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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를 부르는 4대 요인 (마가복음 5장 25-34절)
< 기적의 목적 >
오늘날은 능력이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성도들도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삶이란 초차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과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전혀 개념이 다릅니다. 사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의 주인공처럼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과시와 자랑을 목적으로 기적을 추구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기적의 목적에는 대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려는 목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을 알려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목적입니다. 즉 치유의 주 목적은 육신의 건강 유지가 아니라 육신의 치유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기적이 필요하지만 그 기적의 목표는 세상적인 영달이 아닙니다. 갑자기 떼돈을 버는 기적,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기적, 성공을 위해 점을 쳐주는 기적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기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입니다. 강퍅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녹아지고, 고집불통이 온유해지고, 무도한 사람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기적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은 시시하게 생각하고 갑자기 떼돈 벌었다는 소리만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한 나쁜 것을 끊는 기적도 필요합니다. 술과 담배와 도박과 마약을 끊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또한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는 것도 기적입니다. 흔히 “목회자는 3가지만 멀리하면 목회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3가지란 돈, 여자, 명예입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생활을 끝까지 잘하려면 돈, 이성, 명예의 3가지 욕심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첫째, 돈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돈 거래를 하지 말고, 성도들 간에는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도 없어야 하고, 계를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또한 돈을 목적으로 인맥을 쌓고 식당 손님 유치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교회에서는 철저히 받을 생각보다는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이번에 출판한 책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를 내면서 미션퍼블릭 팀에서는 “이익금으로 선교하자!”라고 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처음 출판한 책이라서 그냥 주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판매하는 경우도 반 가격에 주고, 택배비도 우리가 부담하니까 몇몇 팀원들이 “목사님! 그러다가는 선교는커녕 출판비도 못 건져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문서선교가 목적이지 이익이 목적이 아니니까 그 문제에 대범해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을 생각보다는 베풀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둘째, 이성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한 순간에 눈이 맞으면 그걸로 인생도 종치고, 교회생활도 종치게 됩니다. 성도 간에는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절대 집적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은 제비족과 꽃뱀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도 유혹의 그물을 쳐놓고 말 한 마디 슬쩍 슬쩍 던지면서 유혹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혐오하고, 그 유혹에 절대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명예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생활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명예욕입니다. 왜 교회에 파당이 생깁니까? 명예욕 때문입니다. 왜 보수파와 진보파로 갈라져 싸웁니까? 그것도 명예욕 때문입니다. 왜 시험에 듭니까? 대개 명예욕 때문입니다. 성도가 명예욕만 줄이면 시험을 현저히 줄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이 3가지만 멀리하면 목회도 잘할 수 있고, 교회생활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도 인간의 본능을 이겨낸 일종의 기적입니다. 또한 힘든 상황에서 마음을 잘 관리하고 극복하는 것도 기적이고, 싫은 소리를 잘 참아내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치유를 일으키는 4대 요인 >
오늘 본문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혈루증은 고통스런 질병이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유사한 질병이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 이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인처럼 우리도 마음의 혈루증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런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1. 강렬한 소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삶에 대한 줄기찬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불치병으로 고난을 당하면서 치료를 위해 애썼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종교도 그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외면하고 나환자처럼 격리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과 한 상에 둘러앉아 함께 있을 수 있는 행복마저 빼앗겼습니다.
이 정도만 되면 웬만한 사람은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의 소원 때문에 이 여인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매사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예배도 항상 하던 대로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기도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강한 소원을 가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소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원은 축복의 기초입니다. 소원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보통 이상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제 강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정과 자녀가 크게 쓰임 받는 가정과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적극적인 소원과 뚜렷한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편 81편 10절에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인생이라도 간절한 마음과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템플 대학교를 세운 러셀 콘웰 박사가 백만장자 4043명을 조사했는데 그 중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69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특징을 조사해 보았는데 3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둘째, 그 목표를 향한 불같은 열정이 있었고, 셋째, 그 목표를 향해 나갈 때 어려움을 당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결의와 기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겠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꿈과 비전을 포기하거나 꿈과 비전이 희미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도 나태해지지 말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전에 꿈을 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복된 귀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떤 소문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도 있었고, 나쁜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듣는 것에 야릇한 쾌감을 느낍니다.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귀가 복된 귀가 되어야 합니다.
