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이 궁중의 광대 둘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세상에 나가 찾아 헤매던 이 두 익살꾼이 마침내 답이 들은 상자 하나씩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광대가 먼저 왕에게 나아가 절을 한 후 상자를 내놓았는데 열어보니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혀라는 뜻입니다. 다른 광대도 상자를 내어놓았는데, 풀어 보니 거기도 똑같이 큼직한 글자로 혀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복 중의 하나입니다. 말, 즉 언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습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이 언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언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 하나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글을 씁니다만 글이 무엇입니까? 문자란 언어를 기호로 형상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문자가 있어서 사람은 모든 지식과 사상을 기록했고 그것을 연구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언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말이 없었다면 글도 있을 수가 없었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언어가 없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 신앙생활만 해도 성경도 없습니다. 설교도 없고 기도도 없고 찬송도 없습니다. 아예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언어가 없다면 사람은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언어야말로 하나님 인생에게 주신 최대의 복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언어도 함께 타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답고 귀한 것일수록 부패하면 더 더러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가 그렇습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복이 죄로 타락한 다음,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교회에서 상처를 받습니까? 왜 문제가 생겨납니다. 말 때문입니다. 말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 거듭남의 역사는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듭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우리의 언어 생활입니다. 이제 우리는 언어 생활에서 거듭남의 역사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책임도 더 무거움을 지적합니다.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누구입니까?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말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책임이 더 크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록 책임도 더 큽니다. 그러니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 말에 내가 도장을 찍으십시오. 보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온전하냐가 얼마나 말에 온전하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6 장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는 환상이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뵈웠을 때 이사야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고 두려워 떱니다. 그 때 천사가 화저로 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이사야에게 날아와 이사야의 입에 되며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사야도 자신의 죄인 됨을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고, 천사도 깨끗케 됨의 표시로 숯을 입에 되었습니다. 죄의 대표도 입술이요 깨끗케 됨의 대표도 입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장 많이 짓는 죄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말입니다. 남자는 하루 평균 20,000 마디 여자는 평균 30,000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말에 실수하게 되고 말로 죄를 짓게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도적질하는 것 아니고 강도질하는 것 아닙니다. 말로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말에 진실하고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진정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은 적은 것이지만 그 위력은 무엇보다 크고 무섭습니다. 본문도 말은 말의 재갈과 같고 배의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의 재갈을 아십니까? 적은 것이지만 그것 잡으면 말이 꼼짝 못합니다. 말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배의 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는 적은 것이지만 그 키를 통해 큰배를 움직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혹은 한 사람의 생애가 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언어를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너무 자주 입에 올립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심성 자체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거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 시조에서부터 오늘날의 시와 노래에까지 태양을 노래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달을 노래했습니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취니" 이 정도로라도 해를 노래한 적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달만 노래했습니다. 아이들 동요 중에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만히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분명히 대낮의 하늘입니다. 거기 붉게 타는 태양이 있는데 저자는 애써 태양을 외면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달을 찾고 있습니다. 그만큼 달을 사랑했습니다. 달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달은 물론 낭만적이요,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달은 태양만큼 밝지 못합니다.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질 못합니다. 어둡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런 민족성을 가지다 보니 하는 말도 보면 부정적인 말이 너무 많습니다. 쉽게 자녀들에게 하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안 일어나느냐, 아침 안 먹느냐, 학교 안 가느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지만 전부 부정입니다. 긍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을 부정으로 합니다. 또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자주 합니까? 슬퍼 죽겠다는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기뻐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언론은 또 얼마나 더 부정적입니까? 저는 제 기억에 제가 신문을 읽고 난 후 신문이 지금이 난세가 아니라고, 위기가 아니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큰 일 났다고 말해왔습니다.

지난 날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심성도 언어도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창조적인 말,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정말 망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말의 악한 영향력을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곳이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해서 가을과 봄에 각각 한 달 가량 우기가 있습니다. 이 때는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온 들녘에 풀과 엉겅퀴 그리고 가시나무 같은 것이 자랍니다. 그러나 비가 거치면 곧 메마르기 시작하는데 원래가 건조한 곳이라 바삭 말라 버립니다. 이 때 성냥 한 개피만 갖다 부치면 온 들녘이 불바다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도 산불을 경험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건조기에는 담배불 하나가 온 산을 태워 버립니다.

