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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아보자 (요한복음 8:1-11)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읽은 소설이 하나 생각이 납니다. 독일 작가 레마르크가 지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작품입니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한 소설입니다. 독일 소년 7명이 전장에 나가 극렬한 전투 속에서 6명이 전사를 합니다. 마지막 살아남은 한 사람의 주인공이 이런 절규를 합니다.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멎었습니다. 자기 혼자 쏘는 총소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총을 쏠 사람이 없으니까 총소리가 멎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고 그 가운데 부상병들이 신음을 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인공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그대들과 나는 똑같은 인간임을 이 시간에 깨닫는다!’ 총을 쏠 때는 서로의 인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알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적개심을 가지고 총을 쏘았는데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살아남은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었다는 전쟁의 참상을 풍자하는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전쟁, 사람임을 잃어버린 전쟁, 무가치한 가치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끌려온 여인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더러운 여인입니다. 도덕적으로 불결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끌려온, 부끄러운 여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이 여인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이 여인과 나는 무엇이 같은지를 영적으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성전에 끌고 온 것도 무례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집회현장에 여인을 끌고 와서 방해를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시비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군중들과 함께 손에 돌을 들고 와서 예수님께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선생이여, 이런 여자를 율법에서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씀하시렵니까?” 이것은 함정을 가진 질문입니다. 살려 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이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 법 중에 하나라도 걸리도록 질문을 한 것입니다. 끌려온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때 주님은 땅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 계속 묻습니다. 주님은 준엄한 한 마디를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땅에 또 글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특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에만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 무리들의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양심에 찔려 하나씩, 하나씩 돌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잠시 생각하면 매우 호기심이 갑니다.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라틴어가 공용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글씨가 무슨 글씨였을까? 히브리어인지 헬라어인지 어느 나라 말로 쓰신 글인지 흥미가 가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흥미가 갑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아니면 다른 글씨인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인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글씨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방법으로 대하셨는지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군중들은 아주 흥분된 군중입니다. 손에 돌을 들고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서, 자기들의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돌을 가지고 잡혀온 여인을 칠 기세입니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도 그 돌을 던질는지 모릅니다. 흥분한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감정 주도적으로 행동합니다. 그 때 주님이 땅에 글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땅에 또 다시 글을 쓰신 행동은 군중들을 다루는데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실 때 고함을 지르며 흥분하던 군중들은 무슨 글을 쓰시는지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아마도 주님이 글을 쓰는 그 순간에는 군중들이 조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또 땅에 엎드려 글을 쓰셨습니다.
군중들의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어른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양심에 찔려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는 조용한 시간에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심에 찔려 돌아가게 되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감정에 치우쳐 있는 군중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할 때 모두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과연 죄 없는 자인가?’ ‘나는 과연 이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군중화에서 개인화로 돌아갑니다. ‘너희들이 지금 군중심리에 들떠 있지 말고 네 자신들을 돌아보라,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자는 돌을 던져라.’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이라면
저는 이 대목에서 현실을 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오늘 현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음에 찔려서 돌을 다 버리고 돌아갈까?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돌을 버리고 돌아갈 사람보다는 돌을 던질 무리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돌을 던져야합니다. 돌을 버리면 나도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정당화를 주장합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 모두가 상대방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세입니다. 나는 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상대방이야 다치든지, 죽든지 돌을 던지는 세태가 오늘 우리의 세태입니다. 돌을 버리는 자보다 던질 분들이 더 많이 보이는 우리의 불행한 세태를 가슴아파하면서 나도 그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다 돌아간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에 우리 주님의 메시야적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네 죄의 아픔에 내가 동참을 한다.” 즉 그 순간 주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처참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내가 대신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그분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는 무죄한 사람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셔서 죄 있는 우리를 보고 윽박지르고, 구박하고, 우리에게 억압을 하시는 의인이 아니라 죄 없는 그 분이 죄 있는 사람처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속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 분이 끌어안고 죄인처럼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분의 메시야적 속죄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주님을 얼마나 발견하고, 그 주님을 얼마나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할 말이 없는 죄인
그리고 끌려온 여자를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레위기나 신명기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히면 남여를 다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는 끌려왔습니까?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무례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남자를 끌고 오지 않고 여자만 끌고 온 것도 불공평하지만, 성전마당에 이런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이 집회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무례한 일입니다.
