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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개척될 수 있도록 건물을 제공하고 있는 OOOO 연합감리교회는 교인들 거의 대부분이 노령층에 속합니다. 평균 연령이 아마도 60세 이상은 훨씬 더 되어 보입니다. 연로하신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 참으로 애를 많이 쓰고 계십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교세가 300명 이상이었습니다). 매 금요일 저녁에는 “Kid’s Club”을 열어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와서 재미 있는 시간을 제공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고,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는 “Prayer Chain(길거리에 나가서 손에 손을 연결하여 기도 연쇄고리를 형성)”을 하고,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는 무숙자들(Homeless People)을 교회로 초대하여 “Hot Meal (간단한 점심)”을 제공하고 있으며, 매주일 아침과 저녁 시간에 성경공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열심을 가지고 목회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사님의 노력과는 달리 교회는 성장을 향한 회복 기미가 밝게 보이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열심과는 달리 성장이나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 보려는 교인들의 열정이 아직까지는 달구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주된 관심은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에 어떻게 충실할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엔 무척 열심입니다.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 뺨칠 정도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과 열심이 있는 분야에 남들이 끼어 드는 것을 꺼려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교회가 미래 지향적이기 보다는 과거와 현실 만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이러한 흐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연세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무려 75세였습니다. 75세!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인생의 새 꿈을 받아 들이기엔 그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 나이가 되면 변화보다는 처해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 집니다. 마치 OOOO 연합감리교회 연로하신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75세의 아브람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시간에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지난날 삶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정리해야 할 시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에 생의 변화를 추구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유형을 청산해 버리고,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는 결단입니다. 75세의 연로한 나이의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하지만 그는 큰 결단을 내렸는데, 그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했습니다. 나이나 처한 상황을 불문하고.
나는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임을 압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로서 아브람을 본받아 결단하기 원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으로 화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시할 땅으로 떠나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삶으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역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기 바랍니다. “어떻게?” “어디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리라 믿고서 결단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으로 화답한 아브람은 서둘러 짐을 꾸린 이후 마침내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5절).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면 그냥 안주해 버리기 쉽습니다. 결단했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혹시 앞으로의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와 걱정 근심은 다른 보따리에 싸서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단하며 떠나가는 내 인생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해야 합니다. 결단은 심사숙고해서 내려야 하지만, 결단에 대한 후속 반응은 빨라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만족시키려 하려면 인생 끝 날이 다가와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싶어도 떠나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면서. . .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신학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 올 때,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에 진학할 때, 첫 목회지인 알라스카 앵커리지로 떠나갈 때, 그리고 캘리포니아 토랜스에 개척하기 위해 떠나올 때,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기에 떠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떠날 때는 막막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현실에 적응해야 할지, 어떻게 학비는 충당할 것이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다고 나의 배경이 좋아 확실한 재정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염려 걱정 근심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은 친히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분명히 확실합니다. 캘리포니아 토랜스에서 개척하는 과정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필요를 채워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을.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에 이를 때까지도 자신이 밟고 있는 그 땅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그가 가나안 지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세겜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믿고 길을 떠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확실한 이후에 길을 떠나겠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길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길을 떠나가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이 확실해집니다.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노라면 특별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람, 환경, 성경 말씀, 기도 가운데 주어지는 영감의 소리를 통하여. 참으로 신비스러울 만큼 하나님의 음성은 정확한 시기에 들려옵니다. 신비의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새로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단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리하여 아브람처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십시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 올려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7절).
