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너를 인하여 복을 받았도다 (창 30:25-30)
어느 가정에 부부가 있었는데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놀음, 그리고 부인을 구타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자식들 눈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느 한쪽이 죽어도 울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할 만큼 이 부부가 극심하게 불화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부인이 자식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도 남편 때문에 늘 울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자식들이 볼 때 평소에는 도무지 저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가 날마다 아버지 때문에 통곡을 하고 저렇게 사실까 그 속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모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실토를 합니다. “얘야, 내가 사실은 네 애비하고 죽기 3일전부터 심하게 다퉜는데 그때 내가 네 애비한테 매일 이런 말을 했단다. 우리가 이렇게 살 바에는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는 게 오히려 낳지 않냐.” 그 악담을 했는데 3일 후에 남편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막상 남편이 죽고 나니까 그 말이 씨가 된 게 너무 가책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나쁜 사람이다. 그런 실토를 했다고 합니다.
복의 씨
성경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도 씨가 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씨가 되어서 싹이 나고 거두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라는 여기에는 모든 게 다 포함됩니다. 말도 포함되지만 우리의 마음가짐도 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행동 하나하나가 다 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매우 깁니다. 야곱의 스토리 중에 아주 긴 대목인데 여기서 우리가 핵심적으로 27절 말씀을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고 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외삼촌입니다. 그런데 라반이라는 사람은 바탕이 좋지 않습니다. 본문에 드러난 라반의 그 모습을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는 거짓말장이라는 것입니다. 야곱과 품삯 약속을 열 번이나 바꾼 사람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입니다. 욕심의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우상숭배자입니다. 본문에 이 세 가지 요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야곱은 불가피하게 외갓집에서 살게 됩니다만 주인을 잘못 만납니다. 라반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영접해 주었지만 바탕이 아주 안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주인을 만나서 야곱이 이제 일하면서 살아가는데 훗날에 그 외삼촌이 야곱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외삼촌 집에 가서 생활한지 14, 5년쯤 되었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굉장한 말입니다. 외삼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증거와 간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 와서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야곱은 그런 면에서 아주 진실합니다. 외삼촌이 자기에게 실망을 시키고 품삯을 제대로 안 주고 거짓말을 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야곱으로 인해서 라반 집이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외삼촌 입에서도 조카 앞에 부인할 수없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의 가정이 복을 받았다, 이것을 주인의 입으로 말하게 되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야곱 때문에 라반이 복 받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간증과 사실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복을 받았다.” 이 원리로 사건을 하나님이 간증해 주는 게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를 하면, “요셉으로 인해서 보디발 집이 복을 받았다”라고 성경이 명백하게 기록을 합니다. 또 하나는 로마로 가는 배가 276명의 승객을 싣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유라굴로 라는 태풍을 만났습니다. 이 배가 바람에 밀려 거의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풍랑으로 인하여 죽을 줄 알았습니다. 선주와 선장과 백부장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배안에 사도 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줍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 “저들의 생명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너 하나 때문에 이 생명을 내가 보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간증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 속에 이 원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성도가 다 충성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복되고 부흥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가운데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할 수 있는, 가로막을 수 있는 불신앙자도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단에는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축복을 가로막는 악인들도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우리 앞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발전하고 부흥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를 인하여 복을 받았다.” 이보다 우리에게 명예로운 인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인사를 받기 원합니까? “너로 인하여 내가 복을 받았다” 이 말을 듣는다면 그보다 더 명예로운 인사가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언약을 주실 때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두 번째는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세 번째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 복의 근원의 언약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루게 하고 되게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게 하면 못 이루어질 일이 없고, 하나님이 되게 하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되게 하고 이루시는 그 언약이 메시야 언약입니다. 메시야 언약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근면의 사람
야곱은 진실하고 부지런히 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그 행위는 우리가 두 가지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일입니다.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첨가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축복을 받은 그 행위는 상대방에게 관계가 있습니다. 즉 에서가 하나님 앞에서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제외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에서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야곱의 꾀가 스며든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가 받을 복을 가로채는 거기에 인간적으로는 속임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볼 때는 하나님은 그 방법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여호와의 축복을 갈구하는 야곱의 그 열정, 그 영성을 하나님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야곱의 열정을 가져야 됩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자권도 팥죽 한 그릇에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부터 야곱은 하나님의 손에 잡힌 자가 되고 에서는 하나님의 손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됩니다. 야곱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그 선한 목표를 향해서 최선을 다한 집념의 사나이입니다. 그에게는 경쟁자가 없습니다. 