그런데 끌려온 여인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찢겨진 옷, 매 맞고 조롱 맞은 처참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으로 무리들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끌려온 여인은 지금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한마디 변명도 없고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감추어지지도 않습니다.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 앞에 예배하는 우리 자신들이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얼마나 우리 자신을 가장하고, 가식합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면서도 찬송은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우리의 가식된 모습, 감추려고 하는 모습,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 앞에는 우리 전부를 드러내야 합니다. 끌려온 여인처럼 부끄러워도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앞에 나아온 자의 영적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두꺼운 이중성을 가지고 교회 출입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손에 온갖 돌이 잡혀 있으면서도 나는 깨끗한 손인 것처럼 가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미움의 돌, 불평의 돌, 원망의 돌, 여지없이 상대방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우리의 언동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인데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았지만 오늘 우리는 가책도 없이 여기 앉아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모릅니다. 끌려온 여인은 우리 모습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 부끄러운 여인처럼 우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주 앞에 어쩔 수 없는 죄인인데도 나는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 속에 내가 있습니다. 끌려온 여자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예수께로 끌려온 여인
또 한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여인은 끌려 올 때는 절망으로 끌려 왔습니다. ‘아, 나는 이제 이 길로 끝나는구나! 나는 죽는구나!’ 이 여인에게는 내가 끌려가는 거기에 어떤 기대도 소망도 영광도 포기했습니다. 나는 이 길로 돌에 맞아 죽는다는 극한 상황에 모든 삶의 의미를 포기하고 끌려온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님 앞에 끌려와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끌려온 것은 불행합니다. 여러분도 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소망 없이 절망을 안고, 죽음의 공포를 안고 끌려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이 주님 앞이었습니다. 주 앞에 끌려 온 것은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영광입니다. 끌려와도 예수님 앞에 온다면 죽을 죄인도 살아납니다. 처참한 여인도 회복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주이며 우리의 기준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는 인본주의 철학자입니다. 이교 철학자입니다. 그에게는 메시야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너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교훈은 객관화가 없습니다. 네가 너 자신을 돌아보고, 네가 너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는 말씀이 한 대목도 없습니다. 우리는 객관화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즉 거울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거울 없이 나를 보는 것과 거울 앞에서 나를 보는 것은 다릅니다. 거울이 무엇입니까? 거울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기준, 인생의 정확한 거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지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나게 했습니다. 그 분의 손안에 우리의 생애가 다 잡혀 있습니다. 그 분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 끌려 나가서라도 그 분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상대방을 끌고 나오는 무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끌고 나옴은 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만 나왔다면 무리가 아닙니다. 최근에 전도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간증을 방송을 통해서 들어보면 전도를 무리하게 합니다. 그런데 무리하게 하는 것 중에 우리가 평소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분들은 그 분들의 전도를 위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합니다. 여러분, 전도를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과소비가 아닙니다. 무리하게 전도비로 투자하십시오. 그러나 주님께 끌고 나왔다면 그 영혼의 값에 대해서는 무리가 아닙니다. 끌고 나와도 주 앞에 끌고 나오는 것은 어떤 과정이라도 다 정당화됩니다. 예수 앞에 끌고 나오는 영혼은 아무리 무리한 방법을 사용했더라도 정당화됩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전도하려고 예수님께 끌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인을 죽이고 예수님도 책잡아서 끝내려고 하는 악날한 방법으로 여인을 끌고 나왔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앞에 나온 여인은 회복이 되고, 고침이 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소망입니다. 거기에는 무리한 방법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은 조금 무리하게 살아야 합니다. 곱게 살아서는 주님 앞으로 못갑니다. 곱게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용하게 살아서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시끄럽게 믿고, 소란을 피우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도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끌려온 여인이라도 복된 여인으로 고침을 받는 모습이 바로 여인에게 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끌고 온 자들에게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런 회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복의 은총
여러분은 현실적인 고난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이 양보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들, 물질에 관계된 것, 건강에 관계된 것, 다른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얽힌 문제라 해서 돈으로 접근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돈으로 인하여 고통이 왔다면 그 고통을 안고 주 앞에 가십시오. 먼저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돈 문제이니 돈 앞에 가고 주님은 뒤에 두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끌고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호소하고 부르짖고 주님의 긍휼의 손길이 나를 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 신앙인은 길이 열리고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문제만 생기면 세상방법으로 방황하고, 집착하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 앞에 눈물 한 방울 쏟을 줄 모르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앞에 나가서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 길에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그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지고 해결하려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그 문제를 내 놓으십시오. 간음한 여인, 끌려온 여인처럼 문제를 다 주님 앞에 보이십시오.
