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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언약 문제로 인해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끌고 당기는 미묘한 관계를 소개하던 성경이 독자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입니다. 독자들이 거의 기억하지 못하던 아브람의 삶의 한 부분(하지만 그것은 아브람에게는 지극히 중요했던 부분)을 성경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브람의 아내 사래입니다.
사래는 좋은 아내였습니다.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며 살았던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래를 이렇게 극찬합니다. “사라[사래]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6). 사래는 남편을 “주”로 칭하며 복종했습니다. 글쎄 여기에 앉아 계신 여자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남편을 주라고 고백하며 복종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로써 “(권위에 있어서) 최고 통치자, (절대적 존경을 받는) 님, 주인”을 의미합니다. 여자 성도 여러분, 남편을 “주”라 칭하며 섬기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현숙한 아내의 모습입니다.
아브람을 “주”라 부르며 순종했던 사래는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여호와”라는 신만 섬기기로 결단한다 하기에 남편과 같이 여호와만 섬기기로 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겠다던 남편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가야 한다기에 사래는 남편과 함께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이민의 길에 올랐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허락하겠노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노라 남편이 말하기에 사래는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물론 후손의 약속을 받을 때 사래는 자신의 늙은 몸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고 남편이 강조하니까 그 약속을 믿고 아이가 배에 들어서길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남편 아브람은 사래의 배에 언제나 아이가 생길래나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래를 쳐다봅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남편의 간절한 눈초리가 사래를 초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장막 안에서 “도대체 나더러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소리쳐 울부짖습니다. 잉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아이에 대한 부담은 사래를 깊은 불안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서서히 불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래의 불신을 역력히 볼 수 있고, 또한 창 18:12에서는 더욱 강도 높은 사래의 불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한마디로 말해서, 사라(사래)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콧방퀴 뀌었다는 말입니다.
설령 남편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사래에게는 하나님은 신뢰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다간 남편의 후손을 낳지 못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어질 게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아직까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냐?” 남편 아브람이 따진다면 사래는 정말 할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처한 환경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사래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찾은 첫째 묘책은 아기를 갖지 못한 책임과 부담으로부
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임의 책임을 떠맡아야 할 대상을 찾게 되는데, 찾은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후손에 관한 언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아직까지 후손을 주지 않으신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그분의 책임이 아니냐는 논리를 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하였으니” (2절 상반절). 여기서 그녀는 맺은 언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래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용한 둘째 묘책은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면 타인의 몸이라도 빌려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이라는 애굽인 종의 몸을 사용키로 했습니다. 불임의 이유와 책임을 여호와 하나님께 확실하게 돌려놓은 후 사래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건의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맺은 언약에 충실하다고 하시는 “여호와”는 그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이젠 아브람 당신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도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는 논리입니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들으니 논리가 그럴 듯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극히 현실적이었고 현명하기만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달콤한 말의 꾀임을 받고 나니 전에는 절대로 따먹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했던 선악과나무가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든지 하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와는 옆에 있던 남편 아담도 꾀여 그 열매를 먹도록 유도함으로써 공범으로 만들어 놓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듯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의 건의에 동의했습니다.
한편,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갖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는 사래는 하갈의 몸을 통해 한 명의 자식만 아니라 많은 자손을 얻기 원했습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2절 중반절). “자녀를 얻다”는 동사를 위해 히브리어 바나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동사는 “짓다, 짓기 시작하다, 아이들을 얻다, 가족을 만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사래는 하갈의 몸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위한 후손을 확실히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주 당차고 야무진 생각이지요.
사래는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들을 얻게 되면 그 자식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식들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2절). 그런데 사래가 뜻하는대로 하갈을 통해 얻은 자식이 사래의 자식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갈이 자신의 몸종이니까. 사래에게 있어서 하갈은 사래 자신과 동등한 한 인간이 아니라 몸종에 불과했고, 몸종이기에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하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식을 얻고자 했던 사래의 계획은 분명히 그릇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사래는 자신이 그릇 사용했던 도구에 의해 배신과 모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4절).
