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웨슬리는 회개가 종교의 현관이고 신앙은 종교의 문이며 성화, 혹은 사랑은 종교 그 자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신앙을 하느님이 값 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바로 이 은총의 신앙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그는 올더스게잇에서 회심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신앙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으나 회심의 체험 이후에는 신앙을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신뢰에 의하여 얻어지는 두 가지 은총이 곧 의인화와 거듭남이다.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 그 차이점과 관계는 어떤 것인가?

1. 의인화(義認化, Justification)
웨슬리는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라면,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또한 거듭남이 우리가 성령을 통해 경험하는 주관적 은총이라면,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객관적 은총이라고 구별하였다. 따라서 거듭남이 우리의 내면적 경험이고 실제적인 변화라면, 의인화는 우리 밖에서 우리를 하느님과 관계 맺게 하는 것이고 관계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듭남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면 의인화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과 원수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자녀의 관계로 양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뿌리가 남아있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이것은 그가 16세기의 개혁자 루터의 "용서받은 죄인"이란 개념을 받아드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을 뿐이지 죽는 날까지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웨슬리는 인간이 의인의 성품을 받을 수 있으며 죽기 전에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루터와 그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주의에서 배운 바가 많다. 그들은 "하느님의 의(義)"가 피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의를 얻기 위하여 전혀 행동할 필요가 없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후에도 적극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선행이 은총과 믿음에 의해 형성된 인격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치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저절로 맺는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의인화와 거듭남 이후의 사랑과 선행도 성도의 자유의지가 아닌 성령에 사로잡힌(노예) 의지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루터와 모라비안주의의 피동적 신앙을 비판하고 거부하였다. 하느님의 의와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도, 성경일기, 금식, 성만찬 참여 등을 위해 노력할 것을 역설한다. 비록 이러한 선행으로 의인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으로 의인화되지만, 그런 행동들이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수단(means of grace)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받지 않은 사람과 어린이들에게 성만찬을 베풀었다. 또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후에도 적극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사랑과 선행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성도들이 각자의 자유의지로 응답하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온전한 의인의 성품을 받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선행할 것을 권면하다.

2. 거듭남(新生, Rebirth)
웨슬리는 올더스거잇에서 회심의 체험을 하던 날, 의인화와 거듭남이란 두 가지 은총을 동시에 경험하였다고 고백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의인화되는 은총을 신뢰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구원하고 자유케 하시므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확인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의인화와 거듭남은 같은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이 둘은 시간적으로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의인화가 논리적으로 먼저이고 속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거듭남은 인간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즉 속사람이 변하여 죄인이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 안에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 형상은 하느님의 도덕적 형상(moral image)으로써 의로움과 거룩함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이란 아담이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의 도덕적 형상, 그의 생명과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자는 예수의 성품, 곧 하느님의 성품을 본받기 시작하게 된다.

거듭남은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시작이다. 성화의 시작은 신앙에서 비롯되는 은총이다. 따라서 구원의 시작 곧 의인화와 거듭남도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그러나 성화의 완성은 신앙으로만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거듭남이란 영적 인간의 탄생을 뜻하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혹은 짧은 시간에 나타나는 형상이라고 한다. 거듭남이 영적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고 잃어버린 하느님의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사람이 거듭나면 그 영혼이 점진적으로, 계속적으로 성숙을 향해 성화의 과정을 밟는다고 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남은 성화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이고 성화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완전을 향한 성장과정이라고 하겠다.

웨슬리는 거듭남이 성화를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은총이라고 한다. 사람은 거듭남으로 세상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완고에서 온유로, 세속적, 감각적, 악마적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새 마음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거듭남이 영적 시각 및 청각 장애에서 하느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그의 내적 음성을 듣는 것이라면, 성화는 영적 청각과 시각이 더욱 단련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성화 과정에서는 새 마음이 거룩한 마음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거듭나는 순간에 하느님이 주시는 성품을 받는다면, 성화의 과정에서는 하느님의 성품으로 계속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거듭남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은총이라면, 성화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은총이다. 거듭남은 신앙과 소망과 사랑으로 나타난다. 신앙은 단순한 지적 인정이 아니라 생명과 삶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이다. 소망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와 세상 사랑에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의 과정에서 신앙은 더 큰 신앙으로, 소망은 더 큰 소망으로, 사랑은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참고서: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기독교서회, 1993