말 한마디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너는 쓸모 없는 놈이다" 하는 한 마디가 그 아이의 한 평생을 불사를 수 있습니다. 치유 목회로 유명한 정태기 목사님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 우연히 여학생들이 자기를 두고 못 생겼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정말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만 그의 가슴에 딱 못으로 박혀버립니다. 그 후 약 20년을 자신은 못 생겼다는 무서운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그는 그 20년의 세월이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 우리 가운데도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형제의 가슴에 한평생 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언어생활인데 이 언어 생활이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말씀합니다. 모든 짐승이 다 길들여지는데 혀는 길들여지지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 길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커스 같은 것을 보면 호랑이 사자 코끼리 곰 뭐 동물들이 다 길들려 집니다. 온갖 동물이 다 길들여집니다.

그런데 혀는 길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잘 나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잘못된 말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던 입술로 운전대를 잡으면 다른 사람을 향해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온천에서는 찬물이 안 나옵니다. 찬물 나오는 샘에서는 뜨거운 물 나오지 않습니다. 생수 나오는 곳에서 물통 갖다 놓고 십 년을 기다려보세요. 더운 물 올라오지 않습니다. 나무도 무화과나무는 평생 무화과 열매만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만 맺습니다. 절대로 다른 열매 맺지 않습니다. 그런데 혀만은 제멋대로 입니다. 이 말 했다, 저 말 합니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이 못되어 그는 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한 혀로 두 말을 합니다. 베드로만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언어생활에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주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경건한 언어 생활의 첫 번째 비결은 항상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어울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계속 귀에 들어오는 말이 내 입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듣고 접하는 말을 나도 하게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거창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기사가 흘러간 유행가를 크게 틀었습니다. 소위 뽕짝을 튼 것입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노래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더욱이 지금은 집회를 인도하러 가고 있습니다. 좀 경건하게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하는데 큰 소리로 유행가를 틀어놓으니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분은 나빴지만 꾹 참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혼자 숙소에 들어와 잠깐 짐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 노래를 흥얼거리기를 잘 합니다. 주로 찬송가나 복음송을 흥얼거립니다. 그 때도 옷을 정리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에 제 자신이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몇 십 분 후면 집회를 인도할 사람이 흥얼거리는 노래는 놀랍게도 버스에서 들었던 뽕짝이었습니다.

듣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듣는 대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언어를 늘 접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송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경건한 말을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있으니 입만 열면 그런 언어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정확하고 유익한 말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성경적으로 거짓말은 큰 죄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거짓말 하다가 죽었습니다. 정확한 말, 진실한 말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아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남의 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오전 예배를 마치고 집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여 전도사님이 여 집사님 한 분이 교회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놀라서 교회에 달려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교인들에게 물었더니 아무도 모릅니다. 다들 놀라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사무원이 말하기를 교회계단에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버스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했는데 나중에 알고 버스에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집에서 교회 가려고 나오다가 넘어져 입원을 했습니다. 말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내용이 영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제가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넘어져 다친 이야기라 다행이지 만약 다른 사람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변질되었겠는가 말입니다.

말이란 돌아다니다 보면 변질되고 부풀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남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좋지 못한 말은 듣고 끝내버려야 합니다. 말이 돌아다니다가 내게 와서 끝나 버리는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말이라도 유익이 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한 말이라고 다 하는 것 아닙니다. 이 말이 과연 함으로 유익이 있겠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 있습니다. 목사님 누구 누가가 목사님 더러 이렇다고 말했어요. 누가 나를 비난했다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비난한 사람 보다 고자질하는 사람이 더 싫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모르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제가 성자가 아닙니다. 알고 나면 극복하는데 힘이 듭니다. 그런 말을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숙한 언어생활은 정확하지 않는 말과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좋은 말, 복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찬양의 말, 남을 향해서는 축복과 칭찬의 말,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말, 이 얼마나 복된 말들입니까? 이런 말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감사의 말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항상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남을 향해 칭찬과 축복의 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인색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 축복하는 것, 이보다 복된 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보면 예수님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할 때 어디든지 가거든 그 집에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집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빈 복이 거기 임할 것이요,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복 받기 위해서도 남에게 복을 많이 빌어야 합니다. 그것도 복 받지 못할만한 사람들에 복을 만이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이 다 내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래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남에게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보다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복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우리의 입술로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입술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 하나님께는 감사하고, 이웃에게는 칭찬하며 복을 빌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이런 말들은, 아무리 많이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이런 좋은 말들이 가정을 복되고 만들고 교회를 은혜롭게 만들고, 사회를 윤택하게 만듭니다.

다시 한번 명심하십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모습은 경건한 언어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언어생활이 거듭나 우리의 언어가 성숙해야겠습니다. 늘 경건생활에 힘씀으로 경건한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정확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혀를 길들여 무의식 중에서라도 복된 말, 유익한 말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주신 이 고귀한 입술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