아브람은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자신을 새로운 삶의 여정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무수한 단을 쌓았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 누구보다도 많은 단을 쌓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추측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근거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화신(火神)의 열렬한 신봉자였습니다. 데라의 장자인 아브람은 아버지의 사업 뿐만 아니라 그의 우상을 섬기는 신앙까지 물려받았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겜 땅으로 들어온 아브람은 지금껏 자신이 섬겼던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러도 대답 없는 죽은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살아 계셔서 친히 말씀하시며 자기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해 들어오신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단을 쌓는다(to build an altar)”는 말은 오늘날 의미로 해석하면 “예배 드린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아브람처럼 “그[우리]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며 살아갑시다. 맹목적인 예배는 이제 멈추십시다. 습관적인 예배는 멈춥시다. “주일에는 교회 가야 한다”는 계율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석하는 예배는 멈춥시다. 한 시간 예배 시간에 참석하면 신앙의 양심이 편하니까 드리는 예배는 멈춥시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립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단[드리는 예배]이란 하나님께서 예배의 중심에 계시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위로 받기 위해 드리는 예배, 마음 편해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내어드린다는 헌신의 결단하는 예배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브람이 단을 쌓는 과정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는 먼저 돌을 모아다가 제단을 만듭니다. 그리고 짐승을 제물로 잡아 그것의 피를 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기름이나 고기를 단 위에 올려 놓은 후 불을 피워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태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잡아 올려놓고 불태우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예배 준비를 한 이후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 드려지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지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기쁨을 위하여, 자기 영광을 위하여 단을 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많은 예배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기 기쁨을 위하여, 자기 마음의 위로를 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자신에게 위로와 축복이 되는 말씀, 은혜로운 성가대나 기도, 훌륭하게 짜여진 예배 순서가 제공되면 “오늘 예배 참으로 좋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예배 시간일까요? 그 예배 시간에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하나님? 아니면 예배자 자신? 참으로 불행하게도 수많은 예배에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앉아 계실 자리에 예배자가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섬기는 자로 밀려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위로하고 은혜와 감동을 주는 분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왜 그런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위에 무릎 꿇고 드리던 옛날의 예배가 그립습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노라니 조그마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수많은 예배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영적으로 한 가족임을 체험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예배 분위기는 경건하면서도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때의 예배는 분명히 하나님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그곳에 모인 무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곳에 모였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제물로 올려 드리겠노라 결단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120명의 무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있던 마가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드린 예배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 그 장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 그 장소에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올려 드려지고 있는 우리의 예배는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요? 예배자인 우리 자신들?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
우리 모두가 아브람처럼 성공한 예배,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하기 원합니다. 물론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예배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끝으로 예배 준비의 ABC(기본)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내내 예배자의 관심과 초점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데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하러 나올 때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올려 드릴 예물은 집에서부터 준비해서 성경책에 넣고, 예배시간 20-30분부터 교회에 나와 지난 한 주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참회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 드릴 바에야 아벨이 드렸던 제사처럼 온전한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를 올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인의 제사처럼 준비되지 않는 예배, 자신의 헌신이 결여된 예배,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결국은 가인처럼 마음에 허탈감, 미움, 분노 그리고 살인 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배에 성공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처럼 예배에 성공한 인생 살아가기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한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개척될 수 있도록 건물을 제공하고 있는 OOOO 연합감리교회는 교인들 거의 대부분이 노령층에 속합니다. 평균 연령이 아마도 60세 이상은 훨씬 더 되어 보입니다. 연로하신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는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 참으로 애를 많이 쓰고 계십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교세가 300명 이상이었습니다). 매 금요일 저녁에는 “Kid’s Club”을 열어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와서 재미 있는 시간을 제공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고,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는 “Prayer Chain(길거리에 나가서 손에 손을 연결하여 기도 연쇄고리를 형성)”을 하고,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는 무숙자들(Homeless People)을 교회로 초대하여 “Hot Meal (간단한 점심)”을 제공하고 있으며, 매주일 아침과 저녁 시간에 성경공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열심을 가지고 목회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사님의 노력과는 달리 교회는 성장을 향한 회복 기미가 밝게 보이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열심과는 달리 성장이나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 보려는 교인들의 열정이 아직까지는 달구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주된 관심은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에 어떻게 충실할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엔 무척 열심입니다.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 뺨칠 정도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과 열심이 있는 분야에 남들이 끼어 드는 것을 꺼려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교회가 미래 지향적이기 보다는 과거와 현실 만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이러한 흐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연세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무려 75세였습니다. 75세!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인생의 새 꿈을 받아 들이기엔 그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 나이가 되면 변화보다는 처해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 집니다. 마치 OOOO 연합감리교회 연로하신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75세의 아브람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시간에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지난날 삶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정리해야 할 시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에 생의 변화를 추구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유형을 청산해 버리고,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는 결단입니다. 75세의 연로한 나이의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하지만 그는 큰 결단을 내렸는데, 그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했습니다. 나이나 처한 상황을 불문하고.
