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목사 (물가에심기운교회)

히말라야 산맥의 눈이 녹으면 물로 변하여 내려오는 강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한 미혼 자매가 나타났습니다. 인근 마을에 세를 얻은 다음 매일 같이 강으로 나와서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자매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자매가 할머니가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강물에 시신 한 구가 떠내려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시신을 인양했습니다. 그 시신은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할머니는 그 젊은 청년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슬피 울 수밖에 없는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히말라야산맥에 올라갔다가 조난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히말라야산맥의 눈이 녹으면 혹시나 시신이 떠내려오지 않겠느냐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곳을 찾아왔다가 그러한 결과를 맞이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위력에 관한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랑의 위력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사람이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믿고,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웬만한 잘못은 모두 용서를 해주시고 더군다나 직접 육신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길은 의외로 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우리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실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이웃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정신과 전문의인 사이토 시케타가 쓴 「사랑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몇 가지로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받는 사람들의 특징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호의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데 사용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은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도 버림을 받고 주변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때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나 타인에게는 관대합니다.
대부분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는 아무리 그 사람이 천만금을 준다고 할지라도 같이 있고 싶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목표만 바라보고 앞만 보고 가지 않고 주변의 어려움들을 둘러 볼 줄 압니다.
오로지 자신의 근심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앞만 보고 나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친절은 베푸나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절을 베푼 다음 자신이 베푼 친절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을 계산하고 친절을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향을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친절을 베푼 다음 친절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요구하는데 결국 그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곤함만 안겨줄 뿐입니다.

대화 시 충고를 하거나 지적하지 않고 편안하게 잘 들어주는 것으로 끝을 냅니다.
어느 날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친구가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다가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한 10분 동안 그 사람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신에게 1시간을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단정적인 말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만하면 앞질러 나가서 지나친 예측하는 사람이나 피해 망상을 가진 유형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상대의 단점을 일일이 자기 식으로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 지나친 평가로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주는 경우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 분위기를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 사람만 나타나면 분위기가 긴장된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포기를 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압니다.
도무지 포기를 할 줄 모르고, 너무도 집요한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질리게 만듭니다.
올라갈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말이 적용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라는 식으로 해석을 달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현실 평가를 정확하게 내려야 합니다.

한 당나귀가 집안에서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사랑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하루는 당나귀도 문 열린 틈을 이용해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주인 무릎에 올라가서 주인의 무릎 뼈 다 으스러뜨리고 주인에게 몽둥이로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여건과 상대의 취향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이 될 때 집요함도 나타내는 것이지 처음부터 맞지도 않는데 막무가내로 집요하게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동정만 받으려고 약한 척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아프니까 다른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것저것 일을 시키고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나 약하다는 것은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요소이지만 그 자체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입니다.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사람은 사랑대신 비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엄마를 보면 딸을 안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부모들이 부정적이면 우리 자녀들도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이 먼저 철저하게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성하는 말만하지 않고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만 하면 반사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면서도 행동으로 전혀 옮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성하는 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들면 거의 반사적으로 "잘못했어요."라며 비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자신도 역시 따라서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러한 잘못을 할 수 있는데도 이해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점만을 지적하는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70년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상대방에서는 한 손가락이 지적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세 손가락이 지적을 하고 있다.''라는 글이 실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상대방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다니는 사람은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특히 가족 중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가족들이 그 사람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면 한 개인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왕따''가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는 기꺼이 비굴해질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비굴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정인에게만 비굴한 태도를 보이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이 말은 지, 정, 의를 다 동원해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래 참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라고 용서해주기를 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그렇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을 왕처럼 중요한 존재로 예우해야 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간만 나면 계속해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셋째, 사랑을 하게 되고 받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화가 많아집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기도를 많이 합니다. 도무지 기도를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화가 많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만남이 잦아집니다.
서로 사랑하면 금방 만나고 헤어졌어도 또 만나고 싶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예배가 그렇게 그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시간이 자주 온다거나 아니면 시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서로 자랑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물어보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자랑을 하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전도를 실천하게 됩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통제가 가능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말도 막하게 되고 행동도 절제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게 됩니다.
거라사인의 귀신들렸던 사람은 전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대화하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 8:26-39)

그 무능했던 사도들, 어떤 통제도 안되었던 그 사도들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완전히 확증하자 그때부터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헌신 곧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의 기로에서 자신이 자녀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든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든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녀대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합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전혀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딸이 블랙디프테리아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엄격하게 격리를 시킴으로 빅토리아 여왕은 어쩔 수없이 딸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날 열이 펄펄 끓던 둘째딸이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저를 사랑하시지 않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저를 한번도 껴안아 주시지를 않잖아요?"
두 대화를 빅토리아 여왕이 들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제지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뿌리치고 딸을 안고 한시간쯤 울다가 블랙디프테리아에 전염돼서 딸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돌이 날아오는 가운데도 얼굴이 천사처럼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스데반은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지 못하고 일어서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스데반은 사랑에 몸부림치며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 메닝거의 말입니다.
"사랑은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치료하는 힘을 발산하게 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결국 사랑은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이란 사랑충만인 것입니다.

사람 대 사람의 사랑은 너무 이기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깨어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의 힘이 아닌 나의 의지로 행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이 완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도록 해야 완전해질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 동안 우리 자신들을 변화시켜보려고 많은 노력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분만 변화되는데 그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결국 사랑을 하게되거나 받게 되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을 때 우리들은 완벽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가 주님을 목숨 바쳐 사랑할 때 우리들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전도도 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기도도 할 수 있고, 희생도 할 수 있고 헌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의지로는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철저하게 사랑해서 이웃도 사랑하고, 자신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