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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세가지 의미 (대상 28:20~21, 고전 3:10~16)
오늘은 우리교회의 창립 11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 가운데서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교회로 사용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우리교회를 통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셨고, 훌륭한 민족의 인물들을 배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도구로 사용하심을 감사드립니다. 110년을 지나오면서 우리에게는 전통보다 비전이 더 필요하고 더 소중합니다. 지난날보다 앞으로의 날들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4만여 개가 있습니다. 신도는 약 1,200만이라고 합니다. 목사의 수는 약 75,000명입니다. 교회의 신도 수는 평균 325명입니다. 한국교회를 통계적으로 볼 때도 우리 교회는 모든 면에서 좋은 교회입니다. 세계로 뻗어나간 한인교회들도 124개국에 총 4,300개의 한인교회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더욱 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시기 때마다 인간과 사회의 객관적 균형은 두 가지 것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입니다. 성경과 교회는 인간사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두 가지 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인간과 사회의 객관적 균형을 제공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전달하는 수단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은 항상 변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사회인들 사이에 균형 잡힌 교회로 인정받습니다. “연동교회가 한다면 옳다”, “연동교회가 어떻게 하나?”, “연동교회가 한다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모범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계 최고의 놀이공원을 세운 월트 디즈니는 공원을 나서는 모든 고객이 입장할 때와 똑같은 미소를 간직할 수 있게 하자는 모토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들어올 때는 침울하고 답답하지만 갈 때는 쾌활해지고, 에너지 넘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디즈니는 친절, 볼거리, 능률, 안전 이 네 가지 가치 가운데 안전을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교회의 네 가지 가치는 무엇일까요? 은혜, 성장, 섬김, 선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가운데 은혜를 최우선으로 꼽고 싶습니다. 교회는 우선 은혜로워야 합니다. 교회가 은혜롭기만 하면 성장하고, 섬기고, 하지 말래도 선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장래에도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동향은 급작스럽게 교회당 없는 교회, 그리고 대형교회 기피현상으로 급선회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면이 있었습니다. ‘럭셔리 강’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이런 모습을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사치하고, 너무 비대하고,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물질적으로 흐르는 경향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는 이미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 나타난 인간사입니다. 사람 중심의 신, 가장 비싼 것으로 만든 신이 좋은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학교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에게 한 아기를 모두 자기의 아기라고 할 때에 칼로 반씩을 나누어주라고 한 얘기를 들려준 다음에 어느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 같으면 어느 쪽을 달라고 하겠니?” 그 때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큰 거로 주세요”.웃지 못 할 물질주의, 자본주의의 영향입니다. 이런 현대의 물질주의 경향에 정반대로 흐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당 없는 교회입니다. 이것도 여전히 문제는 있습니다.
하비 콕스와 다른 신학자들은 교회 없는 종교와 종교 없는 영성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바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고, 본질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110년 된 우리교회 다시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오늘의 성경 9절 말씀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농업과 관련된 비유로 교회를 밭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농사에 대해 많은 비유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농사의 전문적 지식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은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밭이요”라고 하는 말의 전제가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라고 합니다. 자신은 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기술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합니다. 아볼로는 심어놓은데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도 부정과거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라게 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게 하십니다. 아무리 땅에 씨를 심고 물을 주어도 해가 나지 않고, 날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수고에 비해볼 때 우리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는 일회적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지속적입니다.
심고 물을 줄 수 있는 조건은 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밭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심지도 물주지도 못합니다. 교회가 없으면 영혼이 자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영혼이 자라게 하십니다. 교회가 잘못이 많은 것 같아도 교회가 없으면 영혼은 자라지 못합니다.
밭이 좋아야 잘 자라고, 열매가 견실하게 됩니다. 터가 좋아야 열매도 좋습니다. 아프리카에 왜 기근이 심한지 아십니까? 그 곳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씨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밭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비가 내리지 않기에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밭에 뭘 심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밭에서 뭐가 자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밭에는 하나님이 뿌리는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마귀가 뿌리는 씨가 자라고 마귀가 기뻐하는 열매가 맺힌다면 큰일이지요. 가라지가 뿌려지고 난다면 하나님의 밭은 안 됩니다. 좋은 씨로 뿌려지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밭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교회가 미움과 시기의 열매를 맺으면 안 됩니다.
