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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던 분노의 사람을 겸허한 사명자로 (왕상19:1-8)
제가 들은 설교들 중 가장 감명 깊은 설교들 중의 하나는 2000년 7월 31일 암스텔담에서 들은 안 그레함 롯츠 여사의 설교였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만 여명의 세계교회 지도자들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같은 해인 2000년 10월 15일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며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그 설교를 참고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주제는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입니다. 설교의 제목은 “흔들리던 분노의 사람을 겸허한 사명자로” 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말씀 드립니다. 웃시아왕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뒤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 당시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웃시아왕이 주전 758년에 죽었는데 그 해가 바로 로마 제국의 창립자 로물루스가 출생한 해라고 한다. 웃시아왕이 죽은 해부터 유다의 국세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 그레함 롯츠 여사는 그 당시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그의 삶이 뒤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His life was shaken. 이사야는 먼저 인간적으로 뒤 흔들렸습니다. 그의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사야는 또한 경제적으로 뒤 흔들렸습니다. 웃시야 왕이 재정적인 후원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재정적인 후원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오늘 설교의 배경은 흔들림입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정치가 흔들리고 경제가 흔들리고 개인의 정서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이 죽는 일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정치의 기반, 사업의 기반, 가정의 기반, 건강의 기반, 정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운명적으로 뒤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뒤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 요사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뒤 흔들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분노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일종의 슬픔과 좌절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그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1:4). 이와 같은 슬픔과 좌절이 1장 2장 3장 4장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5장에 오면 분노가 터집니다. “그들은 화 있을찐저”(8) “그들은 화 있을찐저”(11)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찐저”(18) “그들은 화 있을찐저”(21). 저주 섞인 분노를 네 번 토로합니다.
아마 요사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두 주 전 KBS 앞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조지고 부셔라” 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지난 주 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과 목사들은 모두 분노에 차서 구호를 외쳤고 분노에 차서 기도와 설교를 했습니다. “황천 길로 보내주마” 라는 저주의 구호까지 등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뒤 흔들림과 분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안을 느끼면서 분노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도 뒤 흔들렸고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뒤 흔들림과 분노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니다.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엘리야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아람의 군대장관 문둥병자 나아만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가나안의 버림 받은 죽은 개 같은 여자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던 폐인에게도,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에게도,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던 불행한 여인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형에 처형된 강도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니다. 이제 뒤 흔들림과 분노의 사람 이사야에게 펴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여기 1절에 “내가 본즉” 이라고 했지만 이사야 스스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뿐이지요. 밧모섬에 붙잡힌 죄수 사도 요한이 어떻게 스스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하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뿐이지요.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슬픔과 절망과 흔들림과 분노에 빠질 수 밖에 없고, 하늘을 바라보면 기쁨과 소망과 든든함과 환희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거스틴과 펠리칸 교수가 말한 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는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907년의 조선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통째로 뒤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와 조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블레어 선교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망국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건장한 조선의 남자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족이 또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려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처참한 조선 민족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의 손을 펴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안 그레함 롯츠여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뒤 흔들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뒤 흔드는 그 사건들 자체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Look up! Look up!”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 개인들이나 나라 전체가 뒤 흔들리도록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세상이 뒤 흔들렸을 때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이사야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이사야는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새롭게 체험했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세상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수 백년이 지난 다음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도 죄수의 몸으로 그의 몸이 뒤 흔들렸을 때 위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 위에 주님께서 앉아 계신 것을 보았노라"(계4:1).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첫째 높이 들린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님보다 높은 존재는 없습니다. 부시 대통령이나 푸틴 대통령이 나름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세상이나 우주의 주님보다 더 높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도 앗수르도 미국도 러시아도 바라보거나 의지하거나 또는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교훈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둘째 그의 옷 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신 분인 동시에 성전에 가득하게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왕궁이나 대통령 궁에 임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전에, 우리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셋째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천사들이 화답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천사들이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고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당이나 야당이나 어떠한 우방국을 찬양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합니다. 교회가 움직이고 세상이 뒤 흔들립니다. 정치 싸움으로 뒤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세상이 뒤 흔들립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종류의 뒤 흔들림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이사야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았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만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뿐이었지요.