어떤 경쟁자도 물리치고 이기는 열정이 있고 아주 강한 집념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런 집념을 가지고 외갓집에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야곱은 외사촌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 여동생을 아내로 얻기로 외삼촌과 계약을 합니다. 그 계약으로 7년 동안 머슴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목표가 있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태도입니다. 그 부지런함에 의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외삼촌은 약속대로 둘째딸 라헬을 야곱에게 주지 않고 못난이 레아를 먼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바라는 여종을 하나 붙여주었습니다. 야곱이 억울해 하고 외삼촌한테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때 다시 계약을 했습니다. “내가 7일 후에 라헬과 결혼을 시켜줄 테니까 앞으로 7년간 더 머슴노릇을 해다오.” 그것을 기꺼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라헬에게는 빌하 라는 여종을 붙여주어서 실제로 야곱은 아내가 네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허용된 일부다처의 관행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이것을 그 시대에 하나님이 묵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부다처의 행위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다 징계를 받는 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이렇게 긴 시간동안 봉사를 하고는 이제 자기 몫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내가 이제는 독립을 해야 되겠고, 내가 이제는 내 집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내 집은 언제 세우렵니까? 몫을 주십시오.” 그때 라반이 야곱에게 제안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유하라.” 우리 집에 네가 평생 살면 이 유업이 다 너에게로 돌아갈 것 아니냐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저가 외삼촌의 양을 먹일 때 얼룩무늬가 있고 점이 있는 것은 전부 내게로 주십시오.” 점이 없고 얼룩무늬가 없는 양은 외삼촌께로 돌리고, 점이 있고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자신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점 있는 양이 거의 적기 때문에 라반은 기꺼이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계약으로 맺고 나서는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실하고 건강한 양이 새끼를 배었을 때는 야곱이 우물가 물 먹이는 데에 데리고 가서 그 양이 물 먹는 눈 앞에 나뭇가지를 세워 놓으면 새끼를 낳을 때 얼룩무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실한 양이 새끼를 밸 때는 그렇게 해 가지고 건강한 양을 낳게 하고, 건강하지 않는 양이 새끼를 밸 때는 별도로 하니까 새끼도 건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삼촌은 알지 못하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갈수록 성경에 말하기를 “양대와 낙대와 나귀와 노비가 풍부한지라” 야곱은 이제 외삼촌의 재산을 압도할 만큼 많은 우양과 노비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부가 됩니다.
부조리를 극복한 축복
야곱은 외삼촌 집을 떠나온 마당에 외삼촌과 명예로운 이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외삼촌의 욕심입니다. 이 조카를 떠나보내면서도 욕심을 부리는 라반의 모습, 철저하게 그는 이 땅위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자의 전형적인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라반은 비인격자입니다. 아주 비겁한 짓을 야곱 앞에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야곱의 이 사건에서 이제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볼 것은 우리가 라반과 야곱이라는 이 두 사람의 모델을 두고 보면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과 비교할 때 인격자로 등장을 합니다. 야곱은 인격적인 품군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아주 비인격적인 주인입니다. 인간답지 못한 주인 밑에서 야곱은 신실한 품군의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요즘 전문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모 경제신문에서 출판하는 중요한 서적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시대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런데 전문 경영인보다 더 위대한 조건은 인격경영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영인 가운데 전문성은 있어도 사람이 덜 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격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전문경영인이라는 말은 많이 쓰여졌는데 인격경영인이라는 말은 잘 안 쓰여졌습니다. 훗날에 우리 교단 살림도 전문경영인에게 학교와 병원은 맡겨야 된다는 데에 모두 공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전문경영인이 맡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격적인 사람이 그것을 맡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문성이 있어도 인간이 덜 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에 대하여 인격경영인일 뿐 아니라 외삼촌에게 중요한 것을 하나 보여주었는데 ‘신앙적 경영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영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격경영인은 그래도 세속적 영역 안에 있는 것인데, 신앙경영인은 하나님 앞에 복의 근원이 되는 존재입니다. 야곱은 신앙적 경영인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언약을 품고 있었고 그는 한시라도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상숭배주의자 라반의 집에 살면서도 그는 하나님 편에서 일했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구분이 됩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시험을 쳐서 대학을 진학하게 되겠는데 모두가 전문인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전문성을 가져야 됩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교육의 과정으로 우리를 전문인으로 만드는 필수과정입니다. 교육을 안 받고는 전문인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도 교육은 중요합니다. 교육이나 정책이나 연단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를 전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험을 잘 쳐야 되고 공부를 잘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만 집착하면 다 되느냐,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어떤 글에 보니까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발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 말라, 이것은 백해무익하다. 그 압박에 아이들이 정서가 망가져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자식의 미래에 대해서 아주 집착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 놈이 아버지 기대에 전혀 부응을 못합니다. 언제나 꼴찌그룹에 맴도는 아들의 성적 때문에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는 아들을 보고 “야 임마, 네가 이번만은 제발 애비를 좀 기쁘게 해 달라, 이번에도 만약 꼴찌해서 오면 나는 너와 인연을 끊겠다. 애비라고 부르지 마라.” 하도 속이 상해서 망말을 해버린 것입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집에 오니까 아들 놈이 와 있습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너 오늘 시험 잘 쳤냐” 그때 이 아들놈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아저씨 누구예요?” 그러더랍니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장을 비웃는 풍자입니다. 우리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온갖 것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웃 사랑할 줄 알고, 자기보다 낮은 자를 배려할 줄 아는 인격경영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지금 인격 경영인이 서서히 돋보입니다. 그래서 경영인 중에 덕을 쌓는 경영인이 이 시대에 돋보입니다. 덕을 잃어버린 경영인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이 붙잡아주는 신앙경영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자입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복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와 같은 자리에 서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성적에만 생사를 걸지 말기 바랍니다. ‘인격경영인’ ‘신앙경영인’ 이와 같은 요건을 가지고 우리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