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사도행전11:19-26)
                                    

어느 날 오후, 8살 먹은 딸아이의 방 앞으로 지나던 아빠가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놀면서 하는 대화를 옅듣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놀다가 우리랑 같이 저녁 먹고 가.”
“니네 아빠가 허락하실까?”
딸은 자신감에 찬 어조로 즉각 대답했습니다.
“문제없어. 우리 아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셔.”
아빠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거실로 내려왔습니다. 조금 후에 거실에 내려온 딸아이가 몸을 비비꼬면서 아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빠 사랑해, 나는 우리 아빠가 최고야. 아빠는 날 위해 뭐든지 다 해주잖아.”
딸은 아빠를 녹여주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 순간을 더 연장하고 싶었습니다. 딸은 아빠얼굴에 뽀뽀를 하고 끌어안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내 친구 오늘 저녁 우리랑 같이 식사해도 돼?”
아빠는 딸이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으므로 즉시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딸의 그 사랑스런 몸짓과 말이 너무 좋아서 시간을 조금 더 끌고 싶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와 아빠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새겨봅니다.
마태복음6:8, 32입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로마서8:32 말씀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월요일 미국을 간 아내는 그 다음날 손녀를 가슴에 안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심으로 건강한 아기를 순산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약 한달 전부터 마루 한쪽에 여행용 가방을 준비해 놓고, 처음 아기를 낳게 될 딸을 위하여 물건을 챙겼습니다. 딸에게 가는 날 두 개의 여행가방에 뭔가 가득 채워서 갔습니다. 심지어 좁쌀까지 준비하더군요. 딸을 향한 엄마의 사랑은 딸이 엄마를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어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시며 영원한 천국까지 넉넉히 인도하시는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꽤나 심각합니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19)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처음 예루살렘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믿는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레바논지역의 베니게로, 지중해 동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섬 키프러스로, 예루살렘에서 약480km의 거리에 있는 수리아지역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정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낯설고 물 설은 이방 땅으로 흩어져갔습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믿음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간 것처럼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새로운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계속하였습니다.
본문 19,20의 말씀입니다.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책임감이나 의무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사람에 주신 예수복음의 능력이 너무 크고 귀하였기에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언제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기쁨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들의 믿음의 열정을 식어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에는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사도행전13:51,52)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기쁨과 감사입니다.  
믿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저주에서 축복으로 우리 삶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죄인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고아와 같이 악전고투하는 삶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으로 흩어져간 이름 없는 신자들의 전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예루살렘교회에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하였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착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지혜가 특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구약시대에 살았던, 신약시대에 살았던, 오늘을 살던 동일하게 탁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감리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요한웨슬리가 이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경건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조교수의 역할을 하며 경건서적을 탐독하였습니다. Holy Club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아주 규칙적이고 열심있는 경건 생활을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규칙쟁이들”-즉 "Methodist" 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북미 조지아주 인디언들을 위하여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은 힘겨웠습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하기보다 언제나 책임과 의무감이 앞섰습니다. 선교사의 사역은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문제까지 생기게 되자 그는 선교사의 사역을 뒤로하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배안에서 심한 풍랑으로 인한 두려움과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 때쯤 웨슬리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 후 1738년 5월 24일 밤 ‘올드스 게잍 거리’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8시 45분경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날 쓴 일기의 한 부분입니다.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움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악들을 제거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날에 일어난 웨슬리목사의 변화의 사건, 중생의 체험을 기억합니다. 268년 전 한 젊은이의 가슴을 뜨겁게 하셔서 새로운 사람을 살게 한 성령의 역사를 기념합니다. 성령 충만한 한 사람을 통하여 감리교회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영국이 탄생되었습니다.  
그 날의 역사는 이미 바나바에게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교회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사역을 본문에서 찾아보면 놀랍습니다.

1.사역이 특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굳센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 권하였습니다.”
그의 안디옥 사역은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을 고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귀신들을 좇아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하늘의 비밀을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신앙적인 권면을 계속하였습니다. 평범한 사역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실력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여 주시는 중에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만수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지난 토요일부터 감기몸살이 심하게 와서 월요일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도무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에 주사를 맞아가며 일곱 번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했다는 것을 들은 제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하나님이 재동을 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경험의 노하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일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굳센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 권면하는 사역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특별하고 신바람이 납니다.  

2.혼자 일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6절 말씀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년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함께 일한다는 것, 특별히 다른 사람을 세워준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특별히 바나바는 사울이라는 숨은 일꾼을 발굴하여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그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는 바나바였습니다. 그를  중심하여 모든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사역은 바울과 동역으로 이어지다가 후에는 바울이 앞장서고 그는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것은 사울이 바울로 이름을 바뀌면서 함께 일어난 변화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기록도 “바나바와 사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바꾸었습니다.(사도행전13:9,13,15)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을 소유하였습니다. 남을 기꺼이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김을 받아서가 아니라, 섬기는 데서 사역의 진정한 보람을 얻고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사역에는 삶의 열매가 아름답습니다.  
1.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하였습니다.
2.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기대 밖에 많은 열매가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함께 하신 성령님이 만드신 열매입니다.
웨슬리목사의 사역에서 1738년 5월 24일 이전과 이후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2년여 동안의 조지아의 인디언 선교는 1738년 초에 사실상 낭패감으로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생을 체험한 다음 해 1739년 4월 1일 브리스톨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야외설교를 기점으로 그의 사역에는 날개가 달렸습니다. 4월 2일에는 약 3,000명에게 설교했고, 4일에는 1,500명에게, 그리고 8일에는 하남 산에서 1,500에게, 그리고 10일에는 바스에서 1,000명에게, 15일에는 다시 하남 산에서 3,000명에게, 로즈그린에서는 5천명에게, 25일에는 밥티스트 밀에서 2,000명에게, 29일에는 뉴게이트에서 4,000명, 다시 하남 산에서 3,000명, 로즈그린에서 약 7,000명에게 설교했습니다.
같은 사역이라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풍성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3:9)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라 하였습니다.  

3.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습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람들이 그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습니다.(헬라어 χριστιανός는 라틴어 Christian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평범한 서술적인 말로써 어느 집단에 속한 충성스러운 무리들을 부를 때 사용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1:20,21 말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항상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고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5:42) 그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이런 별명이 예루살렘이 아닌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사역하는 동안 처음 불려졌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런 별명으로 불려져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익명의 크리스챤으로 살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떳떳하게 예수 믿는 냄새를 풍기고, 예수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주일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받아든 일정을 보면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짜여진 일정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내를 책임진 북한의 사람들은 상부에 건의해본 결과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고 말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최후에 토요일 부득불 북한을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주일성수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북한의 간부들은 속으로 “지독한 기독교인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당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영광입니다.  
성령 충만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즐겁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의 회심 26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안디옥교회 바나바처럼! 바울처럼! 성령님과 함께 하는 신나는 믿음의 생활이 여러분들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