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화로다 나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이사야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 말은 "화로다 나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여" 라는 말이 이제는 ‘나여’ 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5장에서는 "Woe to those" 라고 계속해서 부르짖었는데, 6장에 와서는 "Woe to me"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여" 라는 말이 이제는 ‘나여’ 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자요 가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는 조금 전에는 모든 죄의 책임을 정치가와 경제인과 종교인들에게 전가했는데 지금은 모든 죄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자기의 죄가 자기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사야는 입술로 설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설교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입술이 부정한 유다 백성과 자기를 차별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유다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그들과 꼭 같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 죄와 허물을 직시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문제의 책임이요 근원이라는 깨달음과 고백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시각의 변화를 이사야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셋째 이사야의 죄를 씻어주셨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제해주시고 사해 주셨습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천사가 불타는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었습니다. 그것은 아픔의 경험이었고 고통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만지실 때 그것은 우리를 아프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상처를 입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프지만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그래서 주님 앞으로 나아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입술과 몸에 대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의 입술과 몸에 대어집니다. 그러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와 사랑을 이사야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제단 앞에 나아와서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불로 죄 사함과 죄 태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분별하게 내뱉은 정죄와 저주의 말이 담겨있는 우리의 입술의 죄악이 사해지고 태워지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품었던 미움과 정죄의 죄악이 사해지고 태워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더러워지고 추해진 우리들의 입술과 마음과 귀와 눈이 제단의 숯불과 십자가의 피로 태워지고 씻어져서 깨끗해져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정결해졌을 때 그의 마음과 귀도 정결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들을 수 있는 마음과 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안타까운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은 이사야의 가슴은 깨어지고 녹아졌습니다. 애타게 부르짖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사야는 모기 소리 같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는 탄식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아시지요. 저의 삶이 뒤 흔들렸던 것을, 저의 눈이 열려져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을, 그리고 저는 저의 죄악된 모습도 보았습니다. 망하게 된 제 모습도 보았습니다. 저의 입술이 부정한 것도 보았습니다. 저는 설교할 자격이 없는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제단 앞으로 갔을 때 주님은 저의 악을 제하여 주셨고 저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탄식하시는 음성까지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만약, 만약, 하나님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다면,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마 그리고는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요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와 가장 큰 사랑은 주님의 발 앞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수 백년 후에 사도 바울도 받았지요. 사명자를 부르시는 안타까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는 그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이사야는 위대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겸허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적할 때 ‘너희들의’ 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겸허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사야는 그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모두 바쳤습니다. 구약 시대에 살던 그 누구보다도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을 가장 세밀하고 가장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이사야가 겸허한 사명자로 새로 태어난 후 7장에서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 수백 년 후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이사야가 먼저 전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붙잡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뒤흔들리던 분노의 사람 이사야를 겸허한 사명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뒤 흔들리고 있습니까? 분노에 차 있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불로 죄 사함과 죄 태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써 주시옵소서. 주님,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제가 들은 설교들 중 가장 감명 깊은 설교들 중의 하나는 2000년 7월 31일 암스텔담에서 들은 안 그레함 롯츠 여사의 설교였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만 여명의 세계교회 지도자들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같은 해인 2000년 10월 15일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며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그 설교를 참고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주제는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입니다. 설교의 제목은 “흔들리던 분노의 사람을 겸허한 사명자로” 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말씀 드립니다. 웃시아왕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뒤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 당시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웃시아왕이 주전 758년에 죽었는데 그 해가 바로 로마 제국의 창립자 로물루스가 출생한 해라고 한다. 웃시아왕이 죽은 해부터 유다의 국세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 그레함 롯츠 여사는 그 당시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그의 삶이 뒤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His life was shaken. 이사야는 먼저 인간적으로 뒤 흔들렸습니다. 그의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사야는 또한 경제적으로 뒤 흔들렸습니다. 웃시야 왕이 재정적인 후원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재정적인 후원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오늘 설교의 배경은 흔들림입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정치가 흔들리고 경제가 흔들리고 개인의 정서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이 죽는 일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정치의 기반, 사업의 기반, 가정의 기반, 건강의 기반, 정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운명적으로 뒤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뒤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 요사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뒤 흔들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분노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일종의 슬픔과 좌절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그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1:4). 이와 같은 슬픔과 좌절이 1장 2장 3장 4장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5장에 오면 분노가 터집니다. “그들은 화 있을찐저”(8) “그들은 화 있을찐저”(11)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찐저”(18) “그들은 화 있을찐저”(21). 저주 섞인 분노를 네 번 토로합니다.