흔히 남자는 눈으로 짓는 범죄가 많고 여자는 입으로 짓는 범죄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과 입의 범죄 이상으로 귀로도 짓는 범죄가 많습니다. 우리는 나쁜 소식과 추한 소식을 듣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나쁜 소문보다 좋은 소문을 잘 들을 줄 아는 복된 귀를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열린 귀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아쉬운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 조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잘 조는 사람 중의 의외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상습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설교할 때 존다고 해서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졸음을 안주시겠습니까? 조는 것이 나쁜 태도는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품에 있는 것이 너무 안락하고 좋아서 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조는 것은 잠을 줄이고 땀을 많이 흘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가끔 부흥사들이 졸음마귀, 졸음마귀 하는데 성경에 졸음마귀란 말은 없습니다. 피곤하면 졸음이 올 수밖에 없고, 피곤하지 않은 경우에 졸게 되는 것은 졸음마귀 때문이 아니라, 조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조는 것이 신앙이 나쁜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 발을 떠는 것, 딱딱 소리를 내며 손톱을 깎는 것, 핸드폰을 받고 말하는 것,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 마음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등은 우리가 충분히 안할 수 있는 태도이기에 그런 태도는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축복도 없기 때문에 순종이 없는 성도들을 보면 강요할 수도 없고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부흥회가 성행할 때 부흥사들은 순종 안하는 성도를 양과 대비시켜 염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염소가 나쁜 동물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염소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신 짐승은 기본적으로 정결한 짐승입니다. 하나님께서 돼지는 제물로 받지 않으셨지만 염소는 받으셨습니다.
염소가 가끔 뿔로 받고 고집을 부리지만 기본적으로 염소의 성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양이 너무 너무 착하고 죽기까지 순종을 잘해서 그에 대비해서 염소가 조금 못한 평가를 받는 것이지 염소도 온순하기로는 유명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가끔 염소가 왜 저항합니까? 주인이 너무 무리하게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온순한 염소를 그렇게 만든 주인 책임이 훨씬 큽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양보다 염소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목회는 목양이 아니라 목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목회의 성패는 “양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염소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100% 순종하는 양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우리는 90%만 순종하는 염소가 되지 말고, 100% 순종하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 순종할 때 내 영혼과 육체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문제극복의 능력과 문제해결의 역사도 나타날 것입니다.
3. 믿음
본문의 여인은 주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왜 주님의 옷을 잡았습니까? 본문 28절 말씀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에게는 주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주님 팔을 붙들고 늘어지고,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고,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품에 뛰어 들어가 주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려야 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없어도 그녀는 “내가 주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치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군중들이 접근했고, 더 나아가 주님을 둘러싸 밀고 당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접촉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을 가진 이 여인에게만 나타났습니다. 그 말은 접근보다 접촉이 더 중요하고, 접촉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예배 중에 환상을 보고, 입신을 하고, 영적 체험을 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 같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막연히 잘 될 것을 희망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본문의 여인은 막연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의 생애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절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4. 결단과 실천
본문의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멀리서 예수님만 쳐다보지 않고 예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처럼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순간, 열두 해 동안 앓던 혈루증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도 두렵지 않은 태산 같은 믿음이 생기고 엄청난 헌신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이때 우리는 과감히 헌신을 다짐하고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는 축복은 기복주의입니다. 그런 복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 여인이 붙잡은 주님의 옷자락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주님의 옷자락이 주님의 흔적임을 생각할 때, 주님의 옷자락은 영적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이 남기신 교회라는 옷자락을 잡고 더욱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면 절망은 반드시 희망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면 이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이 없는 축복은 결코 믿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선교와 구제를 거의 강조하는 이유는 나누고 드리고 헌신하는 손길에 진정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1년 우리가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과 2004년 임병철 선교사님 차량 구입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헌금했었습니다. 그러나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량을 살 때에는 새 차를 구입하기에 재정이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약간 쓰던 중고차를 구입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고차가 수명이 다해서 이번에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가 없이 사역을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차가 없으면 사역이 어렵고 기동성이 떨어져 안 되겠다고 합니다.
