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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의 비극 (누가복음 16:19-31)
어느 교회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였는데, 교회에서 헌금도 제일 많이 하였고, 교인들에게 대접도 참 잘했습니다. 특히 주일 학교 교사들이나 찬양대원들 대접하기를 즐겨하여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이 꿈을 꾸었습니다.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에 온 사람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 별이 많이 붙은 면류관을 주시고, 헌금을 많이 한 신자에게는 보석으로 지은 집을 주셨습니다. 자기 교회 신자들도 보였는데 그들은 아이들까지 다 풍성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님도 자기에게는 어떤 상이 주어질지 내심 기대를 하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집사님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서운해서 울다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 집사님은 자신의 꿈을 곰곰히 생각하다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믿기는 해도 적게 믿었고, 헌금은 많이 했으나 내 형편으로는 적었으며, 더구나 교만한 마음으로 바치지 않았는가? 이제부터는 좀더 잘 믿고, 좀더 주의 나라에 많이 바쳐야겠다." 이렇게 다짐한 그 집사님은 그 후로 겸손하게, 그리고 최선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그 하는 일에 대해 언젠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공부도 일도 사람과의 만남도 평가를 통해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기회가 박탈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평가하실까요?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우리와 다를 뿐 하나님도 우리를 평가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우리의 신앙생활도 언젠가 평가를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같은 시간에 세상을 떠나 심판을 받았는데, 부자는 음부에 가서 고생을 하게 되었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서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서로 다른 곳에 가게 된 것은 세상에서 행한 대로 분깃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현세에서 추론될 수 있습니다. 알프스 산의 어느 시점에서 돌을 이리 굴리면 흑해로 들어가고, 저리로 굴리면 북해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 세상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복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이야기를 교훈삼아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인생을 이 세상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어떻게 잘 살 것이냐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이 세상을 떠난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하지 않아서 결국 음부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생에서 부자는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음부의 고통에 빠진 반면, 거지 나사로는 쓰레기나 뒤지는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세상을 떠나서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이생 이후의 삶에 대해 무지하여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은 음부에서 고통당할지라도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들의 형제들만큼은 자신이 있는 음부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를 깨닫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눅 16:29). 하지만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자기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 16:30).
이는 모세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어서 깨닫지는 못해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욱 단호하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전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성도들 가운데서도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뭔가 놀라운 사건을 보고 나서야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녀도 어떤 체험이 없어서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말하는 도마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믿음은 표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성경말씀과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수 천 번에 걸쳐 베들레헴에 태어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그 분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처럼, 영의 양식인 말씀을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을 성장시키고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할 때, 그 말씀은 나를 구원하고 큰 능력과 축복이 될 것입니다.
2. 존재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농부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같은 시간에 부유한 남자도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은 반면, 가난한 농부는 그저 평범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베드로에게 왜 자기를 위해서는 부자를 환영했던 것과 같이 노래를 불러 주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도 부자만 환영받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나 부자나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당신처럼 가난한 사람은 매일 오지만, 아까 온 사람같은 부자는 백년에 겨우 한 사람도 올까 말까 한답니다. 그래서 너무 반가웠던 겁니다."
아쉽게도 본문에 나온 부자는 '백년에 한 번 나오는 그런 부자'가 아니어서 천국이 아닌 음부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무슨 이유로 천국이 아닌 음부에 내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그는 큰 기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주였을 텐데, 종업원을 학대하거나 임금을 착취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권력을 이용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부정으로 재산을 치부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악덕 기업주도 아닌, 성공적인 기업가일 뿐인 그 부자가 왜 음부로 내려가게 되었는지 이상할 정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그래서 그 인생을 즐기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만족한(well) 삶(being)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누구나 바라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친 환경적인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값비싼 가전 제품을 갖춰 놓고, 고가(高價)의 무공해 음식을 먹는 '웰빙'(well-being) 스타일의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사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느냐를 보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바탕으로 누리는 웰빙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동산 투자로 수백 억을 번 40대 간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사람이 죽으면 돈은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돈을 위해 밤잠을 자지 못하고 그토록 의리를 지켰다가 병까지 들었는데, 돈은 의리를 지켜주지 않고, 자기의 죽음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고, 죽으면 누구 품으로 갈까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는 마지막으로 어떤 유명한 목사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낫게 해주면 백억 원을 헌금하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낫게 해 주신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돈이 최고인 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군요!"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부자는 재물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하나님 앞에서 부요하지 못한 자였기 때문에 음부에 떨어지는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먼저 추구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체호프]라는 사람은 '부자의 커다란 행복은 자선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그러한 행복을 맛보기는커녕,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아 결국은 불행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부자는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즐기는 호화로운 삶을 산 반면, 그 집 대문에 누워 있는 거지 나사로는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눅 16:19-21). 여기서 거지 나사로가 그 집 대문에 누워있다는 말은 부자와 거지가 매우 가까운 곳에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매일 대문을 출입하면서 나사로가 그토록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불행한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그 무서운 자리에 떨어진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보이셨는데, 그 중에서 탐욕에 사로 잡혀서 필요 이상의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 자신의 것을 전혀 이웃과 나누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물질주의에 사로 잡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의미의 '부자'로 보고, 이러한 '부자'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3-24).
반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재물을 사용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나눔의 생애였습니다. 나눔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 내면의 충만을 누리는 자만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즉 나눔은 물질의 과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주고 또 주어도 줄 것이 있는 것처럼, 나눔은 우리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집의 대문에 살고 있는, 즉 우리와 가까이 있는 우리 주변의 '나사로'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앗시스의 성자 프란시스가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뒷걸음치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앞을 보았습니다. 그 앞에는 문둥병자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본 프란시스는 당장 말에서 내려 그 문둥병자에게 키스를 하고 자기 옷을 벗어 입혀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프란시스에게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우리 주변의 '나사로'를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지난 추석 때 우리 남신도 구역에서 장애자 보호소에 가서 그들을 섬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바로 우리 주변의 나사로를 돕는 일이며,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소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한 부자가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재산을 구제 단체에 기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게 아니지. 죽은 후 베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살아있을 때 해야지"라고 외친 후 유서를 찢고 그 날로 베풀면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나눔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극적인 부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더 부유한 자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며, 아낌없이 내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