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 합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자!" 성도는 능력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물론 그 비결은 기도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자본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마 7:7)" 보증수표 비슷한 말씀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기도야말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항상 자본이 되곤합니다. 기도는 마치 전기에 전원과도 같습니다. 전원이 있어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전기가 오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전원 같은 기도를 활용하지 못하므로 기도가 쓸모 없도록 무용지물이 되게 살고 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또 기도는 성도의 방법도 됩니다.

"항상 기도하라(눅 18:1)"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이렇게 말씀하셔서 기도가 일상생활에서 땔래야 땔 수 없는 방법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아침을 여는 열쇠, 저녁을 닫는 자물통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기도는 성도의 능력도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능력 있는 삶을 살고 또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하는 성도에게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기도는 마치 파이프와도 같습니다. 수원지에 물이 넘쳐도 파이프가 없으면 가정에 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파이프에 따라 물 양이 달라집니다. 파이프가 크면 큰물을 공급받을 수 있고 작으면 작은 물을 공급받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내리는 손에다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함께 손을 들어봅니다. 손을 들고 마치 무엇인가를 받아내려고 하는 모습, 이것이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손이 받아 내리는 기도의 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성도의 능력 있는 삶을 위해서 기도에 관하여 세 가지 질문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기도할까?

물론 기도는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특별히 언제 기도 할까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입니다. 본문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고난입니다. 고난 당하지 않는 인생은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고난이 절망의 사슬이 될 수도 있지만 고난이 성공이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작가 토플래디가 교훈 합니다. 그가 쓴 503장 2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큰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고난을 당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믿음도, 봉사도, 하나님의 영광도 빨리 드러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헬랜켈러는 두 살 때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되고, 벙어리가 됐습니다. 삼중 인생고를 앓은 불행한 사람인데 이 고난 중에서도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그를 성공시켰고 그 고난이 기도케 하더니 영안이 열릴 수도 있게 한 것입니다. 클로스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생한지 6주밖에 안됐을 때 안질이 걸렸습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실명하게 됐는데 기도하면서 눈을 가지고 볼 수 없었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600여 편의 찬송작시를 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런 찬송가들이 클로스비의 작품들입니다. 눈먼 사람이 눈뜨고 사는 사람들을 이처럼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다 기도의 덕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떨 때 기도합니까?

병으로 고생할 때입니다. 본문 14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기도할찌니라" ''병에는 장사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병들면 몸이 노근해지고 마음도 절망의 늪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병들지 않을 육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병원마다 초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도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께서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병원 영안실은 장례 예배가 없는 날이 없다고 합니다. 어제도 그제도 장례예배를 치뤘습니다. 생각하면 건강처럼 큰 축복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건강수칙 제1조가 소개되어 있는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약을 먹더라도 기도하면서 먹고 병원치료를 받더라도 기도하면서 치료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최첨단의 의술을 가진 의사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의사 집사님께서 어제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시오 그 이름이 "여호와 라파"이십니다. 병들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병든 사람은 좋은 병원, 좋은 의사, 좋은 약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 좋은 병원은 교회요, 좋은 의사는 주님이시고, 좋은 약은 기도의 약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사 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고치리라" 사실 예수님께서 "에바다!" 하셨을 때에 벙어리의 입이 열렸지요, "달리다굼!" 하셨을 때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귀신아 물러가라!"하셨을 때에 물러가지 않은 귀신이 없었습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했을 때에 수많은 병자들이 그 믿음으로 고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도 병고침 받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떨 때 기도합니까?

위기를 만났을 때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18절에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가뭄은 경제적 가뭄일수도 있고, 도덕적, 정치적 가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도 가뭄을 만난 형편입니다. 게다가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입니다. 어떠한 기도를 했습니까? 17절에 "간절히 기도한즉"이라고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늘에서 비가 멈추게도 하고 내리게도 한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끈질긴 기도, 응답될 때까지의 기도, 지속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바다 편을 바라보라'' 사환이 대답하길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러나 또 말했습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보라'' 한 번 기도했을 때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기도했을 때에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찌합니까? 응답을 기다리다 못해 포기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진땀을 뺍니다.

