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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바다에서 (마4:18-22)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중에 ‘비발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후기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사제, 즉 오늘날의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교회음악에도 큰 공헌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 ‘사계(The Four Seasons)’라는 것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특성에 맞게 작곡한 것인데, 그의 작품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많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이 작품은 곡도 물론 잘 만들었지만, 계절의 특성을 음악에 담았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봄을 노래할 때에는 새들의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산들바람의 소리, 목동의 피리소리, 천둥과 번개의 소리까지 들립니다. 여름에는 무더운 여름분위기를 나타내는 소리로서 피곤하고, 지친 계절의 특성을 살려 놓았습니다. 가을에는 민속춤의 선율로 이어집니다. 농부들이 춤과 노래로 추수의 기쁨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나타내고, 거기에 흠뻑 취한 내용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겨울풍경을 피부와 와 닿도록 추워서 발을 구르는 소리, 추워서 이를 가는 소리, 얼음을 타는 사람들의 소리로 겨울을 연주하는 것을 봅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자연을 가장 음악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들으면서 계절이 바뀌고,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음악과 연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할 수 있음을 대표적으로 알려준 귀한 연주곡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하나님이 섭리하는 자연, 그것은 분명 성경 다음으로 우리를 깨닫고 느끼게 하는 삶의 중요한 현장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계속해서 성경의 자연, 특히 바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의 요단강을 지나, 갈릴리바다입니다. 성경은 갈릴리바다를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여기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갈릴리바다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라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제자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입니다.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여기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을 봅니다. 그 가운데는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해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의미 있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성경은 여러 제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보여줍니다만, 특히 갈릴리바다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은 이들의 평생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도 이들은 주님과의 사랑이 식어질 때, 그들의 사역에 지치고 힘들 때, 처음 주님을 만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신앙을 충전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바다는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갈릴리바다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먼저 떠오르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한마디로 아주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당시의 위대한 스승이 선택한 탁월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헬라시대에 유능한 철학자의 유명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당시 주님이 제자를 선택하신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주님은 다 갖춘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똑똑하거나, 지식이 많거나, 완벽하거나, 인정받는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허물 많은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모자람을 아셨고, 이들의 허물과 실패를 이미 꿰뚫고 계셨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주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사람들인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을 선택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고, 세계역사와 기독교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이요, 놀라운 은혜와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성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뭔가 잘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과 비슷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연약하기에 더욱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보기에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이 보면 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보면서 실망스러운 게 많고, 그래서 날마다 고개를 떨구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여기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다듬고, 훈련시키고, 깨트리고, 단단하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처럼 허물이 있고, 모자라고, 실수가 많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를 온전히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자라고 부족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우리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나를 보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서 용기를 가지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힘을 내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참 제자로 잘 다듬어지고, 온전해져 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르심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특히 19절에 보면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신 현장이 갈릴리 바다이고, 거기에서 이들이 반응을 보이며 주님을 따라간 곳이 갈릴리바다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주님의 제자들이 생각나고, 아울러 부르심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결국 제자는 한마디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반응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자기를 부름의 목적에 따라 그들에게 맡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경은 바로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셨고, 부르실 때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의 중심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바울, 디모데를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그 시대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부름 앞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부름에는 크게 2가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이 부르심을 사람을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지치고 힘든 영혼을 안식의 자리, 천국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구원과 함께 사람들을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제자들처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그들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후회를 많이 합니다. 무슨 물건하나 사고도 후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나 많은 후회가 우리 삶에 반복되는 지 모릅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후회함이 없는 인생만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성공이 될 만큼, 너무도 많은 후회를 하고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를 불러놓고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잘못해도 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고, 변경이 결코 없습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이런 부르심 앞에 나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에베소서 4장 1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고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나를 후회 없이 부르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면서, 이제 나에게 주어진 부름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헌신입니다. 본문을 헌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에도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것이 갈릴리바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부를 때, 필요할 때, 즉각적인 행동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 헌신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의 이런 헌신은 여기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매번 매순간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삶이 안일해지고, 실패와 범죄가 반복될 때, 그들을 갈릴리바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그들의 헌신을 촉구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고, 특히 바르고 참된 삶을 위해 헌신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을 다짐하면서 세상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바다입니다.
