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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공동체 (사도행전 15:6~11)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열심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매우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제 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7명에게 안수하여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독노회를 조직한지 5년 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 장로 125명, 모두 221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했던 것입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례 교인 53,008명, 총교인수 127,228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우리 총회는 참으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노회를 조직하자마자 선교사를 파송했고 총회를 조직한 후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총회 주일은 본 교단에 속한 전체 교회가 함께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총회가 무엇을 하는 기관인가 하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총회의 성경적 근거는 바로 본문 6절 말씀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사도와 장로들이 할례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리를 결정했으며 그 결정은 권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총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교리를 포함한 교회의 문제들을 확정짓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개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경우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잘못 판단하고 결정할 것 같으면 그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근거로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총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기관입니까? 총회는 교리를 결정하며 교회 운영에 필요한 행정의 통일, 치리와 권징의 올바른 이행, 그리고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하며 개 교회가 할 수 없는 사업을 총회적으로 힘을 모아 이루어 가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이끄시는 아름다운 총회, 아름다운 교회,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제 1차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 다만 교회에 참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그 문제를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부르는 회의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6절부터 11절까지 말씀이 베드로의 주장인데 그 결론이 바로 1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야고보가 성경을 근거로 내린 결정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아모스서 9장 11절과 12절의 말씀입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때문에 이방인 신자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인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 원칙과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이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과연 탁월했습니다.
종교 개혁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시대의 현실이 영적으로 퇴폐의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중세 가톨릭 교회가 어두움 속에서 방황했을까요? 그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그 대신 성인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와 존 칼빈입니다. 루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성경에 입각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말씀 중심의 교회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절대 믿음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15장 22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교회는 최우선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선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선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지상 명령은 지속적인 명령입니다. 일 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먼저 가라고 하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세계 24,000종족 중에 복음이 전파된 종족은 13,000종족이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종족이 11,000종족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종족이 많기 때문에 세계 교회들은 열심히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도 80개국에 선교사 900여명을 파송했으며 2007년 총회 선교사 파송 100주년을 맞아 2030년까지 성도 300명 당 1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15,55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합니다. 이 귀한 일에 우리도 동참해야 합니다.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든지 아니면 내가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다.
선교는 이웃을 살리고, 한국 교회를 살리고, 나아가 열방을 살리는 일입니다. 로마서 9장 3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친척들 때문에 고통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 강영우 박사는 백악관 고위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최근 『3C 혁명』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글로벌 인재상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3C, 즉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Commitment)의 삼 요소를 갖춘 사람이 진정한 실력자라는 것입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사람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주는 인격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불평만 하며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은혜로운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실력과 인격과 헌신의 삼 박자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인격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인격은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이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기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째,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온전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한 사람의 온전한 헌신이 대단히 큰 위력을 나타냅니다. 은혜로운 교회를 위해서는 헌신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고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하면 할수록 믿음이 성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공의회가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과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아름다운 공동체,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열심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매우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제 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길선주, 양전백 등 7명에게 안수하여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독노회를 조직한지 5년 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 장로 125명, 모두 221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출했던 것입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례 교인 53,008명, 총교인수 127,228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우리 총회는 참으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노회를 조직하자마자 선교사를 파송했고 총회를 조직한 후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총회 주일은 본 교단에 속한 전체 교회가 함께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총회가 무엇을 하는 기관인가 하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총회의 성경적 근거는 바로 본문 6절 말씀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사도와 장로들이 할례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리를 결정했으며 그 결정은 권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총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교리를 포함한 교회의 문제들을 확정짓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개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경우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잘못 판단하고 결정할 것 같으면 그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근거로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총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기관입니까? 총회는 교리를 결정하며 교회 운영에 필요한 행정의 통일, 치리와 권징의 올바른 이행, 그리고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하며 개 교회가 할 수 없는 사업을 총회적으로 힘을 모아 이루어 가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이끄시는 아름다운 총회, 아름다운 교회,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제 1차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 다만 교회에 참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그 문제를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부르는 회의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6절부터 11절까지 말씀이 베드로의 주장인데 그 결론이 바로 1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야고보가 성경을 근거로 내린 결정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아모스서 9장 11절과 12절의 말씀입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때문에 이방인 신자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인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그 원칙과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이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과연 탁월했습니다.
종교 개혁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시대의 현실이 영적으로 퇴폐의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중세 가톨릭 교회가 어두움 속에서 방황했을까요? 그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그 대신 성인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와 존 칼빈입니다. 루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성경에 입각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말씀 중심의 교회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절대 믿음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15장 22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교회는 최우선적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선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선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지상 명령은 지속적인 명령입니다. 일 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먼저 가라고 하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세계 24,000종족 중에 복음이 전파된 종족은 13,000종족이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종족이 11,000종족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종족이 많기 때문에 세계 교회들은 열심히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도 80개국에 선교사 900여명을 파송했으며 2007년 총회 선교사 파송 100주년을 맞아 2030년까지 성도 300명 당 1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15,55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합니다. 이 귀한 일에 우리도 동참해야 합니다.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든지 아니면 내가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다.
선교는 이웃을 살리고, 한국 교회를 살리고, 나아가 열방을 살리는 일입니다. 로마서 9장 3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친척들 때문에 고통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 강영우 박사는 백악관 고위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최근 『3C 혁명』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글로벌 인재상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3C, 즉 실력(Competence), 인격(Character), 헌신(Commitment)의 삼 요소를 갖춘 사람이 진정한 실력자라는 것입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사람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주는 인격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불평만 하며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은혜로운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실력과 인격과 헌신의 삼 박자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인격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인격은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이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기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째,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온전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한 사람의 온전한 헌신이 대단히 큰 위력을 나타냅니다. 은혜로운 교회를 위해서는 헌신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고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하면 할수록 믿음이 성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공의회가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과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아름다운 공동체, 은혜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