러나 엘리야가 교훈합니다. 사환에게 말하기를 ''일곱 번까지 바라보라'' 사환이 일곱 번째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비가 내릴 징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큰비가 되어 이스라엘 땅에 가뭄을 없애고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할 때에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고통에서 해결해 주시고, 질병에서 구원을 주십니다. 간절한 기도,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문제해결을 만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둘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본문에서 답합니다. 두 가지 기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본문 15절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합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마치 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6)"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 할 때에 의심은 금물입니다. 의심하는 기도에는 응답, 능력, 이적이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고 기도하면 본문이 보장하는 말씀이 두 번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또 하나는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믿습니까? 새벽 예배 시간에 한 목사님 광고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할 계획이니 성도 모두는 교회로 나오십시오'' 라고 광고했습니다. 가뭄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오후에 성도들이 교회로 모이는데 장로님 손자 유년주일 학생도 함께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가 우산을 가지고 나왔는지라 물었습니다. ''이렇게 햇볕이 쨍쨍한데 넌 왜 우산을 가지고 나왔니?'' 어린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하러 가잖아요. 물론 갈 때에 우산이 필요 없지만 올 때는 우산이 필요할 것 아니예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른들이 ''하하하!'' 웃었습니다. 그러나 웃을 일이 아닙니다. 비를 달라고 기도하러 갈 때에는 우산을 들고 나설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참회의 기도입니다. 본문 16절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대답할 수 있습니까? 병은 죄 때문에 생긴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물론 죄 때문에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 그러나 모든 질병이 다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는데 제자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도 아니고 자기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리고 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도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했습니다. 여기 ''혹시''라는 말은 병이 죄 때문에 생긴 것만이 아닌 것을 보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혹시 죄 때문에 그 병 생길 수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할 때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내 죄 때문에 이 병 생겼나? 혹시 내 고난이 내 허물 때문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 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했을 때, 병으로 고생할 때에 우리 주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경건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 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질문입니다. 서로 기도할 수 없을까?

본문에는 ''서로''라는 말이 두 번 있습니다. 교회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에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불신가족은 스스로 교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교회 나올 능력도 없고 방법도 모릅니다. 따라서 먼저 믿는 사람들이 불신가족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형제를 돕고 협력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는데 기도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16절에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기도하라''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밝힌 말씀입니다. 이십 년 넘게 교회를 섬기면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넘어지지를 아니했습니다. 제가 똑똑해서 잘나서가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곳에서 저곳에서 기도해 주신 덕분인 것입니다. 어린 나무가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어지지 아니하도록 버팀 나무를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버팀 나무 기도가 필요합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를 위하여, 병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이것이 사랑 있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헤롯이 스데반을 죽인 다음에 사도들을 죽이려고 베드로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적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면 교회에서 그를 위해서 기도했고 12절에 보면 가정에서도 베드로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실수하여 4층 옥상에서 떨어졌습니다. 갈비뼈가 간을 뚫고 나아가는 중상을 입어 사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마침 목사님을 치료하는 의사가 믿음이 좋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치료하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형편이 너무 딱한지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수술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여기 목사님을 살려주세요. 목사님을 살려주세요"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사가 필요합니다. 이적적으로 이 목사님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님은 기회가 있으면 의사가 기도하면서 치료해서 생명을 건졌노라고 간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도해 주는 성도를 만나야 합니다. 기도해 주는 의사를 만나고,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기도하자 우리마음 합하여 기도하자 우리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마음 합하여♬

끝으로 실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화가 알버트 듈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을 기억할 줄 압니다. 듈러는 친구와 함께 농촌에서 농사짓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친구가 말합니다. ''듈러, 자네는 그림을 잘 그리니 자네가 먼저 성공하게. 나는 자네를 위해서 뒤에서 돕겠네'' 물론 물질로 돕고 기도로 돕는다는 말입니다. 마침네 친구는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듈러는 열심히 공부함으로 성공을 하게 됐습니다. 성공한 듈러가 어느날 수고하는 친구의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친구 듈러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듈러는 그때 친구의 손을 스케치했는데 그것이 세상에서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여! 병든 자를 위해서,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돕고 있습니까? 내 손이 기도하는 손이 되었습니까? 내 발이 달려가는 발이 되었습니까? 길에서 놀던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납니다. 이 아이가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울면서 약을 찾습니까? 의사를 찾습니까? 병원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엄마를 찾고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하면서 울어 보챕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가 모든 것을 알아서 약을 발라 주든지 붕대를 묶어 주든지 병원으로 데려가든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병들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처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엄마를 찾는 어린애처럼 병을 고치시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오! 주님이여, 고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도할 때 죄를 서로 고하면서 기도하고, 병 낫기를 위해서 서로 기도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강건하게 살면서 문제를 해결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