갈릴리바다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이곳은 사실 바다 같지 않은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요단강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호수’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바다라고 불리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이곳을 부르는 이름도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구약에는 이곳을 ‘긴네렛’ 바다로 불렀습니다. 그것이 신약에는 ‘게네사렛’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이곳 지역의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와 비슷한 모양이기에 ‘비파’를 뜻하는 ‘게네사렛’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갈릴리바다는 무엇보다도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6장과 21장에 이 명칭이 나옵니다. 갈릴리바다를 디베랴 바다라고 부른 것은 주후 17년 헤롯 안디바가 이곳에 거대한 황제의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의 이름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as)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당시 갈릴리바다를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바다로 불렀다는 것은 그곳이 황제의 통치와 지배와 힘과 무엇보다도 로마의 우상과 신전이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가 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를 포함한 갈릴리출신의 어부들을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과 같은 헌신을 다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더 이상 갈릴리바다라고 하지 않고, 디베랴바다로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자들의 삶은 정말 나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실패와 두려움과 배신의 반복으로 얼룩진 3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이들을 다시 처음 주님을 만났던 현장으로 불러서 새로운 헌신의 삶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특히 베드로에게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지금 갈릴리바다가 아닌 디베랴바다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심을 유념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티베리우스보다, 로마의 황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욕망의 바다에서 너를 조절할 수 있겠느냐, 이 더러운 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 어두운 세상에서 등대가 될 수 있겠느냐,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붙잡고 살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 베드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젠 내가 주님만 의지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보다, 황제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욕망으로 나를 더럽히지 않고 영원한 진리만을 추구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다짐하며 헌신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은 옛날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듯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황제보다, 세상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내 삶의 우선 순위로 삼고 살겠습니다.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순간의 욕망으로 나를 더럽히지 않고 영원한 진리를 따라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하고, 다짐하고, 헌신하면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 중에서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중에 ‘비발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후기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사제, 즉 오늘날의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교회음악에도 큰 공헌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 ‘사계(The Four Seasons)’라는 것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특성에 맞게 작곡한 것인데, 그의 작품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많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이 작품은 곡도 물론 잘 만들었지만, 계절의 특성을 음악에 담았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봄을 노래할 때에는 새들의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산들바람의 소리, 목동의 피리소리, 천둥과 번개의 소리까지 들립니다. 여름에는 무더운 여름분위기를 나타내는 소리로서 피곤하고, 지친 계절의 특성을 살려 놓았습니다. 가을에는 민속춤의 선율로 이어집니다. 농부들이 춤과 노래로 추수의 기쁨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나타내고, 거기에 흠뻑 취한 내용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겨울풍경을 피부와 와 닿도록 추워서 발을 구르는 소리, 추워서 이를 가는 소리, 얼음을 타는 사람들의 소리로 겨울을 연주하는 것을 봅니다.