밭이 좋아야 좋은 나무가 자라고 좋은 곡식이 열립니다. 우리의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뿌려도 안자라고, 푸석푸석 먼지만 난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가 있고, 돌작밭에 뿌려진 씨가 있고,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가 있고, 옥토에 뿌려진 씨가 있습니다. 씨는 옥토에 뿌려져야 육십배, 백배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대신 돌을 다 걷어내야 하고, 가시덤불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옥토가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밭이 되고 옥토가 되기 위하여 일꾼들이 계속 수고해야 합니다. 굳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너무 세상 것으로 밟아서 굳어진 강퍅한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돌작밭 같은 방해하는 무거운 것들, 짓누르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가시덤불 같은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을 다 제거해야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모든 불순한 것들을 제거하고 옥토와 같은 하나님의 밭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9절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건축과 관련된 비유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밭은 어떤 사람은 심고, 어떤 사람은 물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집은 어떤 사람은 터를 놓고, 어떤 사람은 건물을 세웁니다. 건물을 세우는 것도 나무 자르는 사람이 있고, 못질 하는 사람이 있고, 페인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을 하나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잔손이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잔손이 다 우리의 할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다 주인은 아닙니다. 집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집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을 우리가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집 주인이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 외의 사람은 모두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노릇만 잘 하면 되는데 주인 노릇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의 열매를 가지려 종을 보냈더니 포도원의 일꾼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은 죽이지 않으리라 했지만 일꾼들은 주인의 아들은 상속자이니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도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노하여 그 일꾼들을 다 진멸하였다고 합니다. 일꾼들이 왜 이런 나쁜 일을 합니까? 자신이 주인인지 일꾼인지 알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는 자신이 자기 집의 주인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면 겸손해지고 충성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이 땅에서 교회입니다. 그리고 저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작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요청은 바르고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나온 책 가운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The Emotionally Healthy Church)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 다 보지 못했지만 모두가 지향하는 교회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터가 좋아야 합니다. 터가 좋지 못하면 무너지고 집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가 건립하고 있는 복지문화관이 있습니다. 이 건물 전체가 완전한 바위 덩어리입니다. 지하 4층을 파느라 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좀 더디긴 하지만 다 지어놓으면 아주 견고할 것입니다. 방수는 저절로 되는 기초입니다. 터가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제가 아는 교회 이름이 반석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반석과는 좀 멀어요. 얼마나 갈라지고 문제가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그 교회 이름을 흔들바위교회로 바꾸라고 했어요.
둘째는 건물의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교회 건축의 재료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견고한 재료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것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라고 합니다. 혹은 부실한 재료가 있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이라고 합니다. 재료가 단단하고 좋아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해를 받을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합니다. 재료가 좋지 못하면 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긴 하지만 간신히 구원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터가 좋고 재료가 좋아야 구원의 확신이 있고, 든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83세 때 자신의 작품 중에서 대작을 하나 선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 작품에”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건축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잘 지어도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집만이 완전한 건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어야 함으로 언제나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말라기 3:10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의 집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늘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6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라고 합니다. 교회가 성전과 관련된 비유를 바울은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이 그 만드는 모든 양식을 다 일러주셨습니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든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9에는 “무릇 내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합니다. 성막의 길이와 모양을 다 일러주십니다. 순금을 쓰라고 성막 기물의 재료를 다 일러주십니다. 법궤를 해달가죽으로 덮으라고 일러주십니다. 성막과 성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지어야 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람의 집으로 만들어 사람의 마음대로 이끌고 사람의 양식대로 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아가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혼란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막과 성전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21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바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나의 성전이 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요구하시고 기대하십니다. 헝거리 부다페스트에 성 스테파누스 성당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단 중앙에 스테파누스 왕의 상이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죽은 사람의 상이 있겠습니까? 이 교회는 사람 중심의 교회입니다. 스테파누스 왕은 자신의 아들이 죽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많이 죽인 왕이지만 교황에게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다고 합니다. 자신이 폐위된 다음에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염려해서 그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성자가 되어 지금도 교회 한 가운데 그의 상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다는데 이런 부질없는 짓이 교회를 몰락하게 만듭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면 몰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손이 개입되고 인본주의와 금본주의가 날뛰게 되면 교회는 몰락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의 것이 될 때에 몰락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유진 피터슨은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 된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교회는 신비와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관이기에 신비합니다. 사람의 사회적 기관이기에 혼란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중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둘째, 교회는 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밭이며 집이며 성전입니다.
