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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시험 (말3:7-12)
제가 전에 교회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총 전도주일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해서 결신하는 은혜를 입었는데 한 자매님이 남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서 남편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음날 심방을 갔습니다. 등록을 받고 여러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부형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데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친척들이 예수교를 다니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천주교를 다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형님, 얼마나 비용이 들면 믿으시렵니까?" "담배값 정도만 괜찮겠습니다." "왜 담배값 정도를 생각했습니까?" "예수 믿으면 담배를 끊을테니까 그 돈을 예수님께 바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넉넉합니다." "비용이 별로 안드네요?" 그래서 그 부형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데 놀라운 사실은 다음에 비용이 조금 올랐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비용이 올랐습니까?" 했더니 예수 믿고 술을 끊어서 술값을 더 보탰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빠지지 않고 교회 출석을 잘 하기에 제가 세례 받으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세례를 안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으라고 권면했더니 아직 때가 안되었다고 거절해요. 그래서 다시 세례를 받도록 강권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제 남편이 무슨 말을 들어서 안받습니다." 그래요. "무슨 얘기인데요?" "세례 받으면 십일조 바쳐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안바치려고 세례를 안받는 것입니다."
3년 되던 해에 제가 이 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나보고 질문을 해요. "목사님, 십일조를 바치려면 수확의 십일조입니까 비용을 다 제하고 십일조입니까?" 그래서 "비용을 제하고 바쳐도 되고 수확의 십일조를 바쳐도 되는데 믿음대로 하면 됩니다." 했더니 "비용을 다 제하고 나면 얼마 안되는데..." 그러면서 그해 비용을 제하고 쌀 두 가마니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해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놀라운 사실이 벌어졌는데 이 분이 추수감사주일에 쌀 20가마니를 바쳤어요.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만날 때 물었습니다. "아니 무슨 비용이 10배나 올랐습니까?" "목사님 비용을 많이 올렸습니다. 자식도 공부 잘 시키려면 유학 비용이 많이 들고 옷도 좋은 옷을 사 입으려면 비용을 많이 들이는데 내가 천국 백성이 되어서 어떻게 비용을 값싸게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비용을 비싸게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큰 감동을 받고 아낌없이 축복을 했습니다.
예수 믿고 가장 큰 부담이 있다면 십일조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넉넉한 살림이라 해도 십일조를 부담입니다. 월급 타서 빠듯하게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십일조를 바치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십일조를 못바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넉넉해도 십일조를 안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복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받아 잘 살기를 원합니다.
잘 산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잘 되어야 합니다. 육체가 건강해야 잘 삽니다. 사업도 잘 되어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어느 하나만 잘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 가지가 종합적으로 잘 되어야 합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복을 너무 많이 주셔서 넘쳐서 쌓을 곳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또 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시험하여...' 이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치 말락 했는데 여기에서는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시험하라'는 말을 학자들은 '증명하다, 확증하다'하고 해석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전 곁에 창고를 지어서 농사를 지어서 십일조를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바쳐서 그것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양식이 되고 거룩한 성전의 직무를 행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까? 두 번째는 세례를 받았습니까? 세 번째는 십일조를 바칩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위해 피흘려 구속하셨다는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례는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범사에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만 물어보면 그 신앙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는 율법에 있는 구약의 말씀으로 신약시대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증입니다. 구원받는 믿음도 온전한 십일조의 믿음에 이르지 아니하면 허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내가 확증시키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구약에는 세 가지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 27:30)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 14:22)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어떤 분은 "십일조는 구약에 있는 율법인데 지킬 필요가 뭐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지키셨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도 바치는 정성이라면 그 보다도 더 중한 율법의 의와 인, 믿음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하고 이것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시일조를 명령하셨는데 십일조의 명령에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8절)
첫째, 십일조는 드리는 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소유물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것은 십일조입니다. 다른 것은 나의 소유를 가지고 임의로 정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드리는 자가 금액을 정하지 못합니다. '내가 얼마를 드려야 되겠다.' 그렇게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내 수입의 온전한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리면 되지' 그렇게 내 맘대로 액수를 정하지 못합니다.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요, 액수는 내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지키며 다스리라고 말씀하식 한가지를 명령합니다. "선악과는 내 것이니 손대지 말라" 이것이 십일조의 시작입니다. '동산의 모든 과일은 임의로 먹되 선악과는 손대지 말라 이것은 내 것이다.' 그래서 시일조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내 것이니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도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는 곳에서 땄기 때문에 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좌우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강도의 후손이 우리 죄인들입니다. 인류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을 때 양쪽에 강도를 데리고 죽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이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헌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물질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험입니다. 사랑의 확증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라고 했습니다.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십일조는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고백이 됩니다. 십일조는 진실한 마음의 시험인 것입니다. 만약에 십일조 아닌 것을 십일조라고 적당히 바치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됨과 속이는 것이 됩니다.