비발디의 사계는 자연을 가장 음악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들으면서 계절이 바뀌고,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음악과 연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할 수 있음을 대표적으로 알려준 귀한 연주곡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하나님이 섭리하는 자연, 그것은 분명 성경 다음으로 우리를 깨닫고 느끼게 하는 삶의 중요한 현장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계속해서 성경의 자연, 특히 바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의 요단강을 지나, 갈릴리바다입니다. 성경은 갈릴리바다를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여기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서 갈릴리바다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라야 할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제자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입니다.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여기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을 봅니다. 그 가운데는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해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의미 있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성경은 여러 제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보여줍니다만, 특히 갈릴리바다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은 이들의 평생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도 이들은 주님과의 사랑이 식어질 때, 그들의 사역에 지치고 힘들 때, 처음 주님을 만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신앙을 충전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바다는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갈릴리바다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먼저 떠오르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한마디로 아주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당시의 위대한 스승이 선택한 탁월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헬라시대에 유능한 철학자의 유명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당시 주님이 제자를 선택하신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주님은 다 갖춘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똑똑하거나, 지식이 많거나, 완벽하거나, 인정받는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허물 많은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모자람을 아셨고, 이들의 허물과 실패를 이미 꿰뚫고 계셨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주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사람들인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을 선택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고, 세계역사와 기독교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이요, 놀라운 은혜와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성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뭔가 잘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과 비슷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연약하기에 더욱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보기에도 부족하고, 다른 사람이 보면 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보면서 실망스러운 게 많고, 그래서 날마다 고개를 떨구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여기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다듬고, 훈련시키고, 깨트리고, 단단하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처럼 허물이 있고, 모자라고, 실수가 많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를 온전히 세워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자라고 부족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우리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나를 보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서 용기를 가지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힘을 내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참 제자로 잘 다듬어지고, 온전해져 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르심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특히 19절에 보면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신 현장이 갈릴리 바다이고, 거기에서 이들이 반응을 보이며 주님을 따라간 곳이 갈릴리바다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주님의 제자들이 생각나고, 아울러 부르심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결국 제자는 한마디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반응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자기를 부름의 목적에 따라 그들에게 맡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경은 바로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셨고, 부르실 때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의 중심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바울, 디모데를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그 시대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부름 앞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부름에는 크게 2가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이 부르심을 사람을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지치고 힘든 영혼을 안식의 자리, 천국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구원과 함께 사람들을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제자들처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그들을 사명으로 부르시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후회를 많이 합니다. 무슨 물건하나 사고도 후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나 많은 후회가 우리 삶에 반복되는 지 모릅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후회함이 없는 인생만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성공이 될 만큼, 너무도 많은 후회를 하고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를 불러놓고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잘못해도 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고, 변경이 결코 없습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이런 부르심 앞에 나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것에 대해 에베소서 4장 1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고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나를 후회 없이 부르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면서, 이제 나에게 주어진 부름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헌신입니다. 본문을 헌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에도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것이 갈릴리바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부를 때, 필요할 때, 즉각적인 행동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 헌신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의 이런 헌신은 여기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매번 매순간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삶이 안일해지고, 실패와 범죄가 반복될 때, 그들을 갈릴리바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그들의 헌신을 촉구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고, 특히 바르고 참된 삶을 위해 헌신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을 다짐하면서 세상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바다입니다.
갈릴리바다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이곳은 사실 바다 같지 않은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요단강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호수’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바다라고 불리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이곳을 부르는 이름도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구약에는 이곳을 ‘긴네렛’ 바다로 불렀습니다. 그것이 신약에는 ‘게네사렛’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이곳 지역의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와 비슷한 모양이기에 ‘비파’를 뜻하는 ‘게네사렛’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갈릴리바다는 무엇보다도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6장과 21장에 이 명칭이 나옵니다. 갈릴리바다를 디베랴 바다라고 부른 것은 주후 17년 헤롯 안디바가 이곳에 거대한 황제의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의 이름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as)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당시 갈릴리바다를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바다로 불렀다는 것은 그곳이 황제의 통치와 지배와 힘과 무엇보다도 로마의 우상과 신전이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가 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를 포함한 갈릴리출신의 어부들을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과 같은 헌신을 다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더 이상 갈릴리바다라고 하지 않고, 디베랴바다로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자들의 삶은 정말 나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실패와 두려움과 배신의 반복으로 얼룩진 3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이들을 다시 처음 주님을 만났던 현장으로 불러서 새로운 헌신의 삶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특히 베드로에게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지금 갈릴리바다가 아닌 디베랴바다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심을 유념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티베리우스보다, 로마의 황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욕망의 바다에서 너를 조절할 수 있겠느냐, 이 더러운 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 어두운 세상에서 등대가 될 수 있겠느냐,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붙잡고 살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 앞에 베드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젠 내가 주님만 의지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보다, 황제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욕망으로 나를 더럽히지 않고 영원한 진리만을 추구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다짐하며 헌신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은 옛날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듯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황제보다, 세상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내 삶의 우선 순위로 삼고 살겠습니다.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순간의 욕망으로 나를 더럽히지 않고 영원한 진리를 따라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하고, 다짐하고, 헌신하면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