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세상 안에서 살지만 세상을 본받지 말라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를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 따로 모여서 살 수도 없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붉은 색이면 붉게 물들게 마련이고 검은 색이면 검게 물들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면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제 정신을 갖고 산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자네,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아무리 내 삶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해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 믿음은 어딘가 이상해. 잘못됐어. 그렇게 믿는 거 아냐.”라고 말하면 아무리 내 믿음에 확신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2-30년 전, 그러니까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는 “현대는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다.”라는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라는 말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급격하게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외부에서 물밀듯 밀려 들어온 자본주의적 가치가 충돌을 일으켜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전통적 가치를 따르자니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어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자니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가치들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치관의 혼란’이란 말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가치관이 혼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치관이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가치는 ‘돈이 되는 것’과 ‘돈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눠집니다. 돈이 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돈이 되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신문을 보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주로 인문학부의 교수들이 하는 얘기인데 한국 사회에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인문학을 쉽게 ‘인간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학문 분야’라고 정의해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말은 인간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인문학이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학과로 학생들이 몰려가고 인문학 같이 돈 버는 데는 쓸모가 없는 학과에는 학생들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기는 이런 현상이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인문학의 위기가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몇 번 오셔서 강의해주신 적이 있는 어떤 신학 교수님이 얼마 전에 “요즘은 우리 학교에 똑똑한 학생들이 잘 오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똑똑한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간다는 뜻만은 아니고 그들이 신학이나 철학 같은 학문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학생들은 경영대학원이나 의과대학에 모두 몰려 있는 모양입니다.


기복신앙이 정말 문제인가?

가치관이 혼란했던 시대에는, 그러니까 약 2-30년 전에는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문제시하고 경계했던 한국 그리스도교의 병폐는 ‘기복신앙’이었습니다. 기복(祈福)신앙이란 말 그대로 복을 구하는 신앙, 또는 복을 기원하는 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라고 했고 동시에 뿌리 뽑아야 병폐라고 근심 어린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계 4대 종교를 포함해서 기복종교가 아닌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종교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말이나 행위로 절대자에게 복을 비는 행위는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로 하면 ‘기도’가 되고 행위로 하면 ‘제사’ 또는 ‘예배’가 되겠지요. 기도와 예배가 우리네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이 종교마다 모두 같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들이 기복신앙을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점들입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복은 분명 물질적인 복입니다. 여러 방들을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부인들과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는 많은 자식들, 그리고 넓은 축사에 가득 들어차 있는 수많은 가축들,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당시 모든 민족들이 그렇게 믿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당연히 그랬고 이삭, 야곱, 요셉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복을 말할 때 여기서 그친다면 그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 본 것입니다. 복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복의 흐름’입니다. 구약성경의 복을 말할 때 복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절반 밖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읽은 저 유명한 창세기 1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I will bless you, and make your name great,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복의 수혜자’(受惠者)이자 동시에 ‘시혜자’(施惠者)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에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와서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복은 흘러야 합니다. 만일 복이 멈춰 있으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구약성경의 복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물질의 복이 흐르는 방향은 물이 흐르는 방향처럼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모든 족속에게로 흐르는 것이 물질적인 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흐르지 않는 복도 썩어 ‘저주’가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의 피와 물도 잘 흐르고 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합니다. 피와 물이 잘 흐르지 않으면 병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물질의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흘러야 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질의 복은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내일 죽어도 좋으니 오늘 하루라도 실컷 돈 쓰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어려우면 저렇게 말할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저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입에 달다고 해서 사탕을 입에 물고 살면 금방 몸이 망가지고 맙니다. 물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부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리도 흐르지 않는 물질적 부는 반드시 썩어서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망가뜨리고 맙니다.




아래서 위로 흐르는 복

구약성경의 복은 이렇듯이 물질의 복입니다. 그리고 같은 뜻의 복이 신약성경 시대로도 크게 바뀌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복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구약성경의 복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와는 다른 별도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첫 마디에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또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 복은 물질의 복과는 다른 복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은 물질의 복과는 확실히 구분됩니다. 물질의 복을 갖고 있다고 해서 영적인 복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해도 영적으로 가난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물질적으로는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영적으로 부유할 사람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가난할까요? 그리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가난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부가 영적인 부를 담보(擔保)하지 않듯이 영적인 부가 반드시 물질적 가난이라는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부유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영적인 복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이 복이 흐르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복은 물질의 복과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질의 복과는 반대로 영적인 복은 아래서 위로 흐릅니다. 물질의 부는 많이 가질수록 부자이지만 영적인 복은 가난할수록 부자입니다. 이 사람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의 흐름을 보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백성이 당신의 뜻을 거스르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복 주시려고 선택한 백성을 하나님 자신이 망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일부를 ‘남은 자들’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썩은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입니다. 그들이 바로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히브리어로 ‘아나빔 야훼’)이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뜻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곧 오로지 야훼 하나님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아나빔 야훼’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인 복은 아나빔 야훼에게서, 곧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위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복 받고 싶으세요?’입니다. 좀 ‘촌스런’ 제목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 받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을 여러분 안에 머물게 하지 말고 밖으로 흐르게 하십시오. 먼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대부분은 물질적인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생존의 경계선 상에 서 있지는 않습니다. 흐르게 할 여유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복을 흐르게 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모두 영적인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매주일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있고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도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흐르게 하십시오. 물도 흘려보내야 새로운 물을 받아들일 수 있듯이 복도 흘려보내야 새로운 복을 받을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신앙의 새로운 면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을 흘려보내십시오. 위로 아래로 흘려보내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습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 (2006년 10월 22일 / 성령강림절 스물한 번째 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