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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3:4-15)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임종할 때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짤막한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지난 대선 때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외쳤던 후보가 있었습니다. 그 후보가 지금 대통령이 되었죠. 그런데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 이런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정말 이래도 행복하십니까?”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많이 가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지면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많이 쓰면 쓸수록, 명품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허무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남자들은 높이 올라가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올 일이 걱정됩니다. 올라갈 때는 한 계단 한 계단 착실하게 열심히 땀흘리며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날개도 없이 추락해야 한다는 사실에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없어도 불행하고 있어도 불행하다. 낮은 자도 불행하고 높은 자도 불행하다. 인생은 불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불행해진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많이 갖고 많이 누리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 내 인생의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될 때 비로소 참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의 니고데모. 그는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정치권력의 실세, 최고의 지성을 갖춘 부자! 이렇게 그가 가진 모든 것 중에 저절로 된 것이 있을까요? 아니요. 그만큼 니고데모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절제를 바탕으로 성공을 향해, 행복을 향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갖고 싶었던 것을 다 가졌고, 올라가고 싶은 곳까지 다 올라갔지만 여전히 마음이 허전하고 해결되지 못하는 불행의 씨앗이 계속 니고데모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고민과 고통, 이런 갈등을 가지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한 마디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남으로서만’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남으로서, 참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때에야 비로소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3절의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니고데모(4)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4절.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아니 깨닫지 못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이성과 교만과 불신앙으로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고집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가진 것, 내게 익숙한 것, 땅의 것을 두 손에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걸림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3절에서도, 5절에서도, 11절에서도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그 한 생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간절한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부와 권세와 명예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다 주의 것입니다. 온 천하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된 모든 만물을 다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이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거듭나기 전에는 참된 행복을 결코 맛볼 수 없기에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니고데모에게 새생명을 주시고자, 말씀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 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5)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돈으로도 안되고, 지식으로도 안되고, 선행으로도 안되고, 종교적인 행위로서도 안되고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잘못했다고 시인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는 말씀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진정으로 회개할 때,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23절은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된 마음으로 믿을 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이고 ‘성령의 역사’이지 인위적인 행위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7)
이렇게 거듭나는 것은 육적인 탄생, 육적인 조건, 환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6-7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슨 말씀입니까?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지, 육이 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야지만, 다시 태어나야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아무리 금빛찬란한 종교의 옷을 입고, 권세를 갖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더라도, 네가 아무리 잘난 육이라 할지라도 육은 결국 육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애벌레에게 아무리 날개를 달아주고 왕관을 씌워준다고 해도 나비가 되지 못합니다. 누에고치 속에서 거듭나야지만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서 거듭나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말씀을 좇아 살며 점점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영적으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8)
그래서 예수님은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8절.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태풍이 부는 날 바람 소리 한 번 들어보셨습니까?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 힘도 굉장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을 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왜요? 바람 부는 것은 우리가 다 경험했으니까! 하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니고데모가 경험한 땅의 일로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람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리와 그런다고 오는 게 아니고 내가 저리가 그런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삼겹살 구어 먹을 때 어떤 사람한테만 연기가 계속 가죠? 그런데 내가 저리 가 그런다고 갑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태풍으로, 미풍으로,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자체가 휘몰아치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도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말씀입니다. 내 임의로 나 거듭나야지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교회 열심히 다녀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이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그 결과가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고통 중에 있는데, 마음 속에 감사가 있고, 찬양이 있고, 괜히 기쁘고, 괜히 즐겁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되고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내가 죄인인데하고 깨달아집니다. 죄가 미워집니다. 그리고 내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해석이 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이해되어집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래서 나에게 고난을 주셨구나! 그리고 그 고난 중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이 나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그러죠!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바람과 같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