교우 여러분, 언제나 올바른 방법으로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올바른 방법을 고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릇된 방법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수고에 대한 가치는 남지 않습니까? 올바르지 못한 수고의 열매는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그릇된 열매를 낳습니다. 성경은 “심는대로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그릇된 수단과 방법은 반드시 그릇된 결과,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오늘날 한국의 부정직한 대선자금이 밝혀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정당과 정치인들을 보지 않습니까? 성공했다 한들 반드시 그에 준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을 보면, 성경은 “사래의 여종이 잉태했다,” “사래의 여종 하갈이 잉태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갈이 잉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갈이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하갈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사래와 아브람 사이의 자식이 아니라 하갈과 아브람 사이의 자식이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동의에 의해 하갈이 아브람과 동침할 때부터 하갈의 신분은 변했고,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는 그녀의 위체가 상당히 격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갈이 보기엔 여주인 사래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었습니다. 신분이 사래의 몸종이었을 때는 사래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했지만, 신분의 변화가 생긴 이상 하갈은 사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갈은 아브람의 씨를 자신의 몸에 갖게 되자 사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4절 끝에 소개된 “멸시하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랄인데 “가볍게 여하다, 사소하게 (천하게) 취급하다, 저주하다, 멸시하다, 욕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하갈의 모습을 보고 사래가 이를 갈며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람이 변해도 유분수지, 저렇게 못되게 변할 수 있을까?” 사래는 아무리 분해도, 아무리 속상해도, 변한 상황, 변한 하갈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생각이 빚어낸 결과물이니까.
하지만 사래는 변한 상황과 자신의 허물의 대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외치며 남편 아
브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5절 상반절). 아니 왜 아브람이 사래 자신이 받아야 할 모욕을 받아야 옳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책임질 수 없다면 뿌리지 않았어야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겠다는 논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뿌린 삶의 행위에 대한 대가(열매)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자신이 받고 있는 모욕의 책임을 은근히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절 하반절). 판단하라니 도대체 무엇을 판단하라는 것입니까? 이 말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기사 위로하시고 하갈과 아브람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요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사래는 자신의 허물의 결과에 책임지기 보다는 타인에게 책임 전가함으로써 하갈을 학대하고 결국 하갈로 하여금 도망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6절).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사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게 아니라 아브람에게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 쪼개진 고기 사이를 친히 지나가시며 언약을 분명히 이루어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어야 하겠노라는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2절)는 사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했기에 사래의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갈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겠다는 계획이 사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사래의 계획에 동조했기에 결과에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갈로부터 배신과 모욕 당한 사래가 울며불며 바가지를 글어대자 사래에게 이렇게 대충 말해버립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6절 상반절). 집안의 여인들 싸움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상관하지 않을 테니 좋을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그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찌 그토록 무책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뜻하지 않는 좋지 않는 결과일지라도. 결과에 책임진다는 것은 첫째로, 그릇된 길에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둘째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고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회개한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타인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래와 아브람이 자신들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의 열매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치는 하갈을 광야에서 만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하갈]를 만나” (7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도망치는 하갈에게 다시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 본연의 의무를 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만약 하갈이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사래와 아브람의 허물의 씨앗인 하갈의 태중에 있는 아기의 미래를 친히 책임져 주시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게 하리라” (10절).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책임감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는 전혀 상관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안타깝게 여기셨고, 죄의 열매로 사형 선고 받은 인간을 구원할 방안을 강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구원할 길을 펼치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자신의 독생자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죄에 대해 책임 없다 하시며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머물지 않으시고 친히 해결자가 되셨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가정에서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나아가서 세상에서는 책임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허물의 결과에 책임을 질 뿐더러 우리의 허물과 관계 없는 타인의 허물과 결과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은 책임 있는 자들에게 맡겨진 곳입니다. 마치 책임 있는 가장에게 가정이 맡겨지듯이. 마치 책임 있는 성도에게 교회가 맡겨지듯이. 왜냐하면 책임 있는 자만이 현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 있는 사고와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변명과 책임 회피는 마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현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언약 문제로 인해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끌고 당기는 미묘한 관계를 소개하던 성경이 독자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입니다. 독자들이 거의 기억하지 못하던 아브람의 삶의 한 부분(하지만 그것은 아브람에게는 지극히 중요했던 부분)을 성경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브람의 아내 사래입니다.
