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나를 위하여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 해 전에 불란서의 수도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파리의 어느 뒷골목에는 4층 짜리 아파트가 여러 채 서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가운데의 아파트 한 채에서 큰불이 발생했습니다. 거센 불길은 아래층에서부터 윗층으로 계속해서 타올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는 아버지가 나이 어린 세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들을 데리고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너무나도 거세기 때문에 아파트의 출입구가 있는 아래쪽으로는 도무지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거센 불길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연기였습니다. 세 아이들은 계속 뿜어 오는 연기 때문에 연신 기침을 콜록콜록했습니다. 그러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모두가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이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까지는 불과 일 미터의 거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베란다에 탁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세 아들을 올려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앞쪽에 있는 아파트로 건너뛰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서는 그 높이에 질려서 겁을 집어먹고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불길은 4층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더 이상 꾸물거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자기의 두 발을 아파트의 베란다에 단단히 걸쳤습니다. 그리고 쓰러질 듯이 하면서 자기 몸을 앞에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로 던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자기 몸으로 이쪽 아파트와 저쪽 아파트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내 몸을 올라타고 저쪽으로 건너가도록 해라."
그 말에 아이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세 아들은 차례대로 아버지의 몸에 올라타서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여 모두가 안전하게 앞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이 무사히 건너 갈 동안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세 아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는 도무지 자기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손을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희생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의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듯이 이렇게 조롱을 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왜 예수님께서 그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어서였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끝까지 참고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희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찬에 임하고자 합니다. 앞서서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믿음의 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서 감격 가운데 외쳤던 본문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초를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결과를 살펴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믿음의 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시간 우리도 믿음의 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5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한 마디로 우리는 허물진 백성이요 죄악 된 백성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는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누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요8장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끌고서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같이 양심에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다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조차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일1:8의 말씀처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주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나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례를 베풀기에 앞서서 모든 교인들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주일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세례를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며느리는 그 전날 할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어머니, 만일 목사님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라고 물으시면 무조건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하세요. 아시겠어요?"
할머니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며느리는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서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역정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알아들었다니까. 걱정하지 말래두."
드디어 그 다음날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세례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목사님은 교인들 앞에서 며느리가 말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은 우리 며느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며느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셨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막2:1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초를 살펴봅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초를 여러 가지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찔리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상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도 맞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6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고초를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온 세상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예수님은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외치셨겠습니까? 사실 인류 역사상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의 명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사람은 많았습니다.
예컨대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신앙 때문에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죽었습니다. 많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기꺼이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의 명분을 위해서 의연한 자세로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하나였던 소크라테스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면서, 그 악법이 내린 사형 선고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내가 일전에 닭 한 마리를 꾼 적이 있는데 그것을 갚지 못하고 죽게 되었구나. 그러니 너희가 나를 대신해서 갚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는 의연한 자세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 속에서 크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십자가가 주는 육체적인 고통이 극심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 이외에도 역사상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많은 죄수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그 좌우 편에 두 강도도 함께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답게 좀더 의연한 자세로 돌아가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은 둘째치고, 소크라테스처럼 성인답게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가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그것도 안되면 남자답게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가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행여 이런 생각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찔려야 하는데, 우리가 상해야 하는데,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그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일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악의 결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하는 고통을 십자가에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처럼 고통스럽게 외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인류 역사상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자의 죽음, 의인의 죽음을 죽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서 대신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아픔을 감싸안고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결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5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우리는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심각한 죄의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보혈을 흘리심으로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의 모든 죄악이 흰눈보다 더 희게 씻어졌습니다. 우리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월남 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바람에 고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미군들은 고아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고아원 안에서 원인 모를 폭탄이 터져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한 아이가 몹시도 다쳤습니다. 급히 수술을 해야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수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전시 중이라서 다른 곳에서 피를 구해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고아원 아이들 가운데서 그 아이와 같은 혈액형을 가진 아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얘들아, 저 아이는 지금 수술을 받아야 되는데 피가 부족하단다. 너희 가운데 저 아이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좀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겠니?"
아이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즉시 부상당한 아이 옆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그의 팔에는 굵은 주사 바늘이 꼽혔습니다. 그 즉시 긴 관을 통해서 그의 붉은 피가 뽑혀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물끄러미 자기의 피가 뽑혀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 아이는 갑자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군의관은 깜짝 놀라서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우니? 주사 바늘이 아프냐?"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군의관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우니? 무서워서 우니?"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군의관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통역관을 불러서 그 아이가 갑자기 우는 이유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던 통역관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의 피가 곧 다 뽑혀 나가서 자기는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아이는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옆에 있는 아이에게 자기의 피를 뽑아 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군의관은 그 사실을 알고 너무나도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죽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옆에 있는 이 아이에게 너의 피를 주려고 했느냐?"
그 아이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얘는 내 친구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144장의 4절 가사입니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하시고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좌정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행여 아직도 우리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들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우리가 입게 된 나음으로 인하여 날마다 기뻐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날마다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며, 날마다 승리로운 삶을 사십시다.
그리함으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나님과 또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살을 찢어 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