지금 몽골은 벌써 영하 30도의 추위가 찾아오고 있는데 차량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까지 차량 구입 대금을 모금했는데 약 5천불(약 5백만 원)이 부족합니다.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에서 C&MA 선교사들의 중간기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도와야 할 정식 선교사만 8명이고, 그 외에 여러 협력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려면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감동이 있으신 분들은 선교후원회원에 가입해주시고, 이번에 김재호 선교사님 차량헌금의 부족한 부분을 위해서도 누군가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헌신을 결단하면 삶과 영혼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선교후원 이곳 클릭)
< 믿음을 믿지 마십시오(Don't believe in belief) >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여인이 치유 받는 장면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병자에게 “치유를 믿으라!”고 합니다. ‘치유’가 절대 신입니까? 왜 치유를 믿습니까? 물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를 치유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며 소원을 아뢰는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믿어야 치유 받는다!”고 하는 것은 심리치료입니다. 그런 심리치료가 병자에게 희망을 주는 측면이 있으니까 치유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런 심리치료는 진짜 믿음을 막고 나중에는 믿음에 회의를 품게 만듭니다.
우리는 치유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치유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에 맡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제 믿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격과 섭리와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면 실패가 없지만 믿음을 믿으면 반드시 낙심하고 좌절하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성도님이 유방암 수술을 했다가 1년 후에 재발했습니다. 그러자 어디서 들었는지 성령수술을 한다는 어떤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수술을 받자 가슴에서 진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멎으면 완쾌된다고 했고, 기도원 원장도 2주 후에 완쾌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친정어머니는 매우 좋아했지만 결국 11일째 되는 날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분 교회 목사님이 그 집을 방문하자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기도원 원장이 2주 안에 완쾌된다고 계시 받았다는데 왜 아내가 죽습니까? 왜 하나님이 거짓말을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원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이 안수 후에 병이 낫지 않으면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신유의 은사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절대 환자에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고 매번 환자의 믿음에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서울에 허리뼈 이상으로 몇 십 년 고생한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몇 십년간 병과 싸우면서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고, 좋다는 방법은 다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기도원은 다 찾아갔고, 신령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수없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나중에는 떠도는 생활을 청산하고 일반 교회에 등록하면서 그 교회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병 낫게 해준다는 분들은 그렇게 거짓말을 잘해요. 그분들은 안수기도를 할 때는 꼭 고친다고 장담하지만 막상 고치지 못하면 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요. 저 같이 몇 십 년 고생한 환자에게 왜 간절한 믿음이 없겠어요? 그런데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 없다는 소리까지 들으니까 더 상처를 받고 이젠 안수 받기가 겁나요.”
병이 낫지 않았을 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행동은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 행세를 하고 병자는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입게 하는 아주 고약한 행동입니다. 이제 “병이 낫는다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심리치료에 내 영혼을 맡기지 말고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조치를 무조건 신뢰해야 합니다.
이제 기도 받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믿음을 믿음’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것 같지만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믿는 신학은 심리적인 치료요법에 가깝습니다. 그런 믿음은 언젠가는 반드시 허무한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의 오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낭비하면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서 건강할 것이라고 믿고, 운전을 험하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운전대를 붙잡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그런 분들은 보험에 들고 저축을 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그렇게 미래를 대비하는 것으로 몹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태나 방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진짜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말씀을 보면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돈이 생기면 다 써버리고 나중에 쩔쩔매며 사는 모습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모험이고 만용이고 방종입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소득이 적어서라기보다는 지출을 관리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버는 것보다 더 사용하고 너무 쉽게 카드를 긁으면서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나님이 살 길을 주시겠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적절한 소비는 필요하지만 절제 없는 소비와 사치는 절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수입 범위 내에서 지출하고, 아낄 때는 아끼더라도 쓸 때는 과감히 써야 합니다. 저축하는 것은 미래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저축을 해도 하나님께서 한번 길을 막으시면 사람은 순식간에 비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저축하는 것은 미래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모 있는 삶의 실천을 위해서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록펠러는 가는 곳마다 저축10%, 십일조10%, 구제 10%를 하고 나머지 70%를 가지고 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진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헌신과 절제로 무장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능력 있는 삶이 주어질 것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굳건한 믿음으로 믿음의 역사와 기도 응답을 체험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 기적의 목적 >