그런데 이렇게 설명해 줘도 니고데모는 못알아 듣습니다. 9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의 수준이 이 정도였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바람으로 얘기해도 못 알아듣고, 고작 하는 말이 “어찌, 어찌, 우째 이런 일이!” 하늘의 말로 해줘도 모르고, 세상의 경험을 통해 말해줘도 모르고... 이렇게 요한복음 3장에서는 니고데모가 결국 이 진리를 모르고 떠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꼬꾸라져서 즉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폭풍과 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 니고데모와 같이 서서히 조금씩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이 거듭남의 비밀이 이해되어지지 못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결국 니고데모는 거듭나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담대하게 장사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되도 계속해서 예배하며 말씀을 잘 듣다보면 어느새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거듭나라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 거듭나려면, 교만과 두려움을 버리고 증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10-12)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줘도 도무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니고데모를 책망하십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해야할 이스라엘의 선생이 거듭남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 있느냐는 책망과 한탄입니다. 이 정도 이야기해 줬으면 말씀을 알아듣고, 자신의 불신앙과 교만을 회개하며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를 구해야하는데, 계속해서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이렇게 무지와 불신앙 속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시며 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셔도 니고데모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거듭난다는 것이 어떤 막연한 환상을 쫓는 일이 아닌데, 그것은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데도 네가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너희가 우리 증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듭남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고, 너희가 거부했기 때문에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니고데모는 이렇게 계속 예수님의 증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내적으로 변화를 갈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막상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변화를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내가 쌓아온 나를 버리려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 존재가 없어지고,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죄악 속이라도 안정된 옛삶이 좋지, 거룩한 새삶은 왠지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옛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니고데모의 본성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결국 인간의 본성은 불신앙입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남으로, 물로, 바람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성만 가지고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십니까? 어떻게 한 사람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모든 사람의 죄가 용서받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이성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은 이해가 아니라 계시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교만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의 죄를 지적하시며, 바로 그것 때문에 네가 거듭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거듭나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3-15)
이제 예수님은 대화를 점점 더 핵심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거듭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갈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만이 신비한 하늘 일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구약의 한 사건을 통해서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민수기 21:4-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험한 길에서 지키고, 굶주리고, 목말라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홍해를 건너왔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치니까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불평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왜 우리를 죽이려 하십니까? 먹을 건 줘야 하지 않습니까? 마실 물은 줘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물이 아니라 불을 보내셔서, 불뱀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하는 입술을 그냥 확 깨물게 하셨습니다.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들이 즉시 소리칩니다. 모세에게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다 죽겠습니다. 살려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래 내가 살려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아주 이상했습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 위에 만들어 붙여서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려라. 누구든지 이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벗어난 것입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입니다. 독사에 물이면 빨리 물린 부위를 동여매고 물린 자국에서 독을 빨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해독제를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또 다른 뱀에게 물리지 않도록 밑을 쳐다봐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리로 뱀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 뱀을 쳐다봐라. 위를 쳐다봐라. 그러면 살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말했고,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어쨌든 이 황당한 말씀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참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 그걸 본다고 낫느냐? 그리고 안 봤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보라고, 보면 낫는다고 그러니까 말씀을 믿고 그냥 봤습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바라본 사람들은 다 살았다!
예수님이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다. 그러니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결 론 : 십자가를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남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봅니까? 십자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음의 상처가 나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떤 절망과 슬픔과 고통과 불행 속에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나음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거듭나고,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며, 더 나아가 그 나라를 증거하는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듭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날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서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악의 불뱀에 물리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원망과 교만과 불신앙의 불뱀은 여전히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스물 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이화여대를 다니며 아름다운 꿈을 키우던 한 여학생이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던 중에 큰 교통사고를 만나 전신에 화상을 입고 얼굴과 손과 발이 다 녹아들어갔습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한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외모와 상관없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나를 사랑함으로 죽어주셨다는 사랑이 다시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씨입니다. 그의 일기를 보십시오. “어제는 숟가락을 혼자 잡을 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를 잡고 열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쁩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고는, 그간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는 전할 수 없는 메시지들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이런 모습의 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분명 제게 맡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거듭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십자가를 다시 바라봄으로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며, 여러분의 삶에 감사와 행복이 가득 넘쳐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