주려 죽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순교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과 가족에게 편안한 생활,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길은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두 아들들에게 좋은 교육, 좋은 삶의 환경을 제공해 주려 하기 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아빠로서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 역시 그 환경을 친히 증거해 줍니다.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할지라도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바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 생각과 행동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주어진 열악한 환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느냐를 시험하는 환경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하려 하지 말고, “상황이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고 말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