사무엘상서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깁니다. 이럴 때마다 교회는 실패합니다. 교회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고 인간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이 것이 바뀌면 안 됩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하나님 지향적일 때에 교회는 어긋나게 되고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항상 우리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이 되고, 사람 지향적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 110년 이후 시대 열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우리교회의 창립 11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 가운데서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교회로 사용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우리교회를 통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셨고, 훌륭한 민족의 인물들을 배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도구로 사용하심을 감사드립니다. 110년을 지나오면서 우리에게는 전통보다 비전이 더 필요하고 더 소중합니다. 지난날보다 앞으로의 날들이 더 중요합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4만여 개가 있습니다. 신도는 약 1,200만이라고 합니다. 목사의 수는 약 75,000명입니다. 교회의 신도 수는 평균 325명입니다. 한국교회를 통계적으로 볼 때도 우리 교회는 모든 면에서 좋은 교회입니다. 세계로 뻗어나간 한인교회들도 124개국에 총 4,300개의 한인교회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더욱 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시기 때마다 인간과 사회의 객관적 균형은 두 가지 것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입니다. 성경과 교회는 인간사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두 가지 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인간과 사회의 객관적 균형을 제공해야 합니다. 교회가 변한다는 것은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전달하는 수단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은 항상 변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사회인들 사이에 균형 잡힌 교회로 인정받습니다. “연동교회가 한다면 옳다”, “연동교회가 어떻게 하나?”, “연동교회가 한다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모범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계 최고의 놀이공원을 세운 월트 디즈니는 공원을 나서는 모든 고객이 입장할 때와 똑같은 미소를 간직할 수 있게 하자는 모토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들어올 때는 침울하고 답답하지만 갈 때는 쾌활해지고, 에너지 넘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디즈니는 친절, 볼거리, 능률, 안전 이 네 가지 가치 가운데 안전을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교회의 네 가지 가치는 무엇일까요? 은혜, 성장, 섬김, 선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가운데 은혜를 최우선으로 꼽고 싶습니다. 교회는 우선 은혜로워야 합니다. 교회가 은혜롭기만 하면 성장하고, 섬기고, 하지 말래도 선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장래에도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동향은 급작스럽게 교회당 없는 교회, 그리고 대형교회 기피현상으로 급선회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면이 있었습니다. ‘럭셔리 강’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이런 모습을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사치하고, 너무 비대하고,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물질적으로 흐르는 경향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는 이미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 때에 나타난 인간사입니다. 사람 중심의 신, 가장 비싼 것으로 만든 신이 좋은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학교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에게 한 아기를 모두 자기의 아기라고 할 때에 칼로 반씩을 나누어주라고 한 얘기를 들려준 다음에 어느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 같으면 어느 쪽을 달라고 하겠니?” 그 때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큰 거로 주세요”.웃지 못 할 물질주의, 자본주의의 영향입니다. 이런 현대의 물질주의 경향에 정반대로 흐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당 없는 교회입니다. 이것도 여전히 문제는 있습니다.
하비 콕스와 다른 신학자들은 교회 없는 종교와 종교 없는 영성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바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고, 본질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110년 된 우리교회 다시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오늘의 성경 9절 말씀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농업과 관련된 비유로 교회를 밭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농사에 대해 많은 비유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농사의 전문적 지식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은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밭이요”라고 하는 말의 전제가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라고 합니다. 자신은 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기술할 때 쓰는 시제입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합니다. 아볼로는 심어놓은데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도 부정과거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라게 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게 하십니다. 아무리 땅에 씨를 심고 물을 주어도 해가 나지 않고, 날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수고에 비해볼 때 우리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는 일회적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지속적입니다.
심고 물을 줄 수 있는 조건은 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밭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심지도 물주지도 못합니다. 교회가 없으면 영혼이 자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영혼이 자라게 하십니다. 교회가 잘못이 많은 것 같아도 교회가 없으면 영혼은 자라지 못합니다.
밭이 좋아야 잘 자라고, 열매가 견실하게 됩니다. 터가 좋아야 열매도 좋습니다. 아프리카에 왜 기근이 심한지 아십니까? 그 곳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씨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밭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비가 내리지 않기에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밭에 뭘 심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밭에서 뭐가 자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밭에는 하나님이 뿌리는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마귀가 뿌리는 씨가 자라고 마귀가 기뻐하는 열매가 맺힌다면 큰일이지요. 가라지가 뿌려지고 난다면 하나님의 밭은 안 됩니다. 좋은 씨로 뿌려지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밭입니다.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교회가 미움과 시기의 열매를 맺으면 안 됩니다.