나는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임을 압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로서 아브람을 본받아 결단하기 원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으로 화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시할 땅으로 떠나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삶으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역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기 바랍니다. “어떻게?” “어디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리라 믿고서 결단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으로 화답한 아브람은 서둘러 짐을 꾸린 이후 마침내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5절).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면 그냥 안주해 버리기 쉽습니다. 결단했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혹시 앞으로의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와 걱정 근심은 다른 보따리에 싸서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단하며 떠나가는 내 인생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해야 합니다. 결단은 심사숙고해서 내려야 하지만, 결단에 대한 후속 반응은 빨라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만족시키려 하려면 인생 끝 날이 다가와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싶어도 떠나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면서. . .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신학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 올 때,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에 진학할 때, 첫 목회지인 알라스카 앵커리지로 떠나갈 때, 그리고 캘리포니아 토랜스에 개척하기 위해 떠나올 때,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기에 떠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떠날 때는 막막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현실에 적응해야 할지, 어떻게 학비는 충당할 것이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다고 나의 배경이 좋아 확실한 재정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염려 걱정 근심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은 친히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분명히 확실합니다. 캘리포니아 토랜스에서 개척하는 과정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필요를 채워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을.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에 이를 때까지도 자신이 밟고 있는 그 땅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그가 가나안 지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세겜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믿고 길을 떠나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확실한 이후에 길을 떠나겠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길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길을 떠나가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이 확실해집니다.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노라면 특별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람, 환경, 성경 말씀, 기도 가운데 주어지는 영감의 소리를 통하여. 참으로 신비스러울 만큼 하나님의 음성은 정확한 시기에 들려옵니다. 신비의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새로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단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리하여 아브람처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십시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 올려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7절).
아브람은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자신을 새로운 삶의 여정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무수한 단을 쌓았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 누구보다도 많은 단을 쌓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추측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근거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화신(火神)의 열렬한 신봉자였습니다. 데라의 장자인 아브람은 아버지의 사업 뿐만 아니라 그의 우상을 섬기는 신앙까지 물려받았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겜 땅으로 들어온 아브람은 지금껏 자신이 섬겼던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러도 대답 없는 죽은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상에게 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살아 계셔서 친히 말씀하시며 자기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해 들어오신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단을 쌓는다(to build an altar)”는 말은 오늘날 의미로 해석하면 “예배 드린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아브람처럼 “그[우리]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며 살아갑시다. 맹목적인 예배는 이제 멈추십시다. 습관적인 예배는 멈춥시다. “주일에는 교회 가야 한다”는 계율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석하는 예배는 멈춥시다. 한 시간 예배 시간에 참석하면 신앙의 양심이 편하니까 드리는 예배는 멈춥시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립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단[드리는 예배]이란 하나님께서 예배의 중심에 계시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위로 받기 위해 드리는 예배, 마음 편해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내어드린다는 헌신의 결단하는 예배가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브람이 단을 쌓는 과정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는 먼저 돌을 모아다가 제단을 만듭니다. 그리고 짐승을 제물로 잡아 그것의 피를 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기름이나 고기를 단 위에 올려 놓은 후 불을 피워 위에 놓여 있는 제물을 태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잡아 올려놓고 불태우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예배 준비를 한 이후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 드려지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쳐지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기쁨을 위하여, 자기 영광을 위하여 단을 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많은 예배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기 기쁨을 위하여, 자기 마음의 위로를 위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자신에게 위로와 축복이 되는 말씀, 은혜로운 성가대나 기도, 훌륭하게 짜여진 예배 순서가 제공되면 “오늘 예배 참으로 좋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예배 시간일까요? 그 예배 시간에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하나님? 아니면 예배자 자신? 참으로 불행하게도 수많은 예배에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앉아 계실 자리에 예배자가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섬기는 자로 밀려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위로하고 은혜와 감동을 주는 분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왜 그런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위에 무릎 꿇고 드리던 옛날의 예배가 그립습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노라니 조그마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수많은 예배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영적으로 한 가족임을 체험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예배 분위기는 경건하면서도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때의 예배는 분명히 하나님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그곳에 모인 무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곳에 모였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제물로 올려 드리겠노라 결단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120명의 무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있던 마가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드린 예배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 그 장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 그 장소에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올려 드려지고 있는 우리의 예배는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요? 예배자인 우리 자신들?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
우리 모두가 아브람처럼 성공한 예배,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하기 원합니다. 물론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예배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끝으로 예배 준비의 ABC(기본)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내내 예배자의 관심과 초점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데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하러 나올 때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올려 드릴 예물은 집에서부터 준비해서 성경책에 넣고, 예배시간 20-30분부터 교회에 나와 지난 한 주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참회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 드릴 바에야 아벨이 드렸던 제사처럼 온전한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를 올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인의 제사처럼 준비되지 않는 예배, 자신의 헌신이 결여된 예배,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결국은 가인처럼 마음에 허탈감, 미움, 분노 그리고 살인 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배에 성공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처럼 예배에 성공한 인생 살아가기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한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