‘고친다’는 말과 ‘섬긴다’는 헬라말은 같이 혼용됩니다. 제가 “섬기러 오신 예수”라는 설교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섬긴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가 의인이지만 죄인이 되신 것도 우리를 섬기려고, 주님은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에게 사죄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종합병원에 가면 중환자실이 있고, 응급실이 있고, 일반 병실이 있습니다. 당직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수고하는 것은 놀랍습니다. 응급실, 중환자실의 당직이 되면 밤잠을 자지 않고 환자들을 돌봅니다. 수시로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면서 그들을 돌봅니다. 식사 때가 되면 식사를 제공하고, 간병인들이 일으키고 걷게 하고 수고합니다. 여러분, 치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 고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섬겨주는 일이 있기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환자를 현관에 버려 놓고 가면 그길로 죽습니다. 그 환자를 돌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봉사가 있기 때문에 그 환자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긴다는 것과 고친다는 것이 헬라 말에서 혼용된다는 것은 아주 영적인 용어입니다.
여러분들이 타인을 위해서 수고하고 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치유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상대방이 회복됩니다. 내가 섬겨야 상대방이 회복됩니다. 구경만하면 상대방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베풀 때 그 섬김이 와 닿는 상대방들에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메시야 사역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섬기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섬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있기에 우리의 구원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대하는 것도 주님의 섬김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너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왔노라 하고 죄인에게 다가가신 주님, 그 주님의 섬김이 여인을 구원케 한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든 쓸데없는 돌을 던지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질없는 오만, 나는 돌을 던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오만해 하는 우리들, 아니 수없이 많은 돌을 던지면서 살아온 우리의 신앙생활, 이제는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모습을 다 내어 놓고 보이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나올 때는 영적으로 우리의 모든 이중, 삼중의 옷을 다 벗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 앞에 서기 바랍니다. 그런 모습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주님의 긍휼의 손길이 임할 줄 믿습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읽은 소설이 하나 생각이 납니다. 독일 작가 레마르크가 지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작품입니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한 소설입니다. 독일 소년 7명이 전장에 나가 극렬한 전투 속에서 6명이 전사를 합니다. 마지막 살아남은 한 사람의 주인공이 이런 절규를 합니다.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멎었습니다. 자기 혼자 쏘는 총소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총을 쏠 사람이 없으니까 총소리가 멎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고 그 가운데 부상병들이 신음을 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인공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그대들과 나는 똑같은 인간임을 이 시간에 깨닫는다!’ 총을 쏠 때는 서로의 인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알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적개심을 가지고 총을 쏘았는데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살아남은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었다는 전쟁의 참상을 풍자하는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전쟁, 사람임을 잃어버린 전쟁, 무가치한 가치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끌려온 여인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더러운 여인입니다. 도덕적으로 불결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끌려온, 부끄러운 여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이 여인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이 여인과 나는 무엇이 같은지를 영적으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성전에 끌고 온 것도 무례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집회현장에 여인을 끌고 와서 방해를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시비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군중들과 함께 손에 돌을 들고 와서 예수님께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선생이여, 이런 여자를 율법에서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씀하시렵니까?” 이것은 함정을 가진 질문입니다. 살려 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이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 법 중에 하나라도 걸리도록 질문을 한 것입니다. 끌려온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때 주님은 땅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 계속 묻습니다. 주님은 준엄한 한 마디를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땅에 또 글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특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도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에만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 무리들의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양심에 찔려 하나씩, 하나씩 돌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잠시 생각하면 매우 호기심이 갑니다.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라틴어가 공용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글씨가 무슨 글씨였을까? 히브리어인지 헬라어인지 어느 나라 말로 쓰신 글인지 흥미가 가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흥미가 갑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아니면 다른 글씨인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인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글씨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방법으로 대하셨는지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군중들은 아주 흥분된 군중입니다. 손에 돌을 들고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서, 자기들의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돌을 가지고 잡혀온 여인을 칠 기세입니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도 그 돌을 던질는지 모릅니다. 흥분한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감정 주도적으로 행동합니다. 그 때 주님이 땅에 글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땅에 또 다시 글을 쓰신 행동은 군중들을 다루는데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실 때 고함을 지르며 흥분하던 군중들은 무슨 글을 쓰시는지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아마도 주님이 글을 쓰는 그 순간에는 군중들이 조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또 땅에 엎드려 글을 쓰셨습니다.