오늘날은 능력이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성도들도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삶이란 초차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과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전혀 개념이 다릅니다. 사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의 주인공처럼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과시와 자랑을 목적으로 기적을 추구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기적의 목적에는 대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려는 목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을 알려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목적입니다. 즉 치유의 주 목적은 육신의 건강 유지가 아니라 육신의 치유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기적이 필요하지만 그 기적의 목표는 세상적인 영달이 아닙니다. 갑자기 떼돈을 버는 기적,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기적, 성공을 위해 점을 쳐주는 기적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기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입니다. 강퍅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녹아지고, 고집불통이 온유해지고, 무도한 사람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기적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은 시시하게 생각하고 갑자기 떼돈 벌었다는 소리만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한 나쁜 것을 끊는 기적도 필요합니다. 술과 담배와 도박과 마약을 끊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또한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는 것도 기적입니다. 흔히 “목회자는 3가지만 멀리하면 목회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3가지란 돈, 여자, 명예입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생활을 끝까지 잘하려면 돈, 이성, 명예의 3가지 욕심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첫째, 돈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돈 거래를 하지 말고, 성도들 간에는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도 없어야 하고, 계를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또한 돈을 목적으로 인맥을 쌓고 식당 손님 유치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교회에서는 철저히 받을 생각보다는 드릴 생각만 해야 합니다.
이번에 출판한 책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를 내면서 미션퍼블릭 팀에서는 “이익금으로 선교하자!”라고 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처음 출판한 책이라서 그냥 주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판매하는 경우도 반 가격에 주고, 택배비도 우리가 부담하니까 몇몇 팀원들이 “목사님! 그러다가는 선교는커녕 출판비도 못 건져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문서선교가 목적이지 이익이 목적이 아니니까 그 문제에 대범해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을 생각보다는 베풀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둘째, 이성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한 순간에 눈이 맞으면 그걸로 인생도 종치고, 교회생활도 종치게 됩니다. 성도 간에는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절대 집적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은 제비족과 꽃뱀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도 유혹의 그물을 쳐놓고 말 한 마디 슬쩍 슬쩍 던지면서 유혹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혐오하고, 그 유혹에 절대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명예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생활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명예욕입니다. 왜 교회에 파당이 생깁니까? 명예욕 때문입니다. 왜 보수파와 진보파로 갈라져 싸웁니까? 그것도 명예욕 때문입니다. 왜 시험에 듭니까? 대개 명예욕 때문입니다. 성도가 명예욕만 줄이면 시험을 현저히 줄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이 3가지만 멀리하면 목회도 잘할 수 있고, 교회생활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도 인간의 본능을 이겨낸 일종의 기적입니다. 또한 힘든 상황에서 마음을 잘 관리하고 극복하는 것도 기적이고, 싫은 소리를 잘 참아내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치유를 일으키는 4대 요인 >
오늘 본문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혈루증은 고통스런 질병이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유사한 질병이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 이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인처럼 우리도 마음의 혈루증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런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1. 강렬한 소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삶에 대한 줄기찬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불치병으로 고난을 당하면서 치료를 위해 애썼지만 가산만 탕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종교도 그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외면하고 나환자처럼 격리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과 한 상에 둘러앉아 함께 있을 수 있는 행복마저 빼앗겼습니다.
이 정도만 되면 웬만한 사람은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의 소원 때문에 이 여인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매사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예배도 항상 하던 대로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기도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강한 소원을 가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소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원은 축복의 기초입니다. 소원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보통 이상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제 강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정과 자녀가 크게 쓰임 받는 가정과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적극적인 소원과 뚜렷한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편 81편 10절에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인생이라도 간절한 마음과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템플 대학교를 세운 러셀 콘웰 박사가 백만장자 4043명을 조사했는데 그 중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69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특징을 조사해 보았는데 3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둘째, 그 목표를 향한 불같은 열정이 있었고, 셋째, 그 목표를 향해 나갈 때 어려움을 당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결의와 기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겠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꿈과 비전을 포기하거나 꿈과 비전이 희미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도 나태해지지 말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전에 꿈을 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복된 귀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떤 소문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도 있었고, 나쁜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듣는 것에 야릇한 쾌감을 느낍니다.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귀가 복된 귀가 되어야 합니다.