사래는 좋은 아내였습니다.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며 살았던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래를 이렇게 극찬합니다. “사라[사래]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6). 사래는 남편을 “주”로 칭하며 복종했습니다. 글쎄 여기에 앉아 계신 여자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남편을 주라고 고백하며 복종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로써 “(권위에 있어서) 최고 통치자, (절대적 존경을 받는) 님, 주인”을 의미합니다. 여자 성도 여러분, 남편을 “주”라 칭하며 섬기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현숙한 아내의 모습입니다.
아브람을 “주”라 부르며 순종했던 사래는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여호와”라는 신만 섬기기로 결단한다 하기에 남편과 같이 여호와만 섬기기로 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겠다던 남편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가야 한다기에 사래는 남편과 함께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이민의 길에 올랐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허락하겠노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노라 남편이 말하기에 사래는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물론 후손의 약속을 받을 때 사래는 자신의 늙은 몸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라고 남편이 강조하니까 그 약속을 믿고 아이가 배에 들어서길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남편 아브람은 사래의 배에 언제나 아이가 생길래나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래를 쳐다봅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남편의 간절한 눈초리가 사래를 초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장막 안에서 “도대체 나더러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소리쳐 울부짖습니다. 잉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아이에 대한 부담은 사래를 깊은 불안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서서히 불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래의 불신을 역력히 볼 수 있고, 또한 창 18:12에서는 더욱 강도 높은 사래의 불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한마디로 말해서, 사라(사래)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콧방퀴 뀌었다는 말입니다.
설령 남편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사래에게는 하나님은 신뢰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다간 남편의 후손을 낳지 못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어질 게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아직까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이냐?” 남편 아브람이 따진다면 사래는 정말 할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처한 환경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사래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찾은 첫째 묘책은 아기를 갖지 못한 책임과 부담으로부
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임의 책임을 떠맡아야 할 대상을 찾게 되는데, 찾은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후손에 관한 언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아직까지 후손을 주지 않으신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그분의 책임이 아니냐는 논리를 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하였으니” (2절 상반절). 여기서 그녀는 맺은 언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래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용한 둘째 묘책은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면 타인의 몸이라도 빌려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이라는 애굽인 종의 몸을 사용키로 했습니다. 불임의 이유와 책임을 여호와 하나님께 확실하게 돌려놓은 후 사래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건의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맺은 언약에 충실하다고 하시는 “여호와”는 그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이젠 아브람 당신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도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는 논리입니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들으니 논리가 그럴 듯 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극히 현실적이었고 현명하기만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달콤한 말의 꾀임을 받고 나니 전에는 절대로 따먹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했던 선악과나무가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든지 하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와는 옆에 있던 남편 아담도 꾀여 그 열매를 먹도록 유도함으로써 공범으로 만들어 놓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듯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의 건의에 동의했습니다.
한편,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갖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는 사래는 하갈의 몸을 통해 한 명의 자식만 아니라 많은 자손을 얻기 원했습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2절 중반절). “자녀를 얻다”는 동사를 위해 히브리어 바나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동사는 “짓다, 짓기 시작하다, 아이들을 얻다, 가족을 만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사래는 하갈의 몸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위한 후손을 확실히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주 당차고 야무진 생각이지요.
사래는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들을 얻게 되면 그 자식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식들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2절). 그런데 사래가 뜻하는대로 하갈을 통해 얻은 자식이 사래의 자식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갈이 자신의 몸종이니까. 사래에게 있어서 하갈은 사래 자신과 동등한 한 인간이 아니라 몸종에 불과했고, 몸종이기에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하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식을 얻고자 했던 사래의 계획은 분명히 그릇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사래는 자신이 그릇 사용했던 도구에 의해 배신과 모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4절).