아마 요사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두 주 전 KBS 앞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조지고 부셔라” 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지난 주 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과 목사들은 모두 분노에 차서 구호를 외쳤고 분노에 차서 기도와 설교를 했습니다. “황천 길로 보내주마” 라는 저주의 구호까지 등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뒤 흔들림과 분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안을 느끼면서 분노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도 뒤 흔들렸고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뒤 흔들림과 분노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니다.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엘리야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아람의 군대장관 문둥병자 나아만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가나안의 버림 받은 죽은 개 같은 여자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던 폐인에게도,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에게도,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던 불행한 여인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형에 처형된 강도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니다. 이제 뒤 흔들림과 분노의 사람 이사야에게 펴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여기 1절에 “내가 본즉” 이라고 했지만 이사야 스스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뿐이지요. 밧모섬에 붙잡힌 죄수 사도 요한이 어떻게 스스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하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뿐이지요.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슬픔과 절망과 흔들림과 분노에 빠질 수 밖에 없고, 하늘을 바라보면 기쁨과 소망과 든든함과 환희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거스틴과 펠리칸 교수가 말한 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는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907년의 조선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통째로 뒤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와 조선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블레어 선교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망국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건장한 조선의 남자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족이 또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려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처참한 조선 민족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의 손을 펴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안 그레함 롯츠여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뒤 흔들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뒤 흔드는 그 사건들 자체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위를 바라보십시오. Look up! Look up!”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 개인들이나 나라 전체가 뒤 흔들리도록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세상이 뒤 흔들렸을 때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이사야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이사야는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새롭게 체험했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세상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수 백년이 지난 다음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도 죄수의 몸으로 그의 몸이 뒤 흔들렸을 때 위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 위에 주님께서 앉아 계신 것을 보았노라"(계4:1).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첫째 높이 들린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님보다 높은 존재는 없습니다. 부시 대통령이나 푸틴 대통령이 나름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세상이나 우주의 주님보다 더 높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도 앗수르도 미국도 러시아도 바라보거나 의지하거나 또는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교훈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둘째 그의 옷 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신 분인 동시에 성전에 가득하게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왕궁이나 대통령 궁에 임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전에, 우리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가 본 주님의 모습은 셋째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천사들이 화답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천사들이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고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당이나 야당이나 어떠한 우방국을 찬양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합니다. 교회가 움직이고 세상이 뒤 흔들립니다. 정치 싸움으로 뒤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세상이 뒤 흔들립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종류의 뒤 흔들림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이사야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뒤 흔들림과 분노와 좌절에 빠져있던 이사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았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만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뿐이었지요.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화로다 나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이사야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 말은 "화로다 나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여" 라는 말이 이제는 ‘나여’ 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5장에서는 "Woe to those" 라고 계속해서 부르짖었는데, 6장에 와서는 "Woe to me"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여" 라는 말이 이제는 ‘나여’ 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자요 가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는 조금 전에는 모든 죄의 책임을 정치가와 경제인과 종교인들에게 전가했는데 지금은 모든 죄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자기의 죄가 자기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사야는 입술로 설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설교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입술이 부정한 유다 백성과 자기를 차별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유다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그들과 꼭 같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 죄와 허물을 직시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문제의 책임이요 근원이라는 깨달음과 고백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시각의 변화를 이사야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셋째 이사야의 죄를 씻어주셨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제해주시고 사해 주셨습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천사가 불타는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었습니다. 그것은 아픔의 경험이었고 고통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만지실 때 그것은 우리를 아프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상처를 입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프지만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그래서 주님 앞으로 나아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입술과 몸에 대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의 입술과 몸에 대어집니다. 그러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와 사랑을 이사야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제단 앞에 나아와서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불로 죄 사함과 죄 태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분별하게 내뱉은 정죄와 저주의 말이 담겨있는 우리의 입술의 죄악이 사해지고 태워지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품었던 미움과 정죄의 죄악이 사해지고 태워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더러워지고 추해진 우리들의 입술과 마음과 귀와 눈이 제단의 숯불과 십자가의 피로 태워지고 씻어져서 깨끗해져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정결해졌을 때 그의 마음과 귀도 정결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들을 수 있는 마음과 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안타까운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은 이사야의 가슴은 깨어지고 녹아졌습니다. 애타게 부르짖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사야는 모기 소리 같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는 탄식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아시지요. 저의 삶이 뒤 흔들렸던 것을, 저의 눈이 열려져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을, 그리고 저는 저의 죄악된 모습도 보았습니다. 망하게 된 제 모습도 보았습니다. 저의 입술이 부정한 것도 보았습니다. 저는 설교할 자격이 없는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가 제단 앞으로 갔을 때 주님은 저의 악을 제하여 주셨고 저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탄식하시는 음성까지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만약, 만약, 하나님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다면,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마 그리고는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요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와 가장 큰 사랑은 주님의 발 앞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수 백년 후에 사도 바울도 받았지요. 사명자를 부르시는 안타까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는 그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이사야는 위대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겸허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적할 때 ‘너희들의’ 죄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겸허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사야는 그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모두 바쳤습니다. 구약 시대에 살던 그 누구보다도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을 가장 세밀하고 가장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이사야가 겸허한 사명자로 새로 태어난 후 7장에서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 수백 년 후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이사야가 먼저 전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붙잡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뒤흔들리던 분노의 사람 이사야를 겸허한 사명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뒤 흔들리고 있습니까? 분노에 차 있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불로 죄 사함과 죄 태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써 주시옵소서. 주님,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