군중들의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어른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양심에 찔려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는 조용한 시간에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심에 찔려 돌아가게 되었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감정에 치우쳐 있는 군중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할 때 모두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과연 죄 없는 자인가?’ ‘나는 과연 이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군중화에서 개인화로 돌아갑니다. ‘너희들이 지금 군중심리에 들떠 있지 말고 네 자신들을 돌아보라,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자는 돌을 던져라.’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이라면
저는 이 대목에서 현실을 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오늘 현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음에 찔려서 돌을 다 버리고 돌아갈까?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돌을 버리고 돌아갈 사람보다는 돌을 던질 무리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돌을 던져야합니다. 돌을 버리면 나도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정당화를 주장합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 모두가 상대방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세입니다. 나는 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상대방이야 다치든지, 죽든지 돌을 던지는 세태가 오늘 우리의 세태입니다. 돌을 버리는 자보다 던질 분들이 더 많이 보이는 우리의 불행한 세태를 가슴아파하면서 나도 그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다 돌아간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에 우리 주님의 메시야적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네 죄의 아픔에 내가 동참을 한다.” 즉 그 순간 주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처참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내가 대신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그분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는 무죄한 사람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셔서 죄 있는 우리를 보고 윽박지르고, 구박하고, 우리에게 억압을 하시는 의인이 아니라 죄 없는 그 분이 죄 있는 사람처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속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 분이 끌어안고 죄인처럼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분의 메시야적 속죄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주님을 얼마나 발견하고, 그 주님을 얼마나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할 말이 없는 죄인
그리고 끌려온 여자를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레위기나 신명기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히면 남여를 다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는 끌려왔습니까?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무례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남자를 끌고 오지 않고 여자만 끌고 온 것도 불공평하지만, 성전마당에 이런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이 집회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무례한 일입니다.
그런데 끌려온 여인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찢겨진 옷, 매 맞고 조롱 맞은 처참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으로 무리들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끌려온 여인은 지금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한마디 변명도 없고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감추어지지도 않습니다.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 앞에 예배하는 우리 자신들이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얼마나 우리 자신을 가장하고, 가식합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면서도 찬송은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우리의 가식된 모습, 감추려고 하는 모습,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 앞에는 우리 전부를 드러내야 합니다. 끌려온 여인처럼 부끄러워도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앞에 나아온 자의 영적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두꺼운 이중성을 가지고 교회 출입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손에 온갖 돌이 잡혀 있으면서도 나는 깨끗한 손인 것처럼 가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미움의 돌, 불평의 돌, 원망의 돌, 여지없이 상대방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우리의 언동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인데 그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았지만 오늘 우리는 가책도 없이 여기 앉아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모릅니다. 끌려온 여인은 우리 모습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 부끄러운 여인처럼 우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주 앞에 어쩔 수 없는 죄인인데도 나는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 속에 내가 있습니다. 끌려온 여자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예수께로 끌려온 여인
또 한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여인은 끌려 올 때는 절망으로 끌려 왔습니다. ‘아, 나는 이제 이 길로 끝나는구나! 나는 죽는구나!’ 이 여인에게는 내가 끌려가는 거기에 어떤 기대도 소망도 영광도 포기했습니다. 나는 이 길로 돌에 맞아 죽는다는 극한 상황에 모든 삶의 의미를 포기하고 끌려온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님 앞에 끌려와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끌려온 것은 불행합니다. 여러분도 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소망 없이 절망을 안고, 죽음의 공포를 안고 끌려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이 주님 앞이었습니다. 주 앞에 끌려 온 것은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영광입니다. 끌려와도 예수님 앞에 온다면 죽을 죄인도 살아납니다. 처참한 여인도 회복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주이며 우리의 기준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는 인본주의 철학자입니다. 이교 철학자입니다. 그에게는 메시야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너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교훈은 객관화가 없습니다. 네가 너 자신을 돌아보고, 네가 너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는 말씀이 한 대목도 없습니다. 