십일조를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내고 기분이 나쁘면 안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3개월 낸 사람, 어떤 사람은 6개월 낸 사람, 다른 사람이 하나 안하나 보면서 체면 헌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한 것처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십일조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의 최고의 복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복입니다. 가끔 후배들이 저에게 묻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그때 나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할 수 있었던 그때가 나는 최고의 행복이었으며, 보람이었으며, 최대의 영광이었소."라고 고백합니다. 가장 행복한 때가 어느 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때입니다.
영국에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톤이 있습니다. 리빙스톤이 어린시절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헌금시간에 헌금 접시를 돌리는데 헌금할 돈이 없으니까 헌금을 할 수가 없어서 헌금을 다 걷고 접시가 정리된 후에 그는 접시를 내려놓고 그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리빙스톤, 지금 무엇을 하느냐?" "목사님,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없어서 마음과 몸을 바치려고 이 헌금 접시 위에 올라갑니다." 그 헌신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는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우리가 사랑하는 리빙스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미국 네시빌에 밴더필트 대학에 유명한 크리스챤 교수인 메디슨세렛이라는 교수가 있는데 그는 학과 시험을 치룰 때마다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시험을 낼 것입니다. 하나는 수학 시험이고 하나는 정직이라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공부 시험에 성공하고 정직 시험에 실패하면 보람있는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 시험에 실패하고 정직 시험에 합격하면 훌륭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온전한 십일조를 손대면 자기 자신이 벌써 진실성에서 실패합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2)
땅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지상의 땅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나라가 어디입니까? 십일조를 잘 바치는 나라들입니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영국, 독일 다 십일조의 나라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심령이 땅입니다. 심령의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가 강건합니다. 십일조를 잘 바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경제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인 철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인 윤리가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청교도의 신앙인데 전 세계적으로 경제를 바르게 확립해서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십일조의 신앙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한국도 잘 사는 사람들은 거의 예수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소망의 시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이 말씀은 축복해 주시는 것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가운데 십일조는 무슨 축복이냐? 십일조 신앙은 나 자신의 개인적 축복일 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의 소망을 가진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어머니가 십일조 신앙으로 살아가면 그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십일조는 자손대의 축복이며 국가의 축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재령읍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본래 병자를 잘 고치기로 유명했던 목사님이신지라 수많은 환자들이 와서 병고침을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안수를 하는데 신체가 건강한 분이 앉아 있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슨 아수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십일조 안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당신 이름이 누구요?" "정찬유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호주머니를 하나 주면서 "평생에 이 십일조 주머니를 가지고 헌금하시오.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믿음대로 생기는대로 십일조를 바쳤는데 재령읍 교회 장로님으로서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한국교회사에 자랑이 되었습니다. 교회당을 개인 재산으로 건축하여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정찬유 장로님은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장로님이십니다.
권사님 한 분이 저에게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바쁘시더라도 좀 나오시죠." 그래서 나갔습니다. 그날 따라 얼굴이 훤해요. 음식을 대접하고 "목사님, 우리 아빠가 오랫동안 시청에 근무를 했는데 퇴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퇴직금을 십일조도 안바치고 다 썼습니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게 몇 개월 지났지만 십일조를 준비해서 그동안 바치지 못한 이자까지 하나님 앞에 바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퇴직금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서 여러분 생애에 기쁨을 얻고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도가 십일조를 바치므로 여섯 번 놀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일조를 바치므로 자기 신앙이 더 확고해져서 놀랐고, 두 번째는 십일조를 바치고도 나머지로 넉넉하게 살아가는데 놀랐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놀랐고, 네 번째는 십일조를 내보니 더 낼 수 있는 담력이 생겨서 놀랐고, 다섯 번째는 십일조를 내면서 자신의 생활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을 보고 놀랐고, 여섯 번째는 이런 축복을 진작 받을 것을 왜 이제야 받았던고 그러면서 후회하면서 놀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문을 열고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나를 시험하라'는 말은 확증하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확증을 십일조로 세우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십일조로 고백하십시오. 하늘나라에 대한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치면서 천국가십시오. 이것만이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바꾸어놓는 삶이 될 것입니다.
출처/이중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