흔히 남자는 눈으로 짓는 범죄가 많고 여자는 입으로 짓는 범죄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과 입의 범죄 이상으로 귀로도 짓는 범죄가 많습니다. 우리는 나쁜 소식과 추한 소식을 듣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나쁜 소문보다 좋은 소문을 잘 들을 줄 아는 복된 귀를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열린 귀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아쉬운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 조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잘 조는 사람 중의 의외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상습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설교할 때 존다고 해서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졸음을 안주시겠습니까? 조는 것이 나쁜 태도는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품에 있는 것이 너무 안락하고 좋아서 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조는 것은 잠을 줄이고 땀을 많이 흘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가끔 부흥사들이 졸음마귀, 졸음마귀 하는데 성경에 졸음마귀란 말은 없습니다. 피곤하면 졸음이 올 수밖에 없고, 피곤하지 않은 경우에 졸게 되는 것은 졸음마귀 때문이 아니라, 조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조는 것이 신앙이 나쁜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 발을 떠는 것, 딱딱 소리를 내며 손톱을 깎는 것, 핸드폰을 받고 말하는 것,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 마음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등은 우리가 충분히 안할 수 있는 태도이기에 그런 태도는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축복도 없기 때문에 순종이 없는 성도들을 보면 강요할 수도 없고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부흥회가 성행할 때 부흥사들은 순종 안하는 성도를 양과 대비시켜 염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염소가 나쁜 동물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염소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신 짐승은 기본적으로 정결한 짐승입니다. 하나님께서 돼지는 제물로 받지 않으셨지만 염소는 받으셨습니다.
염소가 가끔 뿔로 받고 고집을 부리지만 기본적으로 염소의 성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양이 너무 너무 착하고 죽기까지 순종을 잘해서 그에 대비해서 염소가 조금 못한 평가를 받는 것이지 염소도 온순하기로는 유명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가끔 염소가 왜 저항합니까? 주인이 너무 무리하게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온순한 염소를 그렇게 만든 주인 책임이 훨씬 큽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양보다 염소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목회는 목양이 아니라 목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목회의 성패는 “양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염소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100% 순종하는 양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우리는 90%만 순종하는 염소가 되지 말고, 100% 순종하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 순종할 때 내 영혼과 육체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문제극복의 능력과 문제해결의 역사도 나타날 것입니다.
3. 믿음
본문의 여인은 주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왜 주님의 옷을 잡았습니까? 본문 28절 말씀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에게는 주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주님 팔을 붙들고 늘어지고,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고,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품에 뛰어 들어가 주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려야 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없어도 그녀는 “내가 주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치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군중들이 접근했고, 더 나아가 주님을 둘러싸 밀고 당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접촉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을 가진 이 여인에게만 나타났습니다. 그 말은 접근보다 접촉이 더 중요하고, 접촉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예배 중에 환상을 보고, 입신을 하고, 영적 체험을 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 같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막연히 잘 될 것을 희망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본문의 여인은 막연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의 생애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절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4. 결단과 실천
본문의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멀리서 예수님만 쳐다보지 않고 예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처럼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순간, 열두 해 동안 앓던 혈루증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도 두렵지 않은 태산 같은 믿음이 생기고 엄청난 헌신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이때 우리는 과감히 헌신을 다짐하고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는 축복은 기복주의입니다. 그런 복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 여인이 붙잡은 주님의 옷자락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주님의 옷자락이 주님의 흔적임을 생각할 때, 주님의 옷자락은 영적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이 남기신 교회라는 옷자락을 잡고 더욱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면 절망은 반드시 희망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면 이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이 없는 축복은 결코 믿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선교와 구제를 거의 강조하는 이유는 나누고 드리고 헌신하는 손길에 진정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1년 우리가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과 2004년 임병철 선교사님 차량 구입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헌금했었습니다. 그러나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량을 살 때에는 새 차를 구입하기에 재정이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약간 쓰던 중고차를 구입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고차가 수명이 다해서 이번에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가 없이 사역을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차가 없으면 사역이 어렵고 기동성이 떨어져 안 되겠다고 합니다.