교우 여러분, 언제나 올바른 방법으로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올바른 방법을 고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릇된 방법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수고에 대한 가치는 남지 않습니까? 올바르지 못한 수고의 열매는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그릇된 열매를 낳습니다. 성경은 “심는대로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7-18). 그릇된 수단과 방법은 반드시 그릇된 결과,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오늘날 한국의 부정직한 대선자금이 밝혀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정당과 정치인들을 보지 않습니까? 성공했다 한들 반드시 그에 준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을 보면, 성경은 “사래의 여종이 잉태했다,” “사래의 여종 하갈이 잉태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갈이 잉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갈이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하갈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사래와 아브람 사이의 자식이 아니라 하갈과 아브람 사이의 자식이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동의에 의해 하갈이 아브람과 동침할 때부터 하갈의 신분은 변했고,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는 그녀의 위체가 상당히 격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갈이 보기엔 여주인 사래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었습니다. 신분이 사래의 몸종이었을 때는 사래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했지만, 신분의 변화가 생긴 이상 하갈은 사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갈은 아브람의 씨를 자신의 몸에 갖게 되자 사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4절 끝에 소개된 “멸시하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랄인데 “가볍게 여하다, 사소하게 (천하게) 취급하다, 저주하다, 멸시하다, 욕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하갈의 모습을 보고 사래가 이를 갈며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람이 변해도 유분수지, 저렇게 못되게 변할 수 있을까?” 사래는 아무리 분해도, 아무리 속상해도, 변한 상황, 변한 하갈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자신의 그릇된 생각이 빚어낸 결과물이니까.
하지만 사래는 변한 상황과 자신의 허물의 대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외치며 남편 아
브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5절 상반절). 아니 왜 아브람이 사래 자신이 받아야 할 모욕을 받아야 옳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책임질 수 없다면 뿌리지 않았어야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겠다는 논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뿌린 삶의 행위에 대한 대가(열매)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자신이 받고 있는 모욕의 책임을 은근히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절 하반절). 판단하라니 도대체 무엇을 판단하라는 것입니까? 이 말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불쌍히 여기사 위로하시고 하갈과 아브람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요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사래는 자신의 허물의 결과에 책임지기 보다는 타인에게 책임 전가함으로써 하갈을 학대하고 결국 하갈로 하여금 도망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6절).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사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게 아니라 아브람에게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 쪼개진 고기 사이를 친히 지나가시며 언약을 분명히 이루어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어야 하겠노라는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2절)는 사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했기에 사래의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갈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겠다는 계획이 사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사래의 계획에 동조했기에 결과에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갈로부터 배신과 모욕 당한 사래가 울며불며 바가지를 글어대자 사래에게 이렇게 대충 말해버립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6절 상반절). 집안의 여인들 싸움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상관하지 않을 테니 좋을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그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찌 그토록 무책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뜻하지 않는 좋지 않는 결과일지라도. 결과에 책임진다는 것은 첫째로, 그릇된 길에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둘째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고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회개한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타인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래와 아브람이 자신들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의 열매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치는 하갈을 광야에서 만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하갈]를 만나” (7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도망치는 하갈에게 다시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 본연의 의무를 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만약 하갈이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사래와 아브람의 허물의 씨앗인 하갈의 태중에 있는 아기의 미래를 친히 책임져 주시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게 하리라” (10절).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책임감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는 전혀 상관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안타깝게 여기셨고, 죄의 열매로 사형 선고 받은 인간을 구원할 방안을 강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구원할 길을 펼치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자신의 독생자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죄에 대해 책임 없다 하시며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머물지 않으시고 친히 해결자가 되셨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가정에서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나아가서 세상에서는 책임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허물의 결과에 책임을 질 뿐더러 우리의 허물과 관계 없는 타인의 허물과 결과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은 책임 있는 자들에게 맡겨진 곳입니다. 마치 책임 있는 가장에게 가정이 맡겨지듯이. 마치 책임 있는 성도에게 교회가 맡겨지듯이. 왜냐하면 책임 있는 자만이 현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 있는 사고와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변명과 책임 회피는 마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현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