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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삽시다! (갈 5장 22~26절)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더 이상 자기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자신 안에 다른 인격체가 들어와 있다. 그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자주 갈등이 있다. 내 생각과 성령님의 생각이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갈등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내 생각을 포기하고 성령님의 선하신 뜻에 맞추기만 하면 아주 환상적인 콤비플레이가 이루어진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놀랍게도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뜻을 따름으로써 놀라운 삶을 살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사는 모습은 어떤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여전히 정과 욕심이 살아서 우리 속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다. 분노가 그대로 살아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안에 분명히 어떤 중대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1.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더 이상 육체의 정욕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기본적인 욕구와 본능이 있다.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하고, 자야 한다. 성욕,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이 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런 육체의 욕구들에 지배를 받았다. 그것이 우리를 움직였다. 그것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이런 기본적인 욕구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지는 못한다. 우리 안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 명예욕, 소유욕, 성욕, 지배욕 등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도, 전부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런 것들을 절제하고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감동과 다스림 때문이다. 그래서 본능이나 육체의 소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다. 마치 동물의 왕인 사자가 사슬에 묶인 것과 같다. 묶인 사자는 으르렁 거리며 위협할 수는 있지만 해치지는 못한다. 그러면 내 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있는 욕심과 육체의 생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예)빈 컵에서 공기를 뺄 수 있는 방법? (빈 유리컵과 물 준비) 물을 가득 채우면 됨 - 물속에 녹아있는 산소가 있지만 빈 컵이라 하지 않고, 물이 가득 찬 컵이라고 함.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기 속에 있는 인간적인 욕심과 욕망 그리고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충만히 채움으로 정과 욕심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때론 실수해서 넘어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
2.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하고, 죽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과 감정은 그대로 살아있다. 뜨겁게 기도할 때는 다 죽은 것 같았는데, 기쁘게 찬송할 때는 다 죽은 것 같았는데, 말씀보고 들으면서 은혜 받을 때는 다 해결된 것 같았는데, 살다보면 불쑥불쑥 살아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에 매이거나 그런 것으로 기뻐하거나 만족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므로 제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는가? 세상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두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기쁨이 있다. 자신의 몸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데서 출발한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의 뜻 나를 맡기는 것에 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더 많이 가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데 있다.
*진정한 기쁨은 내 욕망대로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절 제된 삶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믿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인생의 재미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이라는 말은 반드시 성령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말은 "성령의 뜻에 맞춘다",“성령과 걸음을 맞춘다.”는 뜻이다. 성령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 분을 인정하고 그 분의 뜻에 맞추고, 그 분과 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삶이요, 거기에 능력과 복 있는 삶이 있다. 우리가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기질과 내 욕심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 방식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기질과 욕심과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고 다녔는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망하고 대드는 기질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든 관계치 않고 그냥 내 마음에 안 들면 대든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대들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그런 사람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다. 먼저 그 기질부터 꺾어나가신다. 거기에는 반드시 아픔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나타난다. 믿는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평생을 믿어도 늘 광야만 맴도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자와 자기 기질대로 사는 자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절대로 그냥두시는 법이 없다. 그 믿음에 상응하는 능력과 복을 주신다. 우리가 자기 고집과 기질을 포기하고, 육신의 정과 욕심을 이기고, 자신을 성령님께 복종시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가히 폭발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왕에 예수 믿을 바에야 제대로 믿고 제대로 복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왕에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한평생 자기 기질 꺾는 데만 애쓰다가 죽을 고생만 하고 결국 광야에서 죽을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마다 좋지 못한 기질이 한 두 가지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꺾고 성령께 복종시키시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반드시 우리를 더 거룩하게 하고, 신앙적으로 더 자라게 하신다.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길을 막으신다.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똑바로 가는 길, 형통한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 삶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좋지 못한 습관들을 제거하자. 좋지 못한 습관이나 생각이 통로를 막고 있으면 성령의 역사와 감동이 공급되지 않는다. 은혜의 통로를 막고 있는 쓰레기를 치울 때 성령의 생수가 넘치게 공급될 것이다. 오랜 생활 습관 가운데 바위와 같이 단단하게 굳은 것은 깨내야 한다. 참기 힘들만큼 아픔이 있을 지라도 독한마음을 먹고 깨내시기 바란다. 그럴 때 그 속에서 맑고 시원한 은혜의 생수가 터져 나올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맑고 시원한 생수를 맛보시기를 축원한다.
이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26절“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이 무엇인가? 자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니 힘들고 피차 피곤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참으로 위대한 자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사람이다.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직 사람이 영글지 않아서 그렇다. 성숙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행동이다. 신앙의 위대한 거목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는 자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고 자기는 앙상한 가지로 돌아가는 자이다. 그것을 기쁨과 보람으로 삼는다. 그런 위대한 신앙의 거목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본문에서‘격동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으면 공격하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능력을 인정해 주고 그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투기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최고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최고가 되어 있으니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함께 기뻐한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참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성령의 마음이다.
*성령의 역사는 격동케 하는 역사가 아니다.
세워주고 보호해 주는 역사요, 화목케 하는 역사다.
*성령의 역사는 투기하게 하는 역사가 아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역사요 함께 기뻐하는 역사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더 많이 가지게 하는 역사가 아니다.
남을 풍성하게 하고 나누어 주게 하는 역사다.
장차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우리의 일생을 설명해야 할 날이 온다. 그 때 주님은 우리를 판단하신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남에게 높임 받았느냐로 판단하시지 않고 얼마나 낮아졌느냐로 판단하신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섬김을 받았느냐로 판단하시기 않고 얼마나 섬겼 느냐로 판단하신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나누어 주 었는지를 보신다.
*주님은 내 뜻을 얼마나 관철시켰느냐로 인정하시지 않고 남의 뜻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느냐로 인정하신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덕을 많이 세웠느냐를 보신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았느냐로 판단하시지 않고 얼마나 사랑했느냐로 판단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판단 기준에 합당하게 사시기를 축원한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다. 그런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의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성령의 지배에 겸손하게 순복하라.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라. 그래서 장차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두고 설명하는 그날 “주님! 내 삶은 성령으로 행한 삶이었습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출처/김종민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