지금 몽골은 벌써 영하 30도의 추위가 찾아오고 있는데 차량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까지 차량 구입 대금을 모금했는데 약 5천불(약 5백만 원)이 부족합니다.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에서 C&MA 선교사들의 중간기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도와야 할 정식 선교사만 8명이고, 그 외에 여러 협력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려면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감동이 있으신 분들은 선교후원회원에 가입해주시고, 이번에 김재호 선교사님 차량헌금의 부족한 부분을 위해서도 누군가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믿음을 가지고 헌신을 결단하면 삶과 영혼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선교후원 이곳 클릭)
< 믿음을 믿지 마십시오(Don't believe in belief) >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여인이 치유 받는 장면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병자에게 “치유를 믿으라!”고 합니다. ‘치유’가 절대 신입니까? 왜 치유를 믿습니까? 물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를 치유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며 소원을 아뢰는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믿어야 치유 받는다!”고 하는 것은 심리치료입니다. 그런 심리치료가 병자에게 희망을 주는 측면이 있으니까 치유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런 심리치료는 진짜 믿음을 막고 나중에는 믿음에 회의를 품게 만듭니다.
우리는 치유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치유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에 맡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제 믿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격과 섭리와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면 실패가 없지만 믿음을 믿으면 반드시 낙심하고 좌절하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성도님이 유방암 수술을 했다가 1년 후에 재발했습니다. 그러자 어디서 들었는지 성령수술을 한다는 어떤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수술을 받자 가슴에서 진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멎으면 완쾌된다고 했고, 기도원 원장도 2주 후에 완쾌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친정어머니는 매우 좋아했지만 결국 11일째 되는 날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분 교회 목사님이 그 집을 방문하자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기도원 원장이 2주 안에 완쾌된다고 계시 받았다는데 왜 아내가 죽습니까? 왜 하나님이 거짓말을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원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이 안수 후에 병이 낫지 않으면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신유의 은사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절대 환자에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고 매번 환자의 믿음에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서울에 허리뼈 이상으로 몇 십 년 고생한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몇 십년간 병과 싸우면서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고, 좋다는 방법은 다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기도원은 다 찾아갔고, 신령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수없이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나중에는 떠도는 생활을 청산하고 일반 교회에 등록하면서 그 교회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병 낫게 해준다는 분들은 그렇게 거짓말을 잘해요. 그분들은 안수기도를 할 때는 꼭 고친다고 장담하지만 막상 고치지 못하면 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요. 저 같이 몇 십 년 고생한 환자에게 왜 간절한 믿음이 없겠어요? 그런데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 없다는 소리까지 들으니까 더 상처를 받고 이젠 안수 받기가 겁나요.”
병이 낫지 않았을 때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행동은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 행세를 하고 병자는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입게 하는 아주 고약한 행동입니다. 이제 “병이 낫는다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심리치료에 내 영혼을 맡기지 말고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조치를 무조건 신뢰해야 합니다.
이제 기도 받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믿음을 믿음’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것 같지만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믿는 신학은 심리적인 치료요법에 가깝습니다. 그런 믿음은 언젠가는 반드시 허무한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의 오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낭비하면서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서 건강할 것이라고 믿고, 운전을 험하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운전대를 붙잡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그런 분들은 보험에 들고 저축을 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그렇게 미래를 대비하는 것으로 몹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태나 방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진짜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말씀을 보면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돈이 생기면 다 써버리고 나중에 쩔쩔매며 사는 모습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모험이고 만용이고 방종입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소득이 적어서라기보다는 지출을 관리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버는 것보다 더 사용하고 너무 쉽게 카드를 긁으면서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나님이 살 길을 주시겠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적절한 소비는 필요하지만 절제 없는 소비와 사치는 절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수입 범위 내에서 지출하고, 아낄 때는 아끼더라도 쓸 때는 과감히 써야 합니다. 저축하는 것은 미래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저축을 해도 하나님께서 한번 길을 막으시면 사람은 순식간에 비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저축하는 것은 미래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모 있는 삶의 실천을 위해서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록펠러는 가는 곳마다 저축10%, 십일조10%, 구제 10%를 하고 나머지 70%를 가지고 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진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헌신과 절제로 무장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능력 있는 삶이 주어질 것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굳건한 믿음으로 믿음의 역사와 기도 응답을 체험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