우리는 객관화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즉 거울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거울 없이 나를 보는 것과 거울 앞에서 나를 보는 것은 다릅니다. 거울이 무엇입니까? 거울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기준, 인생의 정확한 거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지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나게 했습니다. 그 분의 손안에 우리의 생애가 다 잡혀 있습니다. 그 분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 끌려 나가서라도 그 분 앞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상대방을 끌고 나오는 무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끌고 나옴은 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만 나왔다면 무리가 아닙니다. 최근에 전도왕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간증을 방송을 통해서 들어보면 전도를 무리하게 합니다. 그런데 무리하게 하는 것 중에 우리가 평소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분들은 그 분들의 전도를 위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합니다. 여러분, 전도를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과소비가 아닙니다. 무리하게 전도비로 투자하십시오. 그러나 주님께 끌고 나왔다면 그 영혼의 값에 대해서는 무리가 아닙니다. 끌고 나와도 주 앞에 끌고 나오는 것은 어떤 과정이라도 다 정당화됩니다. 예수 앞에 끌고 나오는 영혼은 아무리 무리한 방법을 사용했더라도 정당화됩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전도하려고 예수님께 끌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인을 죽이고 예수님도 책잡아서 끝내려고 하는 악날한 방법으로 여인을 끌고 나왔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앞에 나온 여인은 회복이 되고, 고침이 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소망입니다. 거기에는 무리한 방법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은 조금 무리하게 살아야 합니다. 곱게 살아서는 주님 앞으로 못갑니다. 곱게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용하게 살아서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시끄럽게 믿고, 소란을 피우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도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끌려온 여인이라도 복된 여인으로 고침을 받는 모습이 바로 여인에게 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끌고 온 자들에게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런 회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복의 은총
여러분은 현실적인 고난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이 양보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들, 물질에 관계된 것, 건강에 관계된 것, 다른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얽힌 문제라 해서 돈으로 접근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돈으로 인하여 고통이 왔다면 그 고통을 안고 주 앞에 가십시오. 먼저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돈 문제이니 돈 앞에 가고 주님은 뒤에 두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끌고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호소하고 부르짖고 주님의 긍휼의 손길이 나를 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 신앙인은 길이 열리고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문제만 생기면 세상방법으로 방황하고, 집착하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 앞에 눈물 한 방울 쏟을 줄 모르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앞에 나가서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 길에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그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지고 해결하려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그 문제를 내 놓으십시오. 간음한 여인, 끌려온 여인처럼 문제를 다 주님 앞에 보이십시오.
‘고친다’는 말과 ‘섬긴다’는 헬라말은 같이 혼용됩니다. 제가 “섬기러 오신 예수”라는 설교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섬긴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가 의인이지만 죄인이 되신 것도 우리를 섬기려고, 주님은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에게 사죄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종합병원에 가면 중환자실이 있고, 응급실이 있고, 일반 병실이 있습니다. 당직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수고하는 것은 놀랍습니다. 응급실, 중환자실의 당직이 되면 밤잠을 자지 않고 환자들을 돌봅니다. 수시로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면서 그들을 돌봅니다. 식사 때가 되면 식사를 제공하고, 간병인들이 일으키고 걷게 하고 수고합니다. 여러분, 치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 고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섬겨주는 일이 있기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환자를 현관에 버려 놓고 가면 그길로 죽습니다. 그 환자를 돌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봉사가 있기 때문에 그 환자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긴다는 것과 고친다는 것이 헬라 말에서 혼용된다는 것은 아주 영적인 용어입니다.
여러분들이 타인을 위해서 수고하고 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치유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상대방이 회복됩니다. 내가 섬겨야 상대방이 회복됩니다. 구경만하면 상대방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베풀 때 그 섬김이 와 닿는 상대방들에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메시야 사역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섬기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섬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있기에 우리의 구원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대하는 것도 주님의 섬김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너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왔노라 하고 죄인에게 다가가신 주님, 그 주님의 섬김이 여인을 구원케 한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든 쓸데없는 돌을 던지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질없는 오만, 나는 돌을 던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오만해 하는 우리들, 아니 수없이 많은 돌을 던지면서 살아온 우리의 신앙생활, 이제는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모습을 다 내어 놓고 보이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나올 때는 영적으로 우리의 모든 이중, 삼중의 옷을 다 벗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 앞에 서기 바랍니다. 그런 모습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주님의 긍휼의 손길이 임할 줄 믿습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