밭이 좋아야 좋은 나무가 자라고 좋은 곡식이 열립니다. 우리의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뿌려도 안자라고, 푸석푸석 먼지만 난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가 있고, 돌작밭에 뿌려진 씨가 있고,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가 있고, 옥토에 뿌려진 씨가 있습니다. 씨는 옥토에 뿌려져야 육십배, 백배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대신 돌을 다 걷어내야 하고, 가시덤불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옥토가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밭이 되고 옥토가 되기 위하여 일꾼들이 계속 수고해야 합니다. 굳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너무 세상 것으로 밟아서 굳어진 강퍅한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돌작밭 같은 방해하는 무거운 것들, 짓누르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가시덤불 같은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을 다 제거해야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모든 불순한 것들을 제거하고 옥토와 같은 하나님의 밭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9절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건축과 관련된 비유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밭은 어떤 사람은 심고, 어떤 사람은 물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집은 어떤 사람은 터를 놓고, 어떤 사람은 건물을 세웁니다. 건물을 세우는 것도 나무 자르는 사람이 있고, 못질 하는 사람이 있고, 페인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을 하나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잔손이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잔손이 다 우리의 할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다 주인은 아닙니다. 집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집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을 우리가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집 주인이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 외의 사람은 모두가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노릇만 잘 하면 되는데 주인 노릇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의 열매를 가지려 종을 보냈더니 포도원의 일꾼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은 죽이지 않으리라 했지만 일꾼들은 주인의 아들은 상속자이니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도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노하여 그 일꾼들을 다 진멸하였다고 합니다. 일꾼들이 왜 이런 나쁜 일을 합니까? 자신이 주인인지 일꾼인지 알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는 자신이 자기 집의 주인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면 겸손해지고 충성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이 땅에서 교회입니다. 그리고 저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작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요청은 바르고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나온 책 가운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The Emotionally Healthy Church)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 다 보지 못했지만 모두가 지향하는 교회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터가 좋아야 합니다. 터가 좋지 못하면 무너지고 집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가 건립하고 있는 복지문화관이 있습니다. 이 건물 전체가 완전한 바위 덩어리입니다. 지하 4층을 파느라 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좀 더디긴 하지만 다 지어놓으면 아주 견고할 것입니다. 방수는 저절로 되는 기초입니다. 터가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제가 아는 교회 이름이 반석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반석과는 좀 멀어요. 얼마나 갈라지고 문제가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그 교회 이름을 흔들바위교회로 바꾸라고 했어요.
둘째는 건물의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교회 건축의 재료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견고한 재료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것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라고 합니다. 혹은 부실한 재료가 있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이라고 합니다. 재료가 단단하고 좋아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해를 받을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합니다. 재료가 좋지 못하면 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긴 하지만 간신히 구원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터가 좋고 재료가 좋아야 구원의 확신이 있고, 든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83세 때 자신의 작품 중에서 대작을 하나 선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 작품에”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건축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잘 지어도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집만이 완전한 건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어야 함으로 언제나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말라기 3:10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의 집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늘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6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라고 합니다. 교회가 성전과 관련된 비유를 바울은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이 그 만드는 모든 양식을 다 일러주셨습니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든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9에는 “무릇 내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합니다. 성막의 길이와 모양을 다 일러주십니다. 순금을 쓰라고 성막 기물의 재료를 다 일러주십니다. 법궤를 해달가죽으로 덮으라고 일러주십니다. 성막과 성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지어야 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람의 집으로 만들어 사람의 마음대로 이끌고 사람의 양식대로 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아가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혼란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막과 성전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21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바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나의 성전이 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요구하시고 기대하십니다. 헝거리 부다페스트에 성 스테파누스 성당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단 중앙에 스테파누스 왕의 상이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죽은 사람의 상이 있겠습니까? 이 교회는 사람 중심의 교회입니다. 스테파누스 왕은 자신의 아들이 죽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려고 사람을 많이 죽인 왕이지만 교황에게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다고 합니다. 자신이 폐위된 다음에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염려해서 그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성자가 되어 지금도 교회 한 가운데 그의 상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몰락할까봐 돈을 주고 성자 칭호를 샀다는데 이런 부질없는 짓이 교회를 몰락하게 만듭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면 몰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손이 개입되고 인본주의와 금본주의가 날뛰게 되면 교회는 몰락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의 것이 될 때에 몰락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유진 피터슨은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 된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교회는 신비와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관이기에 신비합니다. 사람의 사회적 기관이기에 혼란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이중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둘째, 교회는 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밭이며 집이며 성전입니다.
사무엘상서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깁니다. 이럴 때마다 교회는 실패합니다. 교회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고 인간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이 것이 바뀌면 안 됩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하나님 지향적일 때에 교회는 어긋나게 되고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항상 우리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이 되고, 사람 지향적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 110년 이후 시대 열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